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mésentente)의 철학자 랑시에르

 

아마도 한국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알튀세르가 한창 국내에 소개되고 있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15년 가량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국내에 변변한 책 한 권 번역된 적 없는 낯선 철학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알튀세르의 주도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6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자본'을 읽자』 세미나에 멤버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국내에서 진행된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 이유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 문제를 둘러싸고 그가 알튀세르와 갈등하다 결국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74년에 자신의 에세이를 모아 낸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자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대중투쟁을 마비시키는 "질서의 철학"이라고 혹평하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이러한 평가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는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단지 알튀세르주의에 대해서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차이의 철학'이라 불리는 일군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상들(료타르, 들뢰즈, 데리다 등)에 대해서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변혁'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쓴 테제 가운데 11번째 테제("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를 다시 취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제껏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랑시에르의 작업만이 소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즉,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철학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비소속성'은 단지 철학 내 이러저러한 학파나 입장들에 관련해서만 드러나는 그의 특징도 아니다. 예컨대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와 철학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정치철학 내의 어떤 경향이 되길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치철학이라는 학문분과 전체를 자신의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공인된 학문분과 체계 내에서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이론적 위치, 이것이야말로 공인된 정치 공간 그 자체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외부자적인 태도와 상당히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테면 '공적 공간'(혹은 '공론장')의 경계선에 서서 그 공간 바깥에 여전히 우리가 잊고 있는 어떤 '외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있기에, 그 안에서 주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 말을 교환할 수 있게 되는 '호혜성'의 감각적 공간이야말로 고유한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정치철학'적인 사고(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다양한 사회계약론, 현대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 이르기까지 정치철학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전제다)에 대해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할 권리'를 비롯한 다양한 권리들의 분배가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공적 공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사회는 언제나 내부의 어떤 특정 부분이나 구성원들을 "몫이 없는 부분(une part des sans part)"으로 미리 배제하고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구축이야말로 '호혜성'을 가장하는 공적 공간 내의 모든 '공정함'과 '정의'의 조건인 것이다.

정치철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 같은 급진적인 비판은 특히 『불화』(1995)라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서 발전된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 '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 '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인식하는 '분배'("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분배, 그리고 이 분배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체계")가 사실은 정치가 아닌 경찰의 일임을 폭로한다. 단, 그는 푸코를 참조하여 경찰활동의 의미를 폭력행사에 의한 질서유지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분배란 언제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서로 '호혜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간에 때때로 분배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가(즉 누가 그 사회의 '부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일 공동체에 어떤 기여도 한 바가 없으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도둑심보'를 가진 자들로 분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결국 경찰활동의 목표는 이러한 배제의 실현이며, 정치철학은 이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한다.

이제 랑시에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를 이러한 경찰 논리에 대립시켜 새롭게 규정한다. 정치란 바로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치는 본래 자기 근거나 기원(arkhê)이 없는, "추문"에 불과한 것이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제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기여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즉 '불화'하게 된다). 귀족(aristoï)은 덕(aretê)(이는 '뛰어남(excelle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자(oligoï)는 재산(공동체 경제에 대한 기부금)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귀족제(aristocrac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후자는 과두제(oligarch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귀족은 보통 부유한 계급과 마찬가지로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양자 사이에는 진정한 쟁점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아테네의 데모스(demos, 자유인 신분의 고대 도시국가 빈민들)가 주장하는 기준 때문에 발생한다. 데모스는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과 달리 공동체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발언의 자유―라는 '빈 껍데기 재산'만을 가져와 공동체를 '논쟁'과 '분열'로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전체를 다수자인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모스의 주장과 실천이야말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실천의 원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정치란 한 사회의 '부분'으로 인정받지 못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그 사회에 폭로하고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입각하여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며, 따라서 이는 몫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나 행해질 수 있는 '대화(dialogue)'가 아니라, 자신을 대화상대로 전혀 인정치 않는 사회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3인칭'으로 폭로하는 '독백(monologue)'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은 후기 하이데거의 진리(aletheia, 베일을 걷어냄) 개념 및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포이에시스(poiesis, 이는 '제작'이라는 뜻을 갖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특히 사물을 이름짓고 그것을 현전 안으로 불러내는 언어의 '시적(poétique)'인 기능으로 인식된다) 개념과 유사하게 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공적 공간 안에서 감각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이름지어 불러내고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기존의 감각공간을 다시 분할하는 실천이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사건'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자마자 그것은 공인된 감각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기이한 피카소의 그림이 이제는 커피 잔의 무늬로 사람들에 의해 편안하게 소비될 수 있듯이, 또 그렇게 소비되는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될 수 없듯이.

그렇다면 공인된 감각공간 내에 본래적으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일까?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정치의 이러한 사건적 성격을 잊게될 때 '전체주의'와 같은 최악의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데모스(demos)와 오클로스(ochlos)를 구별하고 후자를 정치의 주체로 사고하려는 일체의 시도들을 비판하는데, 전자가 비규정적인 다수자(하나의 비어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통일(unification)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다수군중을 의미한다. 언제나 통일이란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란 언제나 '불화'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랑시에르의 테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05. 3. 28.

최 원 (Loyola University Chicago, 철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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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Badiou's St. Paul



Alain Badiou. S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Tran. Ray Brassi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111 pgs.

