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쓰고 싶은 글은 많았는데 글쓰기를 클릭하면 머릿속은 하얗다. 이상하지만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머리는 용량의 한계가 있는데 든든히 보조해 줄 외장하드가 없다. 아니. 늘어가는 책 옆에서 같이 늘어나는 메모장과 무지 노트, 각양각색의 키티들을(다이어리) 보면 그것은 이유가 아닌 것 같다. 그냥 내가 게으를 뿐이다. 슬프게도 그게 맞다. 덧 붙여. 예쁜 글씨도.
다이어리 구입 후 작성된 메모들을 따로 모아 상자에 담아둔 적이 있었다. 야심차게 시작해 한껏 멋을 부린 글씨들을 몇장 넘기면 뒤로 이어지는 괴발개발 쓰여진 글들. 나에게 뭘 말하고 있는건지. 이걸 도대체 읽으라고 써 둔건가? 한때 내가 이렇게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건가? 글들은 왜 이렇게 버라이어티한거냐?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메모인데 누가봐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잖아. 읽는데 손발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빨개져서 혼났네. ㅠㅠ
1.
드디어 내 손에 블랙베리가 들어왔다. 이걸 쓰는 사람은 여성입니다. 라고 알리기 위한 핫핑크 젤리 케이스. 쓰잘떼기없는 앱들로 가득찬 쿼티 자판의 블랙베리. 전혀 스마트하지 않으면서 쓰는이에겐 고난도의 스킬을 요구하는 주인을 아주 물로 보는 블랙베리. 결국엔 재주 없는 이(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피처폰으로 사용하게 하는, 그렇게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의 블랙베리. 기능을 알아보기 위해 웹서핑을 하던 중 우연히 등록을 하게 된 비비엠 친구는 전화와 비비엠만 돼요. 그거면 돼요. 라고 말한다. 그래서 대답했다. 아직은 익숙치 않은 쿼티자판을 꾹꾹 눌러서. 전 전화만 돼요.(실은 왓츠앱도 쓰고있지만) 라고 말해주었다. 비비엠 친구는 단 한명인데 그게 님이라고 ㅎㅎㅎ 웃음도 덧 붙였다. 그가 말한다. "영광이네요" ㅎㅎㅎ 다시 웃음을 덧 붙여 주었다.
2.
"예전에, 119가 생기기 전에, 그러니까 지나간 20세기에, 직업적으로 익사체를 건져주는 종족이 있었어요."
승환은 오영제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오영제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차분하게 버티고 섰다.
"우리끼린 악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강도를 만나면 지갑을 던지고 튀라고 가르쳤다. 봉변을 모면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오영제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을 던져주기로 했다.
"악어족에겐 세 가지 금기가 있어요. 첫째, 비오는 밤에는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둘째, 술을 마시고 들어가지 않는다. 셋째, 서있는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다."
"재미있는 얘기요, 서 있는 시체라니......"
달빛이 오영제의 이마를 붉게 비췄다. 검은 눈이 승환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주검을 다루는 자 특유의 터부죠. 돈에 눈멀어, 서 있는 시체를 건드린 악어는 하루를 못 넘기고 죽는다더군요. 시체와 팔짱을 낀 상태로 발견된다고도 하고. 서 있는 시체는 자기자리를 물려주려고 신참을 기다리는 물귀신이라고도 하고. 악어족의 재앙을 보장하는 시신이죠."
P.193
부러운 사람이 있다. 나보다 글을 잘쓰는 사람이 부럽고, 나보다 나은 직장에 있는 사람이 부럽고, 나보다 예쁜 사람과 어린 사람이 부럽고, 나보다 아는 지식이 많으면 부럽다. 꼬박꼬박 신문을 챙겨 있는 사람이 부럽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 부지런한 사람이 부럽고, 정보를 찾고, 책을 읽고,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 부럽다. <7년의 밤> 정유정은 글을 읽는내내 부럽다는 소리를 입에 달게 했다. 내용이 뛰어나게 재미있다던가, 엄청난 감동을 준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근래 보게 된 한국 소설중엔 좋았지만 장르 문학쪽인지라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권유하기엔 쉽지 않는 책이다.
알라딘 서재에서도 높은 순위에 올랐던 책이라지만 나에겐 <7년의 밤>도 작가 정유정도 생소했다. 책 구입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책 보는 것도, 미드를 보는것도, 글 쓰는 것도 지겨워 인터넷을 켜두고 무한 클릭질 중에 우연히 "악어족" 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난 연예 가십란을 타고 정치 뉴스로 그리고 경제 뉴스로 거기에서 관련 블로그 페이지로 연계된 웹들을 클릭하고 있었는데 "악어족" 이란 단어에 악어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사냥꾼들을 말하나? 생각을 했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 악어족에 마우스를 대고 클릭을 한다. 예상이 어긋났다. 펼쳐진 건 사진과 인터뷰가 담긴 페이지. 작가 정유정과 <7년의 밤>은 그런 나의 오해속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댐에 잠긴 마을과 잠수부. 자식에 대한 두 남자의 각기 다른 사랑의 방식.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그 7년의 이야기.
