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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읽기 Ⅲ : 맑스의 작품들


 

  칼 맑스(Karl Marx)는 1818년에 독일 남부 트리어에서 태어나 1883년 영국 런던에서 죽었다. 그와 평생의 동무 엥겔스는 책을 쓰고 급진적인 신문과 잡지를 만들었으며 쉴 새 없이 기고했다. 맑스의 주장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것이든 노트로 남아 있다가 훗날 세상에 공개된 것이든 20세기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맑스·엥겔스 저작들의 출판 상황


  20세기에 흔히 MEW로 지칭되는 『맑스·엥겔스 저작집』(Marx/Engels. Werke)이 출판됐는데 총 39책 41권과 2권의 보충판으로 구성됐다. 이 저작집에는 1835년부터 1895년 사이에 작성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글, 노트와 편지들이 실려 있다. 또한 MEGA로 불리는 『맑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의 출간이 진행 중인데 편집위는 그 완간 시기를 대략 2030년으로 잡고 있다. 전체가 몇 백 권이 될 지 확실치 않으며 재정상의 문제로 발간이 지속될 것인지도 의문이다. MEW를 전집, MAGA를 총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수많은 출판사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번역하여 펴냈다. 어떤 저작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를 정리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체계가 없고 중복되고 난잡한 실정이다. MEW 가운데 『자본』이 이론과실천에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 백의에서 나왔고 박종철출판사에서 6권의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을 냈다. MEW나 MAGA의 한국어판 번역이 기획, 실행되지 않는 한 번역의 일관성도 주요 저작의 빠짐없는 출간도 희망하기 어렵다. <공산당 선언> 등의 인기 있는 상품만 계속 나오고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훌륭한 작품의 완역본은 출간 된 적이 없다.


  맑스의 주요 작품들


  1835년 17세의 맑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이란 글에서 “우리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지위를 마음먹은 대로 차지 할 수 없다. 우리가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고 나중에 철학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결국 급진적인 저널리스트로 일하게 됐다. 곳곳에서 추방당했고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런 가운데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 이론가, 지도자가 되었다.


  맑스의 대표작은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이고 가장 널리 읽힌 글은 <공산주의 선언>이다. 이 글에서는 맑스의 글, 노트, 책 가운데 17개의 주요 작품들을 선정하여 집필 시기 순으로 소개하고 그 내용 일부를 음미할 것이다. 각 인용 문장은 참고한 책의 번역문을 그대로 가져왔다. 몇 개의 이름과 지명 등은 통일시켰다. 그 인용문들이 맑스 저작을 즐겨 읽어온 사람들에겐 익숙한 문구들이겠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맑스의 작품은 이러이러한 게 있고 각 작품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고 안내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맑스의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Über die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1841)

: 1841년 맑스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철학논문을 제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그 동안 서양철학사에서 철저히 이단시 되고 온갖 비난을 받아오던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한다. ‘원자와 천체’를 아우르며 원자에 대한 세부적 차이가 천체라는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을 논증하는데 그의 이러한 통찰은 훗날 ‘상품과 자본주의’를 다루는 『자본』의 분석방법에서도 재현된다.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학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 가장 미세한 곳까지 관통하는 그 차이가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작은 것 안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더 큰 차원의 관계들이 포착되는 곳에서는 더욱 쉽게 보여질 수 있지만, 반대로 아주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할 때는] 그 결과를 개개의 것들에서 확증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2. ‘헤겔 법철학’ 비판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 이 글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의미와 혁명적 역할을 처음으로 논한다. 독일의 상황을 독일 특유의 사변적 화법으로 비판한 셈이다.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상가였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그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모든 내적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 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이 글의 비판 대상인 헤겔은 1820년에 출간한 『법철학』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수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맑스가 이 <서설> 마지막 문장에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갈리아의 수탉’으로 비유한 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올빼미의 ‘황혼’과 달리 수탉은 ‘새벽’에 운다.


3.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수고)>/<파리 수고>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노트들은 파리에서 작성되었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린다. 이 노트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정치경제학 범주들을 연구하며 ‘소외된 노동’이라는 주제를 논했다. 맑스의 머리와 손을 통해 ‘고전 경제학’과 ‘헤겔 철학’이 동시에 비판된다. 이때의 문제의식들은 평생에 걸쳐 다듬어진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 정신이다. …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 … 화폐는 인류의 외화된 능력이다.


4. 『신성 가족』/『신성 가족, 혹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

『Die heilige Familie』(1845)

: 엥겔스와의 최초의 공동 저작인데 당시 더 유명했던 엥겔스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 엘리트들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창조자라는 것을 주장했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를 표명했다.


  국민 경제학의 모든 설명 전개는 사적 소유를 전제로 삼고 있다.

  이념은 결코 낡은 세계 상태를 넘어설 수 없으며, 항상 단지 그 낡은 세계 상태의 이념들을 넘어설 수 있을 뿐이다. 이념들은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실천적인 힘을 모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845)

: 맑스가 기록한 11개의 테제들로 엥겔스가 발견해 1888년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엥겔스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6. 『독일 이데올로기』/『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최근의 독일 철학과 그 다양한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Die deutsche Ideoloie』(1846)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걸작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로 유명하고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이때 이데올로기의 뜻은 허위의식이다. 독일에서 헛소리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7. 『철학의 빈곤』/『철학의 빈곤. 프루동 씨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

『Das Elend der Philosophie』(1847)

: 프랑스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자 Proudhon이 1846년에 출판한 『빈곤의 철학』을 공격하기 위해 작성했다. 맑스는 이 책의 내용으로 독일노동자협회에서 강연했다.


  영국인이 인간들을 모자들로 바꾸어 놓는다면, 독일인은 그 모자들을 이념들로 바꾸어 놓는다. 그 영국인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탁월한 경제학자인 리카도이며, 그 독일인은 베를린 대학의 단순한 철학 교수인 헤겔이다.