S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is yet another religious intervention into a practical philosophy that can help us understand the eventizing of revolutionary activity. Badiou's book forms a group with a number of critics, including Slavoj Zizek and Antonio Negri, who understand the use of religious language and religiosity in establishing a new type of revolutionary potential.   For Badiou, Paul is not the father of Christianity as a metaphysical project. Rather, Paul is a revolutionary anti-philosopher of the event. Pauline Christianity forms the community as a militant collection of singularities operating under a radical universalism. Badiou really wants to show us the relevance of using and appropriating the example of Paul for revolutionary projects today. As such, he is not so much concerned with the details of constructing a historical Paul. Paul is a Christian insomuch as he participates in the Christ-event, insofar as he participates in the collective effort that politicizes the resurrection of Christ as something that can organize the multitude towards revolution. Baidou's book is a strange rethinking of collectivity, as it sees the eventizing of the revolution in a prophetic intratemporality that locates Paul as a contemporary figure currently helping us participate in resistance against oppression.
   
Contemporizing Paul or actively stripping him from a very singular historical nexus brings up all sorts of questions regarding how this appropriation relates to the appropriateness of Badiou's project. To what end can the figure of Paul really help us think about the event? And why, in particular, must a figure of religious thought be used to organize a book on radical politics and philosophy? Badiou makes it clear early on that he cares little for the religious implications of his book. "Basically, I have never really connected Paul with religion. It is not according to this register, or to bear witness to any sort of faith, or even antifaith, that I have, for a long time, been interested in him" (1). This very specific and forceful declaration is an act of appropriation par excellence. Badiou sees Paul as an opportunity for a very particular type of action. For Paul, the importance of the messiah was the event of his resurrection. For Badiou, the importance of Paul lies in how he makes us think about the event in general. "If today I wish to retrace in a few pages the singularity of this connection in Paul, it is probably because there is currently a widespread search for a new militant figure" (2).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focuses its argument around Paul's worthiness as a successor to the figure of the party militant.   Paul's appropriation is a resurrection or a recreation, a rememorialization of religiosity in the service of repeating his thoughts within our contemporary political environment. It is, therefore and despite Badiou's never thinking so, religious through and through.
      
I think it is important to note, however, that this religiosity produces an immanent political gesture that rescues Badiou's book from merely being an interpretation of Paul caught up in the closure of metaphysics. I see this potentiality precisely in Badiou's need to use the past to produce a future against and ultimately beyond capital. In this sense, the radical universalism he advocates acts as a disjointed bridge connecting the event and making it contemporary with the concerns of the multitude that declares it. This is what Paul affects when he declares the good news. Badiou sees the good news as something that automatically threatens the consistency of Jewish law. Also, and this is key for Paul as well as Badiou, the Good News can only work as the event of each universal singularity working within it. It cannot be determined any generalities. The Good News brings about what Badiou would call a universal singularity with each believer participating in it. While respecting the singularity of everyone affected by the Good News, Paul ultimately rejects what he sees as the restrictive prohibitions of Jewish Law. Christianity never exists outside of the believer declaring the truth of the Christ-event. Every time this event is declared and held with conviction, the believer forms a radical community that has no laws and is entirely subjective.

Towards metaphysics and capital, the truth procedure can only offer indifference. It is not simply that Pauline Christianity opposes Jewish law, but that it is entirely indifferent to it. Badiou articulates this indifference not only in Paul's attitude towards Jewish law. It isn't as though Paul simply rejects the tenants of the law. The revolution of Christianity, the Christ-event that affects the Christian simply does not regard the tenants. It is not as though Paul condemns Jewish Law, he just does not pay much attention to it. In this not-paying attention to, Badiou marks what could be the most potent revolutionary stance: an absolute exodus based upon in-difference-homonymous to what Giorgio Agamben in The Coming Community would call "whatever being"-vacillating inbetween the singularity of the one experiencing the Christ event and the generality of the impossible community Paul tries to construct. In-difference would not only mark a rejection of difference, but would also include a construction of being and the event focused around and inside of difference-in-itself. Difference would thus reject the static and standard identity networking of capitalism, and instead open itself up to fidelity as repetition, as a revolution that seeks a perpetuation of the event in its rejection of what Badiou calls the "automatism of desire" (79).

Fidelity to the event, in this case, would also reject the event as an automation of repetition. The static repetition of the law seeks an absolute harmony with earlier images of the event. This automatic repetition Baidou calls "sin." Instead of being merely desire, Paul talks about desire's relation to the dead structure of the law. "Sin is the life of desire as autonomy, as automatism. The law is required in order to unleash the automatic life of desire, the automatism of repletion" (79). The yoke of autonomy, of desire as manifested in the law autonomously, is the very essence of sin. Despite the absolute need to work together or to form the community of believers based upon the Christ event, sin marks division and discord through this facile myth. This autonomy, for Badiou, is nothing but automatism; it is nothing but the static repetition of the same image which cannot fully embrace the radicality of the event. It repeats the event in a pathetic attempt to recapture a lost revolutionary moment. The problem is that in repeating the event mimetically, automatic desire can do nothing but prolong the reign of the law. The network of difference, automated by a static understanding of repetition, codifies the creative powers inherent in desire and focuses them into the law. Autonomous desire is sinful, for Paul, not because it transgresses-but because its transgression is naïve, nostalgic, and impotent.      