병원 입원실에서 수술 후 사지가 묶여버린 여동생을 간병하면서 난 <7년의 밤>을 읽어 내려갔다. 온돌로 된 바닥에 엎드려 병실 문 아래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울렁이는 깊은 밤을 지나 새벽까지. 여동생은 수술부위 통증으로 힘들어했고, 난 현수와 서원때문에 그리고 승환때문에 책 속에 깊숙히 박혀 힘들어했다. 눈이 까칠했고, 머리는 무겁고, 목이 뻣뻣했다.
너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책만 보고 있냐? 아침으로 전날 엄마가 가져온 전복죽을 그릇에 담아내자 여동생이 말한다. 목소리에 짜증을 숨기지 않는다. 나도 힘들었어. 침대 발치에 앉으며 말했다. 침대 위 간이 식탁엔 방금 받아온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어놨다. 여동생은 전복죽에 아직 손대지 않고 있었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멈출수가 없었어. 또 눈물이 나오든? 여동생이 묻는다.
예전 <얼음과 불의 노래>를 읽으면서 다음날 새벽근무임에도 책을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 울면서 봤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동생은 그때도 짜증을 냈었다. 눈속으로 새어드는 스탠드 빛에 그리고 나에게. 어떻게 해. 나 내일 새벽인데. 그럼 자! 잘 수가 없어. 뒤 내용이 궁금해서. 그럼 계속 보던지. 나 내일 새벽 근무라니까. 지금 안 자면 일을 어떻게 해. 그럼 자라고!! 잘 수가 없다니까!!!!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멈추긴 힘들더라. 다행이야 오늘은 근무가 아니라 쉬는 날이어서. 여동생은 말 없이 전복죽을 먹기 시작했다. 다 봤어 이제. 퍽퍽한 밥때문에 목이 힘들어 라면 용기를 들어 입에 대고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잘 됐네. 여동생이 말했다. 나 화장실 다녀와서 옷 갈아 입혀줘. 응. 텔레비전도 좀 켜주고. 응. 퇴원 전에 진료 마지막으로 봐야한데. 1층 가야해. 같이가. 알았어.
인터뷰에서 작가는 정보를 모아 놓은 메모에서 잠수부에 대한 것을 발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글의 배경이 되는 곳은 내가 사는 곳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그녀가 다녔던 학교는 내가 사는 곳에 있는 곳이고, 직업도 같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쓴 글로 문학상을 탔고, 그 뒤로 전업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사는 곳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며,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업을 두고 하고 싶은 일을 했고, 나는 이유가 붙었다. 나는 항상! 이유가 붙었다. 그녀가 부러웠고, 그로 인해 나는 부끄러웠다. 한참을 그랬다.
3.
페이퍼를 올리고 나면 난 씻고 약속 장소로 나갈 것이다. 오늘은 쉬는 날이고, 저녁이 부담스러워 점심으로 약속을 잡은 친구를 만나러 간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는 동창들 경조사에 미리 연락을 하는 총무같은 존재였는데 지난달 결혼을 했다. 난 근무때문에 가보질 못했다. 그를 만나 식사를 할테고, 주지 못한 봉투를 건네고 나면 그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이 전부는 아니어도 조금은 가시게 될것이라 생각을 한다.
동창회 약속이 잡힌 날이면 귀찮아 그의 전화를 일부러 피하기도 했고, 먼저 꺼낸 약속을 말 없이 깨는 경우도 다반사. 어쩔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결혼식에도 못갔고, 미리 또는 그 후에라도 연락을 해주지 못했다. 그에게 한 말 중 절반 이상이 미안해. 미안하게 됐다. 오늘도 만나면 미안해로 시작해서 미안해로 끝날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는 내 사과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녁에 만나 술마시고 떠들던 사이에서 저녁은 부담스러워 점심 약속을 하게 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의 80퍼센트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미안하니까. 그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도 만나기가 민망하다. 앞으로 우린 예전처럼 심지어 오늘같은 점심약속도 하기는 힘들것이다. 나머지 20퍼센트를 그와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아내가 가지고 있을테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친구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의무감이 존재하는 친구 사이. 서로의 경조사를 챙길 것이고, 필요하면 서로의 직업에 도움을 청할 텐데 그도, 나도 상대방의 부탁은 선뜻 들어줄 것이다. 술 마시며 서로 부대끼며 즐기는 사이는 아니어도, 몇년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도, 미안해와 괜찮아가 반복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였다. 서로에게 최고는 아니어도, 필요할 때 손 뻗으면 잡아주는 그런 친구가 될 터였다. 편하지만 편할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친구는 아닌, 부담없이 만나지만 연락하는 것은 부담이 되는... 그런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