 

8. <공산주의당 선언>/<공산당 선언/공산주의 선언>

(1848)

: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작성한 선언문으로 당시에는 작성자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마지막에 쓰인 구호는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는 모든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변함없는 슬로건으로 사용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 부르주아의 결혼이 사실상 아내 공유제이다. /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 한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항상 지배 계급의 이념이었을 뿐이다. /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9. <임금노동과 자본>

(1849 → 1891년 엥겔스가 수정)

: 1947년 브뤼셀에서 강연 했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엥겔스가 훗날 맑스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일부 표현을 수정했다. 가령 ‘노동’을 ‘노동력’으로 고쳤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10.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 파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이 선포됐다. 맑스는 <신라인신문 정치경제 평론>에 이 혁명의 의미와 사태의 진전에 대해 연재했다. 원래 1849년까지만 다루었는데 1850년 ‘보통선거권 폐지’ 후에 비판한 글까지 하나로 묶었다. 국가, 혁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화려한 문필력과 박학다식함으로 반동들을 규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주 조금 개선하는 것조차 부르주아 공화국 내부에서는 하나의 공상이며, 이 공상은 자신을 실현하려 하자마자 범죄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착취자는 동일하다 : 자본. 개별 자본가들은 저당권과 고리 대금업을 통해 개별 농민들을 착취하고, 자본가 계급은 국가 조세를 통해 농민 계급을 착취한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헌법은 포위한 자들을 보호할 뿐 포위된 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요새이다!


11.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1852)

: 대통령이던 루이 보나빠르뜨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맑스는 즉시 분석에 들어갔다. 동시대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이 그런 정세와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비용으로 살아갔던 반면, 현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용으로 살아간다.(1869년 제2판 서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12.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7~8)

: 맑스는 이 수고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메모했는데 그 시절에 쓰던 모든 글은 다 그 주제로 분류된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노아의 방주 이전에 적어도 개요나마 명확히 하기 위해서 나의 경제학 연구를 요약하는 데 밤새 작업하고 있네”라고 했다. 여기에서 이 노트의 전체 제목을 따왔다. 이 노트들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잉여 가치’, ‘잉여 노동’, ‘불변/가변 자본’ 등의 범주를 사용했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에 반해 하급 동물류에서 보이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들에 대한 암시는 고차원적인 것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경제는 고대 경제 등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서설)

  자본은 필연적으로 자본가이다. 그리고 자본은 필요하지만 자본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오류이다.

  프루동은 가치 법칙에 따라 가치가 노동과 교환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점, 즉 이자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를, 교환 가치에 기초한 생산 양식을, 그러므로 임노동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13.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9)

: ‘요강’을 작성하고 『자본』을 출판하기 전에 맑스는 이 글을 통해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제들과 자신의 연구 경로 등을 밝힌다. <서문>에서 ‘상부구조와 토대’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유물론적 역사 파악의 핵심을 간결하고 힘차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처음으로 화폐 학설을 포함해 가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생산 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14. 『임금, 가격, 이윤』

『Wages, Price and Profit』(1865 → 1898)

: 1865년에 맑스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영어로 강연할 때의 원고다. 1898년에 그의 막내딸 엘레노어가 서문을 달아 출판했다. 이 짧은 원고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2년 후에 출판될 『자본』의 연구성과와 결론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쉽다.


  …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이나, 물이 극히 연소되기 쉬운 두 가지의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역설이다. 우리를 현혹시키기 쉬운 사물의 외양만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할 경우,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역설이다.

  “공정한 노동에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에 그들(노동자들)은 “임금제도 철폐!”라는 혁명적 구호를 자신들의 기치에 써넣어야 한다.


15. 『자본』/『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1867)

: 맑스는 20여 년 동안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1,500여권의 책과 자료를 읽었고 노트로 옮겼으며 그 가운데 800여 권을 이 저작에 인용, 언급했다. 맑스는 『자본』을 가리켜 “부르주아지(지주를 포함하여)의 머리로 날아갈 가장 효과적인 미사일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고전 정치경제학을 지적으로 파괴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맑스는 이 책이 “예술적 총체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했다. 맑스는 1권만 출판했고 2권(1885년), 3권(1894년)은 엥겔스가 출판했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

  자본가는 오직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노동시간의 인격화에 불과하다.

 

16. <프랑스에서의 내전>/<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871)

: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요청에 따라 맑스가 작성한 글로서 협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담화문(격문) 형태로 발표되었다. 처음에 영어로 작성됐고 1871년 5월 30일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13일 출간됐다. 


  꼬뮌에게 내려진 해석의 다양함과 꼬뮌에 표현된 이해관계의 다양함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분명하게 억압적이었음에 반해 꼬뮌은 철저하게 확장적인(expansive) 정치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꼬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17. <독일 노동자 정당 강령에 대한 평주>/<고타 강령 비판>

(1875 → 1891년 발표)

: 1875년 5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과 전독일 노동자 협회가 고타에서 통합 당대회를 가졌다. 그때 준비된 강령의 퇴보에 대해 맑스가 매우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다. 맑스는 주요 지도부에게 회람 후 돌려달라고 했다. 1891년 <신시대>를 통해 출판됐는데 엥겔스가 당시는 필요했지만 훗날에는 불필요한 표현들을 생략했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 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맑스 읽기’를 마치며 : 비판과 실천


  지금까지 세 개의 글을 통해 ‘맑스 읽기’에 대해 논했다. 첫 글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에서 오늘날 맑스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20세기에 그들- 맑스주의자, 맑스의 후예 혹은 문예비평가 -이 맑스로부터 어떤 영감과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두 번째 글 <맑스로 가는 길>에서는 맑스(주의)를 탐구하는 세 가지 길을 논했다. 철학사를 통해 내려오거나, 동시대의 유행 사상을 살피거나, 전기와 작품을 통해 이해하기 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에서 맑스의 주요 작품 17개를 선별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맑스가 썼던 글에서 인용하여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맑스학Marxology을 수행하는 맑스 전문가, 맑스주의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그의 전 저작을 집필 순서대로 통독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 맑스뿐만 아니라 엥겔스, 레닌 등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들을 두루 찾아 읽긴 하지만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이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들이 현실 운동에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학, 정치, 사회학 등의 분야의 맑스주의 학자들도 맑스의 전 저작을 고루 섭렵하진 않는다. 학자의 양심이나 성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늘날 전 세계의 학문적 풍토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적인 탐구나 전문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게 아니라 교양 차원에서 맑스와 친해지고자 한다면 이 연재에서 추천했던 전기들과 함께 <공산주의 선언>,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금, 가격, 이윤> 정도 읽으면 될 것이다.