Instead of a contradiction of the automatism of difference, Badiou's in-difference would, in Deleuze's words, vice-dict that difference. While talking about Hegel's understanding of contradiction in Difference and Repetition, Deleuze argues that "[i]t is not difference which presupposes opposition but opposition which presupposes difference, and far from resolving difference by tracing it back to a foundation, opposition betrays and distorts it" (51). The contradiction of the automatism of difference would fail to fully pose a radical alternative. It could only replace the law of automatism, of the repetition that signifies this law, with yet another law. To pronounce the Good News, one must force a different thinking, a thinking of indifference that could react radically to the law of automatism. Badiou's analysis of the automatism of difference, of desire as difference, is similar. In-difference is needed for Badiou because it makes this non-contradictory difference possible in revolutionary thought.   It is a non-dialectical movement that shatters any normalizing conception of difference as a networked reality under Jewish law. Fidelity to the event marks, thus, a constant moving away from the processes that would construct a singular truth or a singular law or even a singular difference. The event can only be called attention to in this moment of in-difference; and this in-difference, for Badiou, marks the only possibility for a revolutionary understanding of universalism.

The invocation of Paul by Badiou shows just how revolutionary this kind of thinking can be. Paul's image is already incorporated into an extremely complicated capitalistic apparatus, one that is becoming more and more global. Fundamentalisms--Jewish, Islamic, and Christian--all attempt to produce a radical alternative to global capital. By structuring their reaction so dialectially, though, fundamentalisms succeed only in reproducing the very structure they seek to disrupt. This is not to mention the complicency that fundamentalism must have with technology to be recognized in a globalizing world, as Jacques Derrida rightly points out in "Faith and Knowledge: Two Sources of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Badiou's invocation of Paul is an attempt to link religious thinking to a radical political theory of the event. Badiou's use of indifference to radically oppose the automatism of desire can give theorists who are interested in different theoretical approaches against the growing globalist mechanisms another way to think about the problem. While Badiou's thinking of the event could be complicated by Derrida's understanding of globalization and the technology of the event in "Faith and Knowledge" and "Limited Ink (2) ("within such limits"), Badiou does provide a very nuanced approach to thinking about the affinities Marxist thought can have with religion--Christianity in particular. To think against the totality of the emerging global Empire, to use Hardt and Negri's term, one must understand the possibilities religion can provide in this thought. Badiou's book fills this void admirably.   

Badiou's affinities with Paul, Deleuze, and Agamben, perhaps, serve as examples for the type of revolutionary practice he seeks to employ and the understanding of universalism he seems to want to lay claim to. Love is the word Badiou uses to signify the opening of universalist revolutionary practice. This practice does not replace law with lawlessness, but sees itself beyond itself. The Law returns as a beyond of the law, the community returns as a beyond of the community, love returns time and time again--but beyond itself. Revolution, likewise, moves beyond itself in an act that serves to perpetuate what it is. Universalism cannot, therefore, simply be an image or a doctrine that makes singularities static or seeks to employ them in the service of a particular event understood in only one way. With love as a beyond of itself, as a perpetuation of revolution that constantly displaces difference-as-contradiction, universalism can only exist within revolutionary practice. It can only perpetuate itself in in-difference, in a difference that constantly seeks its own repetition as absolutely different and singular.    "[T]he impetus of a truth, what makes it exist in the world, is identical to its universality, whose subjective form, under the Pauline name of love, consists in its tirelessly addressing itself to all the others, Greeks and Jews, men and women, free men and slaves" (92). To be militant is to be universalist is to be a lover; it is to address oneself to all singularities in-differently. For it is within love, and it is here that we see yet a further affinity that Badiou might have with Che Guevarra and Paulo Freire, that the process of the truth event comes to be what it is: not in a static repetition, but in a absolutely dynamic mobility that revolutionizes itself in its perpetualizing existence.


      
Works Cited
Agamben, Giorgio. The Coming Community. Tran. Michael Hardt. Minneapolis: U of Minnesota Press, 1993.

Deleuze, Gilles.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P, 1994.

Derrida, Jacques. "Faith and Knowledge: The Two Sources of `Religion' at the Limits of Reason Alone." Acts of Religion. Ed. Gil Anidjar. New York: Routledge, 2002. 40-101.

---."Limited Ink(2): (`within such limits')." Material Events: Paul de Man and the Afterlife of Theory. Ed. Tom Cohen et al. Minneapolis: U of Minnesota Press, 2001.

Hardt, Michael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Harvard UP, 2000.



Roger Whitson is a Ph.D. candidate in English at the University of Flo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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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spen.conncoll.edu/politicsandculture/page.cfm?key=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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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범죄와 레바논

 

2006. 8. 3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은 레바논을 마비시켰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카나 마을의 학살과 인명 손실은 단순한 '과잉'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국제법에 비춰보아도 전쟁범죄다.

레바논의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이스라엘 공군의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파괴 역시 레바논을 이스라엘-미국의 보호령으로 만들려고 계획된 전쟁범죄다.

그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기독교와 드루즈교의 80%, 수니 무슬림의 89%를 포함하여 레바논 인구의 87%는 지금 헤즈볼라의 저항을 지지하고 있다. 나머지 8%는 미국이 레바논을 지원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행위가 '국제사회'가 설립한 어떠한 법정에도 기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공모하고 있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즈볼라를 제거하기 위한 레바논 공격이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 이제 명확해졌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미국과 영국에 의해 찬성되었다.

요컨대 레바논이 누린 평화는 끝났으며 이 마비된 국가는 잊기를 희망했던 과거를 기억하도록 강제되고 있다. 레바논에 대한 국가테러는 가자 지구에도 반복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비켜나 있고 침묵속에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부분은 미국의 직접적 개입과 그 동맹국들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합병되었고 해체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야만의 희생자들과 저항자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범죄에 대한 우리들 정부의 죄악을 폭로할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 대한 점령과 레바논에 대한 폭격이 지속되는 한 중동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

 

Tariq Ali
Noam Chomsky
Eduardo Galeano
Howard Zinn
Ken Loach
John Berger
Arundhati Roy

http://www.guardian.co.uk/israel/Story/0,,1835915,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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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눈물의 일반이론

..

