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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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경멸받아 마땅한 조건 아래서 벌어진 경우에만 자유롭지 못한 죽음이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택한 죽음은 다르다. 아무런 사고 없이 똑똑한 의식을 가지고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인생은 ‘최고로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줬다. ‘있어서 안 되는 것은 실제로 있을 수없다‘는 게 심오한 농담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죽음이라는 모순(살기 위해 죽는다는 사실)을 또 다른 보다 더 놀라운 모순이라는 값을 치르고 풀어버렸다. 그 더 놀라운 모순은 이렇다.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죽는다. 고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에게 어떤 판단을강요하던 인생은 이제 없다." 아니,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최소한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에서만큼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어리석게도 그토록 갈망했던 나 자신을,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을 현실로 이루어냈다." 현실이 그토록 나에게 허락하지 않던 바로 그것을! 뛰어내리기 직전, 바이닝거는 비(非)유대인이었으며, 빗자루를 든 처녀는 꽃미남 가수의 사랑을 받는 애인이었다.

‘에셰크(échec)‘는 운명적인 단어다. 독일어의 비슷한 낱말들은 그 어떤 것도 같은 분위기를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서툴러서 프랑스어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상인은 ‘에셰크‘를 당했다. 바꿔 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죽음이 상인을 세상으로부터 몰아
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게 아니다. 원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사람은 ‘에셰크‘ 속에서도 살 수있다. 물론 아주 치욕적인, 말하자면 ‘비자연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에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치 무슨 수치스러운 짓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듯 자살이라고 부르는 자유죽음을 그는 감행했다. 그래도 ‘에셰크‘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제 ‘에크‘는 당사자의 등 뒤에서 상존하는 위협이다. 그리고 ‘에크‘는 죽음보다도 더욱 두드러져보인다. 그래도 참아내야만 한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견습공더러 최고 경영자와 똑같이 행동하라고? 공산당 당원들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라고? 늘 남들을 두고 허약하다고 한다. 항상 남들이 더 강해 보인다고 투덜댄다.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점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자유죽음으로 이끄는 ‘에셰크‘ 의식에는, 이 ‘에셰크’가 살아가면서 겪는 것(수험생의 불합격)이든 인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에셰크‘(결국 인생이라는 집은 무너지고 말리라는 바꿀 수 없는 사실)든, 먼저 구토의 감정이 선행돼야만 한다. 평범하게 살라는 말은 ‘에크‘를 끌어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사회는 말 잘 듣는 온순한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요란을 떨지 않아 고맙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 자살하는 사람은 요란을 떠는 옹졸한 인간이다. 그러나 구역질을 늘 달고 사는 사람에게 인생 안의 ‘에크‘와 인생 자체의 ‘에셰크‘는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다. 아픔에 가슴이 쓰라리지만 이를 악물고 자부심을 내세우며 거부하기로 굳은 결심을 한다. 더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소수파에 가담하기로 한다. 이 소수파의 사람들은 말한다. 살아서 흘리는 눈물은 비겁함일 뿐이라고, 소심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치 모든공포의 근원인 저 죽음의 공포에 이마부터 들이대는 것 이상으로 드높은 용기는 없다는듯이. 자살하기로 뜻을 굳힌 사람의 용기는 만용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용기에는 언제나 일말의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인생 논리는 슬쩍부끄러움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사람에게 묻는다. 왜 참아낼 수 없느냐고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 좀 보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견뎌내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찔러댄다.

이제 자살은 가난과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욕이 아니다. 자살은 더 이상 침울해진 정서를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니다(중세에는 심지어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맞서 그에 응전하는 일종의 대답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 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우리의 자아는 조각조각 끊어져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기억의색은 누렇게 바래고, 우리의 현실은 저 끝 모를 바닥으로 빠져든다. 자연 죽음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일까?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에 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말하는 게 자살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저 치욕을 감수하고 사회가 그 변화무쌍한 변덕 속에서 그의 행위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게 낫지 않았느냐고? 아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자신의 ‘에셰크‘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이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실패자가 될 위험을 예방한 것일 따름이다. 우울증환자가 자신의 메말라버린 세계관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세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에게 인정을 해줘야 한다. 그의 선택은이성적인 것이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기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일 뿐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는 이렇게 꾸짖는다. 아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것은 없다. 어차피 반드시 찾아올 어느 날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니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저 꾹 참고 그날을 기다려야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자유쥭음에는 분명 호소의 성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호소보다는 메시지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메시지는 호소를 넘어서는, 호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든 또는 공허한 개념의 장난으로 말해진 것이든, 일체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파랗게 질리게 만들 정도로 과도한 것일지라도 어떤 행위가 돌이킬 수 없이 결행되었음을 말하는 게 메시지다. 자유죽음의 경우, 그것은 인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자살자의 메시지를 일상 언어로 옮겨볼 시도를 해보자.
그의 행위는 이런 외침이다. 사회라는 네트워크의 한 부분인 너타자는 나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점은인정하마. 그러나 똑바로 봐두렴. 나는 너희의 권력으로부터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그것도 너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않고서.

자살의 뜻을 품고 문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불손한 요구에 맞설 당당함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 자유에 이르는 길은 찾을 수 없다. 이런 당당함이 없다면 철조망에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용소의 포로와 마찬가지다. 저녁에 나올 죽을 들이킬 생각에 침을 삼키며, 아침에 도토리 삶은뜨거운 멀건 죽을 그리며, 다시 점심에 나올 무죽을 그리워하는 인생이라면 그렇게 계속 살아라. 그렇지만 여기서 인생의 요구는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인생으로부터 빠져나오라는 요구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여기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해서 죽음은 곧 삶이 된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부정이 돌연 긍정이 된다. 물론 이런 게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논리와 변증법은 서글프면서도 웃기는합의와 함께 실패하고 나가떨어졌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주체의 선택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옳다고?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웃고 호흡하며 성큼성큼 걷는 것에 비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무엇이 정의이고 뭐가 올바른 것인지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품위와 체면을 갖추는 모든 전제 조건을 거스르는 존엄이 무엇이냐고? 살아서 웃고 호흡하며 성큼성큼 걷는존재로서의 인간과 충돌하는 인간다움이라는 게 뭐냐고?
"자살할 뜻을 품은 사람을 둘러싼 정황은 좋지 않다. 이미
자살을 저질러 버린 사람의 상황도 최선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의 선택과 행위 앞에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 그들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더욱이그들 앞에서 우쭐대며 무시하는 행동은 보이지 말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따질 수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조리 있게 따지고 들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우리를 떠나간 사람 앞에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왜 우리를 버렸냐며 조리 있게 따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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