  결론이 나진 않은 주제


  ‘정치경제학 비판’과 관련한 책과 노트들은 분량이 방대해서 쉽게 권하기 어렵다. 또한 이름 높은 당대 최고라는 맑스주의 전문가들 수천 명이 달려들어 지난 세기를 다 소진하며 논쟁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문가들도 포기하거나 더 연구해야겠다며 물러서는 난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종종 ‘쉬운, 얇은, 일목요연한, 단순명료한’ 입문서/해설서를 찾곤 한다. 분량이 많든 적든 내용이 현학적이든 세속적이든 저자가 그 주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기 이해를 거쳐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에 내보내는 그런 결과물들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스피노자로부터 맑스가 가져왔던 것처럼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통해 지혜를 익힌, 철학과 역사를 통해 이치를 깨달은, 문학예술을 통해 글을 볼 줄 아는, 비록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지만 대안의 공동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삶의 자세와 여정 속에서 만난 맑스라면 그의 대표작 『자본』에 그 모든 인류의 지혜가 ‘노아의 방주’처럼 집결되고 농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예술적 총체’는 맑스와 그 가족들이 부르주아적 출세와 풍요 그리고 건강을 포기한 채 만들어낸 피눈물의 결실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맑스는 대학을 떠나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와 엥겔스는 평생 경제학자들과 사상가들,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신들에 대해서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그’라고 표현한 적 없고 자신들의 사상이 위대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초한 것이라고 회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표현과 뜻이 맑스의 적대자들과 계승자들 모두가 이해하는 공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식의 발상과 어의語義변화와 전도顚倒는 20세기의 서글픈 현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죽은 맑스,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즉 이데올로그로 세계 곳곳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되었다. 공동묘지에 묻힌 맑스, 바다에 뿌려진 엥겔스의 죽음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그들의 동상을 세웠다가 무너뜨렸다.

  그들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물신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폐해들을 돌아보라. 이데올로기를 지양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허위의식들의 바벨탑을 건설했던 게 아니겠는가. 맑스를 읽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의문이지만, 그 역시 지배 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군림하고 억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맑스를 읽는 까닭은 당대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아첨하는 이데올로그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된 채 길을 잃지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의 비판(Kritik)과 실천(Praxis)만큼 감동적이고 유익한 나침반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오창엽 : 69년생. 청년진보당, 사회당에서 활동했고 진보매체 기자로 일했다. lastmar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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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문화(komun.net) 9, 10, 12월호 학술연재의 마지막 글로 최종 작성일은 2006년 11월 24일이다.

맑스 읽기Ⅰ :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

☞ 맑스 읽기Ⅱ : 맑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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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씨가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것

     
영화 <친절한 금자씨>

김윤은미 기자
2005-08-01 21:03:50


<기사를 보고 영화를 보면 재미가 덜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호기심을 사로잡더니, 개봉 후에도 수많은 평들이 쏟아지고 있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이 영화는 대작에 기대하기 쉬운 기승전결로 꽉 짜인 플롯을 피하고 인물들의 소개장면과 에피소드 나열로 사건을 이어나간다. 블랙코미디적인 유머와 정확한 비유를 사용해 만든 장면과 에피소드가 이 영화가 갖춘 미덕인 듯싶다. 영화는 복수를 하는 금자씨와 그녀 주위인물들의 면면을 다면체처럼 잘게 부수어서 조합함으로써 상당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의 몰입 방해하며 복수 정당화

<친절한 금자씨>의 전반부는 가볍고 경쾌하다. 어린이 유괴 및 살인사건으로 감옥에서 13년을 살아온 금자씨는 출옥 후 백선생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감옥에서 알게 된 여자동료들을 찾아간다. 방북으로 유명한 임수경씨의 조언을 얻었다고도 하는데, 감옥의 여성 인물들은 상당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남편과 동반으로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감옥에 들어온 여자,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상대 여자를 죽여서 고기를 먹어버렸다는 여자, 출옥 후 감옥에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 남자의 목을 들고 있는 여자 조각을 주문 제작하는 여자도 있다.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여자 손님들이 좋아해”라고 말한다.

<올드보이>에 비해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관객에게 어필하는 면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여성들이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합심해서 금자씨의 복수를 돕는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자칫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면면들임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진지한 나레이션과 빠른 전개, 코믹한 설정들이 영화에 깊이 몰입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특히 금자 역을 맡은 이영애의 하얗고 맑은 얼굴과 천사 같은 미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각한 장면에서 느닷없이 등장해 상당히 큰 효과를 발휘한다. 금자씨의 얼굴에서 빛이 나오도록 하는 화면 처리나, 신장을 기증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들은 대로 웃으면서 욕을 지껄이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감옥에서 동료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마녀’라 불리는 여자에게 착한 얼굴로 밥을 먹이면서 락스를 뿌려대는 장면은 압권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만, 웃음의 말미에 씁쓸함을 집어넣는 블랙코미디를 운용하는 캐릭터. 금자씨의 캐릭터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원한 관객이라면 환영할 만한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출옥 후 착하게 살라고 말하는 목사가 내미는 두부를 “너나 잘하세요”하며 무표정하게 엎어버리는 장면이나, 연하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후 담배를 피우는 장면 등은 관습적인 이미지들을 패러디 해 웃음을 전달하면서도 그 자체로 멋지다.