문학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 이 네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 ∴ ∴

무의미를 견뎌내는 일이 삶에서 중요하다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견뎌내는 일이다.

∴ ∴ ∴

시는 우리 삶의 소중함과 비참함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술이다.

∴ ∴ ∴

중력이란 무엇인가?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 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존재 Sein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 글자들, 유전형 genotype과 표현형 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우리의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 ∴ ∴

시는 포스트그램 post-gram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 ∴ ∴

아주 어렸을 때 일로,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밖에 나가서 동생이 다른 아이와 싸움이 붙어도 나는 멀거니 옆에서 구경만 했다고 한다. 다 끝나고 나서야 둘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이제 와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럴 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달리 처신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 ∴ ∴

이 무관심한 태도 dis-interestedness가 나에게서 삶에 대한 무능력을 낳고 무성의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나 영화 속의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좋아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단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지, 그런 태도가 전제하고 또 확보하는 거리 dis-tance가 나의 의미론적 생존의 조건이 된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한다. 문학이라거나 철학이라거나 하는 등속의 구분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문체일 따름이다. 문체란 언어의 한 묶음의 변주 variation이고, 어떤 변조 modulation이며, 자신의 바깥을 향한 언어적 긴장이다.(들뢰즈) 문체는 언제나 이질적인 heterogenous 언어 속에다 전위차를 일으켜 그 사이로 무엇인가가 지나가게,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S]tyle carves differences of potential between which things can pass, come to pass...)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그러한 작업이다. 자주 다른 이들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감전되었던 경험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 ∴ ∴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나는 의사가 와서 내가 쓰고 있는 동안 아내가 울고 있다고 말할까봐 불안하다.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 내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 어린것은 온갖 것을 보고 듣는다. 그 애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키라를 사랑한다. 내 어린 키라는 자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애 역시 내가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내게 내가 잘 잤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가 언제나 잘 잔다고 말해준다. 나는 무얼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神은 내게 쓰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결함을 지녔다. 나는 인간이다. 神이 아니다. 나는 神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춤을 추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시를 쓰고 싶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내 생의 목표이다.(니진스키, <고백>)

∴ ∴ ∴

드디어 관에 뚜껑이 덮였다. 못이 꽝꽝 박히고 짐마차에 실렸다. 마차는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가 끝나는 데까지밖엔 전송하지 않았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말은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렸고 가끔 끊어지기도 했다. 가엾은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추어서지도 않았다. 비가 그의 맨머리를 적셨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했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은 날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 비죽이 기어나오고 무슨 책인지 커다란 것이 한 권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었다. 어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갔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갔다. 드디어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 ∴ ∴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두 러시아인 댄서/작가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의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다지 잘 우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울음이 우리 생의 첫 발성(언어)이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감동받는다. 외롭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우리가 이 근원의 장소를 찾아가고 이 원초적 정념에 호소한다는 사실에 언제나 고무받는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정이 파탄나자 트래비스는 자신이 잉태되었던 바로 그 근원의 장소로서 '파리'(프랑스 파리가 아니다)를 찾아 사진 한 장을 들고 황량한 텍사스 사막을 헤맨다. 그의 그런 행위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질적인 어떤 공간이 파리 Paris/텍사스 Texas로 분절된다. 이 분절은 성(聖)/속(俗)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이고 구제론적인 것이다. 이 고질적인 의미론/구제론은 아주 인간적이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우리는 그리 돼먹은 듯하다.

∴ ∴ ∴

"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이것은 루마니아의 작가 에밀 시오랑(E. M. Cioran, 1911-1995)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그리고는 진부하면서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그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의 말: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 ∴ ∴

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그런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오랑이 포기한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것. 현재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 눈물의 일반이론을 위한 연습이고 밑그림이라는 생각도 한다. 거꾸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에 근거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던져지고 내팽개쳐진 각자의 운명(시오랑은 해체de-composition라고 부른다. 이 해체가 그의 글쓰기 양식을 규정한다.)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 solidarity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

∴ ∴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 ∴

이 시의 1연은 나(화자)의 사랑-이야기의 전조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건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다. 이때 푹푹 나리는 눈은 이 사랑의 축복과 고난을 동시에 표시한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나는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밤주막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현실을 이 시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부분은 2연의 전반부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여기서 '사랑하고' 대신에 쓰인 '사랑은 하고'란 표현은 은근하게 나의 사랑을 특수화, 주제화하고 있다. '은'이라는 조사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는, 나의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고 외로된 사랑이다. 즉 나는 그녀, 나타샤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오지 않을 그녀는 눈 나리는 밤에 내가 불러낸 일종의 미적 가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님'이란 말 대신에 이 시에 이색적으로 쓰인, 러시아 여성의 이름 '나타샤'도 나와 그녀와의 거리를 더욱 분명하게 표시하며, '푹푹'(한숨소리!) 날리는 눈발 또한 혼자 소주를 마시는 그의 쓸쓸한 정조를 부추긴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정조는 곧 반전된다. 후반부의 내용은 어느 정도 술이 오른 나의 소망사항이다. 나는 이렇듯 눈이 푹푹 나리고 쌓이는 밤에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에 가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소망이고 꿈이다. 여기서 아마도 도회(혹은 읍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산골은 현재의 현실과 대립되어 있는 소망스런 미래의 공간이다. 나는 (현재의)도회/(미래의)산골, (현재의)현실/(미래의)소망이라는 구도를 떠올리면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 bergang을 자신에게 독려한다. 나의 환유 metonymy로서의 흰 당나귀는 이 이행의 매개자이며 보조자가 될 것이다.