영화에서 복수가 진행되는 후반부는 전반부의 경쾌함에서 돌변해 심각하게 진행된다. ‘여성’과 ‘복수극’의 조합에서 특별한 화학작용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만족할 듯싶다. 여성복수극은 자칫 여성이 복수 임무를 대행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 있는데 <친절한 금자씨>는 그렇지 않다.

복수의 대상 백선생의 캐릭터는 일반적인 ‘마초 아저씨’다. 어렵게 자신을 찾아온 금자씨에게 백선생은 목욕한 후 가슴 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문을 열어준다. 그는 밥을 먹다가 식탁에 부인을 눕히고 섹스를 한 후 다시 밥을 먹는 동물적인 인간이자,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하고 서슴없이 변명할 줄 아는 인간이다. 위악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명한 백선생의 면모는, 여성의 경험에서 종합되는 남성의 불쾌한 면모들이 조합된 듯하다.

복수의 윤리보단 현실의 부조리 드러내

‘복수 3부작’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표명, 영화 곳곳에서 ‘속죄’를 외치는 이영애의 대사 등으로 인해 복수의 윤리학 등 철학적인 수준에서 영화를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많다. 하지만 이 영화가 플롯 상에서 던지는 속죄에 대한 고민은 그다지 깊지 않다. 우선 금자씨는 매우 손쉽게 자신의 복수를 달성한다. ‘악인’ 백선생은 관객들에게 윤리적 고민을 던져주기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하다. 금자씨의 정의감이나 백선생의 악함은 관객에게 고뇌를 던져주기보다는 순간적인 충격을 전달하는 장치에 가깝다.

백선생을 처벌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어린애를 유괴해서 돈을 뜯고 다녔던 악인 카세티를, 피해자의 부모와 친지들이 공동으로 살해한다. 카세티는 악인인 데다가 경찰에 넘겨도 처벌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카세티에게 복수한 이들은 교양 있고 선량한 시민들이자 버젓하게 사회적 위치를 갖춘 인물들이다. 이들의 복수는 소설 속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복수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수위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백선생을 경찰에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법에 대한 환멸과 증오심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처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들의 복수는 정의감보다는 삶의 부조리함이 느껴지는 페이소스를 풍긴다. 억지로 돈을 벌어서 자식을 백선생의 영어학원에 보냈다며 한 여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또 다른 여자가 조용하게 “그런 사연 없는 부모가 어디 있나”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그 예다.

감옥 속 여성 캐릭터들처럼, 사람들의 삶에서 관찰되는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들이 이 복수의 면면에도 붙어있다. 그래서 복수가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후련하지 않다. 이들이 생각해 낸 것은 백선생의 돈을 빨리 나누어달라고 계좌를 적어주는 것인데, 그 순간 천사가 지나가는 듯 엄숙한 침묵이 흐른다. 마치 악에 대한 복수, 자식에 대한 사랑 같은 숭고함과, 복수에 대한 책임 회피 같은 비루함이 삶 속에 공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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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6-12-26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사람이 너무 장난기를 주체 못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친절한 금자씨가 그랬는데...
 
 전출처 : waits > [레디앙]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공산당도 외면한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

 

공산당도 외면한 낭만적 마르크스주의자
[세계의 사회주의자-23]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88년 제6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영화 <마지막 황제>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황제>는 이탈리아인인 그가 활동무대를 할리우드로 옮기고 영어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였다. 그리고 그는 엘리아 카잔 이후 30여년 만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마르크스주의자 영화감독이었다.

1941년에 태어난 베르톨루치는 유명한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5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대를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작가로 이름을 알려졌다. 또한 아버지를 통해 파올로 파졸리니를 알게 됐고 1961년에는 파졸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에는 자신이 감독한 첫 작품 <냉혹한 사신>을 발표하면서 영화작가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 시킨 작품은 두 번째로 제작한 <혁명전야>였다. 1964년에 공개된 이 작품을 통해 베르톨루치는 자신이 낭만적인 마르크스주의자임을 공표했다.

동시에 소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라는 신분과 사상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감을 노출했다. 이는 이후 오랫동안 그의 영화에서 반복된 주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영화작가의 계보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혁명의 열정으로 충만했던 1968년에 이탈리아공산당PCI에 입당했다. 앞서 이야기한 파졸리니 뿐만 아니라 루키오 비스콘티처럼 ‘네오리알리스모’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영화계는 좌익의 영향이 강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의 선배들만큼이나 이웃 프랑스의 좌익 영화작가 장 뤽 고다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다르처럼 당시 급진적인 청년들을 사로잡던 마오주의를 수용했다.

공산당에 입당한 베르톨루치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와 정치를 직접 결합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1971년 베르톨루치는 공산당계 노총인 이탈리아노동자총연합CGIL에 소속된 보건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16밀리 흑백 카메라를 숨긴 채 로마의 공공병원에 잠입했다.

기독교민주당 시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의료시설의 열악한 환경과 의료실태를 몰래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30분 만에 들통이나 병원에서 쫓겨났지만 이 30분짜리 필름으로 베르톨루치는 <가난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는 미니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그해 로마 시의회 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선거운동 중 공산당원들은 거리에서 즉석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는 그의 공식 작품목록에 기재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제작된 두 편의 영화 <거미의 전략>과 <순응주의자>는 파시즘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각각 1970년과 1971년에 제작된 이 두 영화는 편집을 비롯해 영화 전반에 걸쳐 68년 혁명의 들뜬 분위기가 물씬 배어있는 작품이다.