3연은 소주 기운과 자신의 소망에 더욱 고조된 나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2연)와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3연)의 도치된 문형은 그런 정조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의 자신감은 사랑의 주체로서의 나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후로 나에게서 푹푹 나리는 눈은 나와 나타샤의 사랑에 대한 따뜻하고 여유로운 축복의 뜻을 강하게 갖는다. 이윽고 마지막 5연에서 나의 기쁜 마음은 절정에 이른다. 이제 아름다운 나타샤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라는 표현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통한 나의 신생(新生)을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 ∴ ∴

 

 

 

 


시에 대한 감상을 대강 적어보았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1938)는 60년 전의 시이다. 그렇지만 응앙응앙 하는 신생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시로 변한 눈물들, 생각으로 변한 눈물들, 빈들거리지 않는 눈물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당신은 소주의 힘이라고 말하려는가?). 사실 우리가 "더러워 버리는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매번 세상한테 (넘어)진다. 그래서 넘어가는 사람 Uber-mensch이 되기 위한 바쁜 이행 Uber-gang의 와중에도 넘어지는 사람 Unter-mensch으로서 우리는 매번 몰락 Unter-gang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세상이 본래 그리 돼먹은 거라면. 우리가, 가난한 우리가 참는 수밖에. 우리가 이 운명을 사랑하는 수밖에. 이러한 운명이 너무 좋아서 응앙응앙 오늘도 우는 수밖에!

∴ ∴ ∴

간혹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98. 8.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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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이후 그리고 좌파의 정치

5. 31이라는 사건

5. 31 선거가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 결과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아마 “열린우리당”을 빼곤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알다시피 수많은 여론조사는 일찌감치 한나라당이 압승할 것임을 예상하였고 이는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집권정당이 선거에서 진다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그리 대단히 여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가 남다르게 받아들여진 데는 이번 선거 결과가 동일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상황 전개의 한 계기로 여겨질 수 없는 어떤 특징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현실적인 사태와 구조적인 사건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태는 예외적으로 구조의 논리를 집약하고 현실화하는 것처럼 등장할 수 있다. 평범한 사회적 사태와 정치적 사건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번 5.31 선거는 바로 그러한 구조적 논리와 현실적 사태가 겹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적지 않은 이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컨대, 이번 선거 결과가 1987년 이후의 역사적 주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 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이는 현재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세력(흔히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불리는 헤게모니 블록)의 역사적 유효기한이 임박했으며 어쩌면 이미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판단이 막연하고 불명료한 것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이를 부인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more..
less.. 그런 판단을 거칠게 풀이해보자면 이럴 것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란 이름의 정치적 기획을 주도했던 세력의 헤게모니는 역사적 반환점을 지났다. 그들이 추진한 “민주화 기획”이란 정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절묘하게 호흡을 맞추어 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 진보진영이 자신의 정치적 실천을 결정하는 수많은 곤란한 물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물음들 가운데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를 열거해보자. 먼저 “민주화 기획”은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위한 정책과 제도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적 관행을 가리키는 것일까.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해, 신자유주의적 이행이란 사회적 현실을 가리키고 민주화 기획이란 그런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행위나 제도로서의 정치에 불과한 것일까. 따라서 우리는 소박하게 “민주화 기획”이 충분히 민중적이지 못하다는 것, 충분히 평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만으로 너끈히 “민주화 기획”을 극복하고 “민주화 이후”의 진보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을 겪은 이후 변화된 현실을 보다 깊이 반영하고 그 현실과 보다 일치된 투쟁만으로 우리는 진보 정치를 충분히 실천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아가 “민주화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1987년 이후 자본의 정치가 과연 그러한 내용으로 모두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민주화 기획”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 이상의 무엇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정치”를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런 복잡한 물음과 직면하여 있고 이 물음들에 답하지 않는 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정치란 사회적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정치는 사회에 근거한다거나 사회적 현실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언제나 정치는 이미 주어진 역사적 조건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 정치는 무(無)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역사적 재료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은 언제나 자신의 정치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법칙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자동적으로 정치가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표상한다는 생각을 끌어낼 수는 없다. 보편적인 시민으로서의 노동자와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참여하며 구체적인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곧바로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편적인 시민 혹은 인민으로서의 노동자는 분명 직접적인 사회 현실 속에 놓여있는 노동자와 다르다. 이 두 가지를 어느 하나로 환원하는 것, 즉 정치로부터 사회가 도출된다는 식의 입장을 절대화하는 것이나 아니면 정치는 사회를 반영하고 그것을 표상하는 것이라는 식의 입장(예컨대 경제주의)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특수한 사회계급인) “노동자의 해방을 통해서만 만인(인민)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널리 알려진 마르크스의 수수께끼같은 주장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노동자라는 사회적 행위자와 인민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단숨에 연결하는 이 놀라운 선언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진보정치를 계급정치라고 할 때 그 때의 계급정치란 인구 혹은 주민 중의 일부에 속하는 특수한 사회집단으로서의 계급이 있고 그 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식의 이해와 전연 무관하다. 계급정치가 함축하는 뜻은 사회 안에 계급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계급적 적대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자본주의는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것, 계급으로서 살아간다는 것과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은 같은 과정이라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착취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사회 “내부”에서 자신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조화로운 이해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뜻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만인의 해방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급정치는 사회를 형성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라는 입장과 정치는 항상 그것의 외부인 사회(마르크스주의자는 물론 이것을 “경제”라고 부른다)에 준거한다는 입장을 함께 묶어내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치로부터 사회가 나오는 것도 또한 사회로부터 정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하위 영역(경제, 문화, 정치 등) 가운데 하나가 정치가 아니라는 생각은 좌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정치가 사회로부터 자율적이고 심지어 정치로부터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가 만들어지지만 또한 동시에 그 정치가 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재료를 통해, 즉 이미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좌파에게는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생각을 또한 당연한 듯이 잊을 수 있다.
1987년 이후의 지배적인 정치를 비판하고자 할 때 진보진영이 저지른 잘못은 바로 이런 당연한 생각을 잊은 채 지냈다는 점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민주화 기획”을 1987년 이후의 경제적 현실의 변화와 동일시하는 것, 그리하여 “민주화 기획”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통해 형성된 자본주의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일치라든가 조응관계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사고를 마감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좌파정치의 핵심적인 곤경이 놓여있다. 좌파정치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이름으로 투쟁을 수행하여왔지만 그것으로 온전히 현재의 “정치”, 즉 “민주화 기획”의 정치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기획”과 그것의 정치학