   
  ▲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포스터
 

이어서 공개된 영화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면서 동시에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말론 브란도라는 대배우의 출연과 함께 적나라한 성적묘사는 이탈리아 국내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상영허가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크린에 걸린 나라들에서도 대부분 검열당국의 가위질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본국인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은 고사하고 검열당국이 존재하는 모든 필름사본을 폐기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법원은 베르톨루치의 공민권을 5년간 정지시키고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상영금지조치는 1986년까지 지속됐다. 이탈리아는 1970년에 이르러서야 이혼이 합법화될 만큼 가톨릭의 사회적 영향이 강한 나라다.

이때의 경험을 놓고 베르톨루치는 “나는 어떠한 형태의 검열에도 반대한다. 이는 내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할리우드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출과 작품을 지지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이름의 검열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번에는 자본과 정치라는 다른 이름의 검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열에 맞선 오래된 투쟁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어 1976년 공개된 <1900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작이었다. 일단 영화의 시공간은 1900년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북부가 파시스트들에게서 해방되는 1945년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를 생략한 채 영화의 두 주인공이 노인이 되어 죽는 현재(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다.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하드라마인 만큼 등장인물의 수도 엄청났다. 배역도 로버트 드니로, 제라르 드빠르디유, 버트 랭카스터, 도널드 서덜랜드 등 미국과 유럽의 쟁쟁한 스타들로 채워졌다.

이 장대한 이야기의 촬영을 마치고 베르톨루치가 편집한 필름은 상영시간이 5시간 18분이었다. 도저히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작자는 임의로 3시간짜리 편집본을 제작했다. 제작자에 의해 영화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르톨루치는 4시간 50분짜리 편집본을 만들어 대항했다.

결국 법원의 중재로 4시간 15분짜리 편집본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배급을 맡은 파라마운트가 4시간 15분도 너무 길다며 배급포기를 선언했다.

   
 ▲ 영화 <1900년> 포스터
 

영화가 깐느에서 공개되고 호평을 받자 미국 내에서도 개봉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우여곡절 끝에 파라마운트는 영화를 배급했지만 홍보를 거의 하지 않는 등 의도적으로 흥행실패를 유도했다. 평론가들은 “파라마운트가 <1900년>의 미국 개봉을 막기 위해 개봉했다”고 분석했다. 베르톨루치는 90년대 들어 5시간짜리 감독 편집판을 복원했다.

<1900년>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같은 날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알프레도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올모, 두 친구를 통해 이탈리아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시도였다.

올모는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스트 빨치산이 되고, 알프레도는 신분과 상황에 밀려 파시즘을 돕게 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농장 관리인 출신이며 자발적인 파시스트인 아틸라가 있다. 마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연상시키는 이야기 구조다.

베르톨루치는 이 영화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바쳤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1945년까지 파시스트에 의해 점령돼 있던 이탈리아 북부가 해방되던 날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파시스트의 앞잡이들을 체포해 인민재판을 여는 장면이 문제가 됐다. 그것도 다름 아닌 공산당에 의해서 말이다.

공산당은 1945년 당시 당은 인민재판을 지시한 적이 없으며 또한 실제로 재판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당은 반파시즘 투쟁을 통해 지배계급을 전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며 영화를 부정했다. 공산당 계열의 출판물들은 무시에 가까울 정도로 영화에 대해 침묵했다.

70년대 후반 이탈리아공산당은 독자적인 집권노력을 포기하고 기민당과의 대연정을 성사시킨다는 이른바 ‘역사적 타협’을 추진하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선거에서 공산당이 다수파가 되지 못하는 현실과 설사 성공한다하더라도 칠레처럼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에서 나온 노선전환이었다. 그런 사정 속에서 부르주아의 심기를 건드리는 영화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공산당 우파의 지도자였던 조르지오 아멘돌라는 공개적으로 <1900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베르톨루치는 “당신들은 1945년에 지배계급을 심판할 힘도 없었고,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영화 속에서 처단 장면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됐는지 그는 1978년 무렵 탈당했다. 베르톨루치는 후에 공산당뿐만 아니라 부패와 냉소주의가 만연한 이탈리아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과거를 부정하는 공산당에 실망

<1900년>으로부터 10년 뒤 베르톨루치는 중국으로 날아갔다. 중국 당국이 할리우드 자본에 자금성 촬영을 허용한 것은 그의 마오주의 배경과 인맥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나도는 가운데 <마지막 황제>는 <1900년>보다 더 큰 규모로 제작됐다. 당시에는 영화 속에서 묘사된 중국혁명, 문화혁명 등을 통해 여전히 베르톨루치가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분석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시선은 동양적 신비주의에 경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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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이후 그의 영화 경력은 종종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티벳불교를 다룬 <리틀 부다>에 이르러서는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확실히 그의 시선이 60~70년대의 영화들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영화 외의 부분에서도 드러났다. 지난 2004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영화에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지 않는다. 그건 우체국의 역할이다”고 밝혔다.

90년대 후반,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베르톨루치는 두가지 계획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1945년으로 이야기가 끝난 <1900년>의 후속편을 찍고 싶다는 것과 그에 앞서 68년을 다룬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68년의 아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부모 세대임에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우리가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너무 모른다. 요즘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통해 이상과 반항의 68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자주 내비쳤다.

아마도 지난 2003년 개봉한 <몽상가들>이 바로 ‘68년으로 돌아가기’에 해당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몽상가들>을 완성하고 나서 그는 60년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젊은 우리들은 그 시절 미래에 대해 확신했고 희망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세상을 꿈꾸고 또 바꿀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빠진 것이 이런 상상력이다.”