1987년의 민주항쟁 이후 정권들이 교체되었고 각각은 나름의 통치 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민주화 기획을 각 정권이 실행한 통치의 내용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이라는 특성을 견지하고 있었고 이는 연속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외환위기 이전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은 적어도 외환위기 이후의 노사정 대타협 혹은 노동유연화에 버금갈만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노동정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따지는 것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란 점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교육 정책이 고용정책을 비롯한 노동의 사회적 조직과 통제에 관련한 정책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은 달리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민주항쟁 이후 20년간 우리는 단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논리에 따라 한국자본주의를 재편하기 위한 정치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새로운 자본주의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자본의 정치였던 오직 신자유주의적 정치가 있었을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 그럴까.
안타깝게도 한국의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비판이란 이름으로 민주화 기획을 비판하는데 머물렀을 뿐 민주화기획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효력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진보진영은 바로 그 민주화 기획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채 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그 결과는 당연히 민주화기획을 이끈 세력과 구분되는 거의 유일한 “정치” 세력이라 할 한나라당이 기사회생하여 마침내 집권을 눈앞에 둘 지경에 이르렀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리고 이변이 없는 한 이들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통해 집권할 것이고 또 이변이 없는 한 한 번의 집권을 끝으로 역사의 지평선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것일까. 걸핏하면 수구보수집단이라고 규탄받던 정치집단이 즉 이미 현실적으로 자신이 대표하여야 할 사회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 자신이 대표할 현실이 없는 데도 그것이 끊임없이 상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왜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으로 남아 현실 속에서 살아있는 죽음이 되어 활보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이해집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즉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은 무(無)를 대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던 사회적 집단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더 이상 역사적 유효성이 없는 집단이다. 그들은 국가의 보호와 후견을 통해 성장하던 재벌이라는 독점자본도 또한 방대한 관료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죽은 집단이었지만 정치적 공간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은 그들이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정치 집단과 구분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 집단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심지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정치세력이지만(그들의 정책과 프로그램은 온갖 것을 뒤섞어놓은 잡탕에 불과하다) 그들이 차지하는 정치적 위치는 매우 뚜렷하고 더불어 위력적인 것이었다. 무를 대표한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부정성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부정성의 공간이란 지금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할 때의 지금 여기, 그것을 가리키는 개념적 용어를 빌자면 실정성(positivity)의 공간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진 사회가 있고 그 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상징적 질서가 있을 때, 우리는 그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지게 된다. 실정성의 공간이란 바로 그런 자명하고 당연시되는 현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부정성의 공간은 바로 “지금 여기가 유일한 것이 아니다”는 믿음 혹은 거리두기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곳이다. 결국 부정성은 사회 혹은 이미 주어진 현실의 바깥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현재의 사회와 무관한 자의적인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낭만적인 유토피아주의일 뿐이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지배적인 표상 즉 사회를 인식하는 방식이 한계에 다다르는 지점, 그것의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지점에서 터져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라당은 바로 그 지점에 서있을 수 있었다.
한나라당은 어쩌면 몰락하고 있는 소상인, 자영업자, 주변화된 노동자계급 등 잡다한 계층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대표하는 사회계층은 현재의 정치적 공간에서 자신을 대변할 어떤 정치적 주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분절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상징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그 자체로 현재의 정치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고발하고 증언한다. 그들은 사회적 삶 내부에 있지만 정치적 삶은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다.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피해자들을 단순히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생명으로 다루지 않고 현재의 사회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투쟁 속에 있는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 주체(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 약자로 다뤄지는 것(이를테면 현재의 “양극화” 담론과 “고용과 함께 하는 성장”이란 담론을 생각해보라)에 머무르는 한 그들은 정치적 주체가 되기는커녕 정치의 장으로부터 영원히 배제된 채 머물러있을 것이다.
이미 누구나 수긍하는 조직된 사회가 있고 그 속에서 각자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의 이해를 대표하고 발언하는 것이라면 그 목소리는 “여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치의 공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그와 다른 목소리이다. 정치적 사건은 이해와 욕구의 실현을 위한 여론을 종합하고 대표하는 것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란 여론조사와 전문가들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사회적 관리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정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 한국 사회에서 이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민생정치”의 현장에서 한나라당이 행하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이 알려주듯 반(反)민생적인 정치세력으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민생정치에 관한 한 아무런 책임 있는 행위를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유일한 짓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정치란 것이라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그들이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으면서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시늉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들이 대표하는 사회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성원들 모두가 망라된 유기적인 전체로서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 속에서 배제된 자들, 즉 그 사회를 형성하고 규정하는 근본적인 결정과 선택의 공간에서 배제된 채 막연히 피해자나 약자로 분류된 채 살아가는 자들이 상상하는 사회이다. 즉 한나라당은 놀랍게도 지금 사회의 “불가능성”, 즉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 결국 없는 것처럼 가정된 자들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의 불가능성을 표시하고,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사회라는 상상을 방해하고 자본주의적 적대의 위치를 가리키는 바로 그러한 이들을 대표한다. 물론 문제는 그들이 한나라당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이는 또한 한나라당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을 지지한 이들은 “열린우리당”이 표상하는 사회, 그것이 만들어내고 당연시하여 온 현 사회, “지금 여기가 유일한 세상이다”는 메시지를 수락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나라당을 찍은 것은 “우리의 이해를 보다 많이 대변하는 정당은 한나라당이다”는 평범한 대표의 메시지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결정의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정치적 주체가 출현할 수 있음을 알리는 징후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참담하게도 그 역할이 한나라당의 손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이 가진 유일한 가치는 “다른 정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대신하는 은유로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적대라고 말할 때 그것은 두 개의 외적인 실재(예컨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라는 두 “주체”) 사이의 갈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경향적인 모순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해야 한다는 운명,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적대가 현실적인 정치투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헤게모니란 통속적인 지식사회학이 제공하는 정의, 즉 물질적 지배에 더한 도덕적, 정신적 지배로서의 헤게모니란 개념이 아니라 라클라우같은 정치학자가 제시했던 헤게모니에 대한 이해에 가깝다. 그는 헤게모니를 은유란 개념과 연결하며, 자본주의의 적대가 현실적인 이해의 대립으로 직접 현실화할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와 “그들”이라는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현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헤게모니란 자본주의적 적대가 초래하는 수많은 사회적 효과(노동자에 대한 착취, 여성의 예속, 생태 파괴, 인종주의 등)를 접합하여 우리와 그들의 관계로 은유한다. 그리고 그 은유의 과정을 우리는 헤게모니적 접합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나라당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 속에 놓여있는 사회집단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접합시키는 헤게모니를 발휘할 수 있을까. 현실의 사회적 조건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다양한 사회 집단을 “인민”으로 혹은 개발독재 시대의 은유를 빌자면 “국민”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현기증나리만치 성공을 거둔 이후에 보여주는 행태는 이를 반증한다. 한나라당이 수구보수세력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현대화하여한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분파가 당 대표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박근혜’라는 정치지도자의 개입과 후원에 따른 결과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그 성공을 가능케 했던 원인 자체를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보수파(?)는 자신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현실적인” 정치세력이 되면 될수록 그것은 열리우리당과 같은 정체성에 도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들을 “탈정치화”시킬 것이다. 물론 음침한 예상이지만 한나라당이 비록 반동적인 방식이겠지만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할 수 있을 수 있다고 예상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런 가능성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초유의 파퓰리즘적인 정권을 얻게 될 것이고 역사는 돌이킬 수 없게 후퇴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도 능력도 한나라당에게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진보진영의 역할이다. 아마 진보진영은 다시 한 번 집권 가능성에 직면할 수도 있다. 현재의 능력과 조건으로 그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되겠지만 물론 그것을 불가능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기회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칠 것인지 전연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상상하고자 하는 것까지 억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점은 현재 진보진영이 자신의 정치에 관한 사고를 전환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