이 영화를 통해 베르톨루치는 오랜 우회 끝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다룬 주제와 장소(파리)로 돌아왔다. 이제 그에게 남은 다른 반쪽의 계획은 1945년 이후 이탈리아의 현대사, 특히 60년대 격동하는 이탈리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영화는 무엇보다도,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2006년 12월 11일 (월) 13:27:08

장석원 객원기자 badiera@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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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벼리] 2006년 한국사회 인권 현실을 돌아보며
강성준 
2006년이 저물고 있다. 출범 이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을 지속한 노무현 정부는 올해 벽두부터 한미동맹 강화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평택전쟁기지 확대를 카드로 꺼냈고 1년 내내 밀어붙였다. 돌아보면, 올해 한국사회 인권의 현주소는 그 어느 해보다 강화된 미국의 규정력을 제쳐두고 이야기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한미동맹에 짓밟힌 인권

1월 19일 한미정부는 워싱턴에서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주한미군의 활동범위와 역할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붙박이군’에서 동북아, 서남아시아까지 선제공격할 수 있는 신속기동군으로 확대됐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는 평택미군기지의 확장을 목표로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아내기 시작했다. 국방부는 3월 6일과 15일, 4월 7일에 걸쳐 대추분교 인도와 농수로 차단을 명목으로 경찰을 앞세운 행정대집행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의도적으로 주민들이 아닌 사회단체 회원들만 골라 연행하면서 ‘외부 불순세력 개입론’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다. 이어 5월 4일에는 대추분교에 대해 행정대집행을 실시했다. 곧바로 국방부는 미군기지 이전예정지 285만평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철조망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농사를 지어오던 주민들은 자신의 농지에 출입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마을 진입로에 검문소를 설치해 이른바 ‘외부인’의 출입을 가로막았다. 정부는 협상은커녕 주민들에 대한 고사작전을 지속하고 있고, 김지태 대추리 이장은 실형 2년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방 안에 있다.

사진설명지난 5월 5일 평택에 투입된 군병력<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평택전쟁기지 확장이 한미군사동맹의 강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은 한미경제동맹의 강화를 뜻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1월 19일 신년연설을 통해 뜬금없이 한미 FTA 체결 필요성을 언급했고 2월 3일 한미 양국은 협상 개시를 전격 선언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협상 과정을 볼 때 한미 FTA는 미국이 지금까지 맺은 FTA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체결될 가능성이 높다. 농업의 파괴, 교육·의료 등 공공서비스 개방을 통한 시장화 등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도 제외되지 않는’ 것이다. 한미 FTA는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경제자유구역, 기업도시, 제주특별자치도 등의 연장선 상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완성을 향해 치닫고 있다.

비정규직 확산, 노동조합 무력화의 제도화

비정규직은 정권 출범 초기인 2003년 784만 명에서 올해 845만 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고 전체 임금노동자의 55퍼센트에 달하고 있다. 2004년 정부가 비정규직이 받는 차별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내놓은 기간제법 제정안, 파견법 개정안 등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안이 2년여만인 11월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통과된 법안은 기간제 사용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기간제 사용을 일반화해 상시고용을 원칙으로 하는 노동법의 기본정신을 훼손했다. 또 법안은 2년을 초과하는 기간제 사용을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으로 간주하지만 역으로 이는 2년 주기의 대량해고 사태를 만들 것이다. 중간착취를 합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현행 파견법은 폐지되기는커녕 파견대상 업무에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하여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가 추가되어 노동부가 자의적으로 파견대상업무를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파견노동 2년 초과 시 ‘고용의제’하는 현행법이 위반 시 과태료 부담만 주는 ‘고용의무’로 개악되었다.

비정규직 노동법이 비정규직 확산을 통해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 ‘노사관계로드맵’이다. 출범초기 ‘노사관계제도선진화연구위원회’에서 이른바 ‘노사관계로드맵’을 구상한 정부는 올해 9월 민주노총은 배제한 채 한국노총·경총과의 ‘합의’를 통해 전격적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 8일 국회 환경노동위 문턱을 넘어 본회의 통과가 임박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 3개 법안은 △부당해고 시 사용자 형사처벌 조항을 삭제해 사용자의 ‘해고의 자유’가 대폭 확장됐고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는 폐지되지만 파업 시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어 파업권의 무력화는 여전하며 △복수노조 허용 문제는 또다시 3년 유예됐다.

노무현과 민중 사이에는 경찰만 있다

정권이 명운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와 평택전쟁기지 확대는 필연적으로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대화와 타협’,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입버릇처럼 되뇌었지만 올해는 대화도 타협도 상식도 없었다. 오직 경찰의 물리력으로 민중들의 저항을 봉쇄하는 것만이 정부의 유일한 대응이었다.

사진설명하중근 씨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지난해 11월 여의도 농민대회에서 전용철·홍덕표 농민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하고 경찰청장이 물러났지만 올해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경찰폭력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7월 13일 포항건설노조가 불법대체인력 투입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시작하자 경찰은 2만5천명의 병력을 투입해 음식물 반입을 통제하고 단전·단수조치를 취한 데 이어 16일 열린 평화집회를 사전 경고 없이 침탈해 하중근 조합원을 사망하게 했다. 또 경찰은 2003년 개악된 집시법을 활용하여 집회신고를 자의적으로 금지했으며 8월 16일에는 서울에서 평화적으로 행진하던 상경투쟁단 1천여 명을 전원연행했다. 9월 22일 한미 FTA 4차협상이 제주도에서 시작되자 경찰은 현지 반FTA 집회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통고를 단행했다.

이처럼 한미 FTA, 평택전쟁기지건설,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 등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이 경찰을 앞세운 정권의 탄압에 의해 각개격파될 위기에 처하자 운동진영은 11월 22일과 29일, 12월 6일 민중총궐기 집회를 공동으로 열어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진행했다. 이어 몇몇 지역의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같은 달 24일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담은 담화를 발표했고 경찰은 같은 날 9개 사회단체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하면서 170여 명을 소환했다. 이어 경찰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예정된 2차 집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경찰차벽으로 광장을 에워싸고 전국 1252곳에 경찰 1만3555명을 배치해 상경차량을 차단해 원천봉쇄했다. 또 농민회 간부들을 경찰버스나 농민회 사무실에 감금해 집회 참여를 막기도 했다.

한편으로 정부는 올해 1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평화적 집회시위문화정착을 위한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평화시위 정착 캠페인 △평화시위를 위한 사회적 협약체결 △시위주동자 형벌 상향조정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민사상 배상청구 실시 등 회유와 협박을 통해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책을 쏟아냈다. 이 위원회는 사회적 합의기구의 외양을 띠었지만 그 운영은 경찰청이 주도했으며 발표 내용 또한 경찰의 오랜 숙원사업을 성취해 주는 것이었다. 경찰은 1차 민중총궐기 집회를 앞둔 11월 7일 ‘도심집회금지’를 공식선언하면서 “시민들의 불편과 교통체증 때문에 집회시위의 자유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쟁점화시키면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했다. 이처럼 정부는 집회의 결과적 외양을 ‘평화시위’와 ‘폭력시위’로 나눔으로써 자신의 입맛에 맞거나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집회는 용인·장려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강력한 처벌을 통해 배제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애쓰고 있다.

사진설명경찰의 원천봉쇄에 항의하며 11월 30일 한미FTA저지범국본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차별과 편견을 넘어 한걸음 내딛은 소수자들

한편, 올해 주목할 만한 또다른 인권상황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경남 함안의 한 중증장애인이 방 안에서 보일러가 터졌는데도 움직일 수 없어 얼어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촉발된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요구는 서울·대구·인천·충북·울산·경기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장애인들은 노숙농성·단식농성·집단삭발과 함께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는 투쟁까지 벌인 끝에 결국 지자체로부터 활동보조인을 장애인의 권리로 인정받았고 조례를 통한 제도화와 예산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어 대정부 투쟁을 통해 장애유형이나 연령,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당사자의 필요에 따른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고, 현재 자부담폐지와 생활시간 보장을 위한 예산확충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제정된 지 30년이 지난 특수교육진흥법을 대체할 장애인교육지원법이 지난 5월 국회의원 229명 공동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장애인시설 등 사회복지법인의 이사회에 공익이사제를 도입하는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도 발의되었지만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회복지시설장들의 강력한 반대와 맞설 참이다.

학교는 체벌, 두발규제 등 각종 용의복장규정에 따른 일상적 검열과 단속, 소지품검사와 야간강제학습 등 교육이라는 이름의 강압과 폭력이 여전하다. 올해 초 최순영 의원(민주노동당)이 발의한 ‘학생인권법안’(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안)은 정기 인권실태조사, 인권교육 실시 등 인권침해 예방을 위한 교육당국의 책임을 명시했지만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올해 학생들은 두발자유, 학생인권법 통과를 요구하며 5월 청소년인권행동의날, 6월 거리행진, 8월 전국행진을 진행하며 청소년 당사자의 힘을 결집했다.

한편, 올해는 그동안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던 HIV/AIDS 감염인들이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한해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감염인들과 인권단체들이 연대한 ‘HIV/AIDS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 예방법 대응 공동행동’은 에이즈예방법 개정안을 통해 △피검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검사 금지 △익명검사가 가능함을 사전고지 △역학조사를 통한 실명파악 △신고보고 체계를 요구했다. 이들은 증언대회·거리캠페인을 통해 감염인을 죽이는 것은 에이즈가 아니라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차별임을 강조했다.

성소수자들, 특히 성전환자들의 성별변경 문제도 중요하게 제기됐다. 대법원은 6월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판결을 내린 데 이어 9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을 마련했지만 △성전환수술을 받은 경우 △만20세 이상인 경우 △혼인한 사실이 없는 경우 △자녀가 없는 경우 등으로 제한해 성전환자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4월 발족한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 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는 특별법을 통해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성전환자의 생애에서 차별과 빈곤, 사회적 배제의 실태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보고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제논리에 가로막힌 차별금지법

일부 소수자운동의 약진과 제도개선안 마련에도 불구하고 차별 현실을 총체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은 재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7월 △시정명령 △이행강제금 △악의적 차별에 대한 특별배상금 △증명책임 전환제도 등을 골자로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하지만 재계가 특수고용·파견·사내하청 등 직접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는 노동자도 ‘근로자’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 기업부담을 가중시키고 경영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며 반대한 이래 법제정 흐름 자체가 없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운동진영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장애인차별금지법도 재계와 보수언론의 반발에 직면했다. 최근 당정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나 열린우리당의 분열과 정계개편 움직임, 내년 대선까지의 정치일정으로 볼 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악법과 함께 정쟁으로 잠자는 국회

여야의 정쟁으로 국회가 연이어 파행을 맞는 가운데 반인권·반민주악법은 건재한 반면 인권옹호 입법 실적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2005년 국회 법사위에 상정된 국가보안법은 개폐 논의조차 중단되었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면서 최근 이른바 ‘일심회 사건’ 등과 같은 공안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사형은 1997년 이후 집행되지 않았지만 사형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살인, 고문과 이를 은폐·방해하는 행위 등 반인권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입법도 국회 안에서 잠자고 있다. 시민의 재판참여를 보장하는 국민참여 배심제와 조서재판을 지양하는 공판중심제 등 사법의 민주적 통제에 한손을 보탤 이른바 ‘사법개혁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1월 유엔자유권위원회가 한국정부 보고서를 심의한 후 채택한 최종견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규약위반이라고 밝혔음에도 병역거부자는 여전히 형사처벌 되고 있고 병역법 개정안도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이대로라면 개혁국회를 자임한 17대 국회는 사회보호법 폐지 이후 별다른 악법 개폐나 인권옹호 입법 없이 마무리될 전망이다.