5.31선거의 결과는, 어느 정치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실패를 최종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년간 지속되어왔던 지루한 민주주의의 실험은 끝이 났다. 따라서 끝난 것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끝난 것이란 바로 민주화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정치적 기획이다. 물론 그 정치적 기획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지 세심하게 묻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기획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목적에 이바지하고 위기에 직면한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불과했다고 강변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화 기획이 왜 성공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를 외면하는 소극적 비판에 불과하다. “그들은 빈곤과 실업을 양산했을 뿐이다”, “그들의 민중의 이해에 충실하지 않다”, “그들은 공공성을 거스르고 있다” 등의 비판은 굳이 좌파 정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약간의 감상적 도덕과 약간의 자유주의적 상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비판 안에 적어도 좌파에게 고유한 정치적 사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를 주도하여왔던 민주화 기획이란 것과 그것을 조정한 핵심적인 담론은 이른바 “반공훈육사회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군사독재 비판”에 들어있던 잡다한 정치적 지향들 속에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렇다면 군사독재 비판에서 반공훈육사회비판으로 정치적 기획의 헤게모니가 이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알다시피, 87년 민주항쟁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우리는 거의 마법에 홀린 것과도 같은 순간을 살았다. 이 시기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효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면서 생겨난 공백이었고 새로운 정치가 출현하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때였다. “군사독재 비판”이라는 기획 안에 들어있던 다양한 정치적 계기들이 무엇이었는지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바로 1987년 민주항쟁의 시기 동안 우리는 놀랍게도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과 더불어 정렬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란 “민중”이다. 그리고 이때의 민중이란 나름의 욕구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회집단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구분되는 자율적인 주체, 이를 위해 마련된 유일한 이름인 “정치적 주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는 군사독재 때문에 자신들이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었으며, 학생들은 군사독재 때문에 고문과 검열, 탄압이 횡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교사들은 바로 군사독재 때문에 수많은 학생들이 권위적인 규율과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농민들은, 자영업자들은.... 그리고 그들은 민중이란 이름으로 놀랍게도 응축되었다. 그리고 이 때의 민중을 그것을 구성하는 각 계급이나 집단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둘 사이의 거리를 지울 수 없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중이 앞서 말한 사회적 적대의 은유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주체는 언제나 불안정한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규칙과 제도, 관행으로 현실화되어야 한다. 즉 정치적 주체는 사회적 삶의 행위자들과 대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헤게모니 투쟁이 바로 이런 정치적 주체를 현실 속의 사회적 행위자 그리고 사회적 현실을 규제하는 제도와 전략으로 번역해내는 것이라면 진보진영은 그 헤게모니 투쟁에서 명백히 실패하였다. 승리한 것은 바로 우리가 “민주화 기획”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이다. 물론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개혁의 프로그램으로 그리고 그와 연관된 다양한 사회적 개조의 전략과 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기획”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반공훈육사회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치적 사고를 흡수하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터에서의 “핵심인재”와 “지식노동자”, 학교에서의 “자기주도적 평생학습자”, 일상생활에서의 “자신을 책임지고 돌보는 능동적인 개인”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형태로 다양하게 마주하고 있다. 정치란 정치적 주체성의 형성을 위한 투쟁, 현실의 사회적 행위자와 구분되는 정치의 공간에 속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투쟁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좌파는 군사독재비판에서 출현한 정치적 주체인 “민중”을 평범한 사회적 계층의 집합으로 환원하거나(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주된 경향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본래적 의미에서의 신자유주의, 즉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였다.
후자의 예는 지난 20년간 성행하였던 좌파 담론의 추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반공훈육사회 비판”은 민주주의를 정상화한다며, 실질적 민주화 이전에 확충되어야할 형식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숱한 이론적, 실제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여 왔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 안에는 잡다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신세대 담론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유행까지, 지역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 남성우월주의 나아가 “우리 안의 파시즘” 비판에서부터 다문화주의와 인권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주장들.물론 그것이 1987년 이후 “민주화 기획”이라는 정치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관료성을 비판하고 훈육사회의 잔재를 규탄하는 좌파 지식인들과 이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비판하는 기업가와 경영담론 사이에는 그다지 거리가 없다. 그리고 아직도 내내 불충분하기만 하다고 비판받는 그 자유화의 프로그램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추진하여 왔던 “민주화 기획”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5.31 선거”란 바로 그 위기가 마침내 적나라하게 분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5.31선거에서의 패배는 신자유주의적 한국 자본주의의 개조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었던 “민주화 기획”의 실패를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서 출현하는 고통과 곤란의 효과는 아니었다.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5.31 선거”를 마주하기 이전에 거리에서의 투쟁과 마주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투쟁(노동해방)과 현실 속에서 투쟁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인간행방)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발리바르라는 정치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이 없는 것이다. 평등은 경제에 속하는 것이고, 자유는 정치에 속하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은 거부되어야 한다.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주체인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시민 혹은 인민으로서의 노동자가 되는 것과 동일한 문제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이는 굳이 좌파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문제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 노동자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뼈저리게 깨달아 왔던가. 그러나 “민주화 기획”의 정치를 비판할 때 자유 없는 평등(경제주의적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평등 없는 자유(반공훈육사회 비판) 사이에서 동요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요점은 간단하다.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의 정치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사회적 현실과 그 현실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해와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와 그것과는 구분되는 정치, 즉 사회적 현실에 사로잡혀있는 주체를 그것을 변화의 대상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정치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물론 다른 것일 수도 없고 또한 달리 취급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민주화 기획”의 주역이었던 현재의 지배 세력과 다른 점이 오직 “보다 좋은, 보다 많은 민생정치”를 외쳤다는 것이라면, 이는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제시하면 할수록 그리고 보다 많은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내놓으려 애쓸수록 정반대로 진보진영이 비현실적인 세력으로 비쳐지기만 하는 악순환으로부터 영원히 헤어날 수 없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대안은 모두 훌륭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패배적인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른바 “현실 정치” 혹은 “민생 정치”의 덫에 걸리는 한 진보진영은 다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결정의 행위에 영원히 이를 수 없다. 그 결정의 행위는 가능한 것을 벗어나 즉 현재의 상태, 주어진 사회로부터 불가피하게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민생정치 안에 그런 선택의 공간은 없다.
가난한 자들이 노동자계급이 될 때,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행위를 통하여 변화시킬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때 그들은 특수한 이해의 담지자에서 보편적인 주체가 된다. 노동자의 해방이 없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그들이 선언할 때, 그리고 그들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책임을 지닌 주체로 자신을 자각할 때 자본주의사회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사회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회적 생명”(민생정치가 말하는 그 민생)을 다시 정치적 주체인 “인민”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진보진영에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런 인민을 만들어내는 일, 정치적 주체화의 투쟁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모든 사회적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라면 진보진영에게 정치란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다. 진보진영의 고역스러운 투쟁은 정치적 주체가 없는 투쟁,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으로서의 정치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굳이 진보진영의 정치라 불릴 이유가 없다. 투기자본가들과 초국적자본의 기업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인 운명인양 떠들어대며 그것의 측은한 피해자들을 향하여 선의 가득 한 기부와 자선을 퍼붓고 있다. 나눔과 보살핌, 배려와 존중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호소하는 대기업들의 광고를 우리는 하루 종일 티비에서 마주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정치적 주체를 빚어내는 일이 바로 지금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물론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을 회피하는 한 우리는 진보진영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실에서 벗어날 어떤 출구도 없다는 점 역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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