올해 우리 사회 인권의 시계 바늘은 거꾸로 가고 있다. 2003년 대통령이 된 ‘인권변호사’에게 집권 말기인 2006년은 ‘반인권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자본의 이권을 보장하기 위해 인권 대신 자유무역협정을 선택한 대통령은 저항하는 민중들을 위협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온 자유권 부문의 일부 진전까지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돌아보면 그 동안의 일부 진전도 군사독재와 자신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였을 뿐이었다. 남루해진 인권현실을 안고 2007년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을 다시 준비한다. 민중들은 싸움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권을 쟁취해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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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기독교

중세 교회는 봉건 지배체제의 일부였습니다. 교회는 엄청난 땅을 소유했고 평민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사법권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이 준 권력인 국왕과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현실은 죄로 물든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이 설교에 따르면 모든 현실적 욕망(부도덕한 탐욕뿐 아니라 인간 해방의 욕망 같은 정당한 것까지 포함한)은 사악하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봉건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였습니다.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전체 인구의 95%가 넘는 사람들이 그런 신앙의 사슬에 묶여 수입의 8할 이상을 귀족과 교회에 바치며 평생 죽도록 일만 했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욕망을 사악한 것이라 설교하는 교회는 현실적 욕망에 가장 충실했습니다. 토지와 돈에 대한 교회의 탐욕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고 평민들의 불만도 점점 높아갔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생기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사회는 성직자와 귀족이 제3신분인 평민들을 착취하는 사회였지만 평민들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중간계급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부르주아가 출현한 것입니다. 부르주아들은 한편으로 저술가, 의사, 교사, 변호사, 판사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들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무능한 귀족과 타락한 교회와 대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에서 자유방임, 사회적으론 ‘이성의 지배’를 표방하며 성장했고 자신들에게 마지막 남은 제약, ‘신분’을 해결합니다. 그게 바로 시민혁명입니다.

시민혁명은 프랑스 혁명, 영국혁명, 이렇게 일컬어지는 사건이지만 봉건사회가 부르주아에 의해 점령되는 수백 년에 걸친 과정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그런 과정의 제1막입니다. 흔히 종교개혁을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부르주아가 봉건 지배체제로서 교회를 자신들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는 달라졌지만, 교회가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봉건시대의 교회는 부를 더러운 것이라 설교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라 설교했습니다. 칼빈은 최초의 기업정신을 만듭니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막스 베버는 칼빈이 말한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일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이 축복하는 선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그에 조응하는 정신적인 가치들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어떻게 생겨났는가가 아니라 그 정신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가, 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갖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보다는 그 정신을 담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부의 축적은 칼빈이 말한 대로 여전히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성공한 자본가들은 자신이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선전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김우중 씨의 안경다리가 20년 된 것이라느니 정주영 씨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그들이 ‘안경다리’가 아닌 개인 용도에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쓰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근검절약은 그들의 호사 취미일 뿐입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의 부가 근검절약으로 축적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모은 돈을 대학게 기부하는 김밥 할머니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부를 축적하는 원리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잉여 노동입니다. 즉 노동자의 100원어치 노동을 60원에 사 40원을 먹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불평등에 참여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른바 자선입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에 기부함으로써 사회적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두 가지 문제를 갖습니다. 하나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불쌍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선이 가난의 부당함과 가난을 만드는 사회적 모순을 은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노동이든 사람이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면 먹고 살 수 있고 얼마간의 인간적인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불공정한 상태를 고쳐내야 합니다. 자선은 바로 그것을 값싼 눈물과 감동으로 차단합니다.

우리는 워낙 반공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흔히 자본주의는 다 같은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우리보다는 나은데 유럽은 또 미국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유럽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에 가깝습니다. 근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열심히 따른다고 비난을 받는 영국만 보더라도 의료와 교육이 전액 무료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유럽 쪽의 사회복지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입니다. 몇 해 전에 노키아의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과속으로 걸려서 범칙금으로 1억 3천만원을 냈다는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작년 말엔 같은 핀란드의 27살짜리 부자가 자동차 과속으로 2억 5천만원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건희가 과속을 하건 40대 무주택 가장인 김 아무개가 과속을 하건 똑같이 3만원을 내는 걸 공정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유럽에서 기독교는 뚜렷하게 쇠락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학의 중심지라는 독일의 교회는 노인들만 몇몇 앉아서 예배를 봅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한국처럼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나라에선 교회가 차고 넘치지요. 이것은 현재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사회에 부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미래에 전혀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 사회의 사회복지는 본디 자본주의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 사회들은 러시아보다 더 먼저 사회주의 나라가 될 뻔 했고 그걸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타협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는 유물론을 기초로 하고 유물론자들은 대개 하느님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받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정신도 종교개혁의 정신도 아닌 예수의 정신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건 기독교인에게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만 강조하여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식을 외면하는 건 종교체제로서 기독교나 교회에 사로잡혀 예수를 다시 한번 팔아먹는 행위라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단지 어떻게 사는 게 사랍답게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인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삶을 실천하고 전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가장 위대한 지점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심지어 기독교인이든 불교신자든 이슬람교도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사실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유대인의 신으로 여겨지던 하느님이 온 인류의 신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건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 정신은 어떤 형태의 차별이나 착취도 불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주의가 분배의 공정함을 목표로 한다면 기독교 정신은 분배의 공정함을 이룬 다음에도 남는 ‘내 형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입고 먹는 일은 바로 헐벗고 가난한 내 형제에 대한 배신입니다. 8억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그 가운데 3억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지금 자기마치 3억 명의 제 새끼가 굶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먹을까 찾아다니고 돈을 들여가며 비만을 치료하고 지역마다 음식 쓰레기를 맡지 않겠다고 싸웁니다. 이역만리 어느 곳에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기독교인은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내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사회주의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키워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는 그런 마음을 키우고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는 지난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수의 정신이 너무나 현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엔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아동인권을 비롯한 인류가 현대에 들어서야 깨달은 여러 소중한 정신들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일행엔 언제나 여성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어떤 현인이나 종교 창시자도 여자를 일행에 포함시킨 일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2천년 전에 여자들과 동행했고 여자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성매매 여성과 인격적으로 교우했습니다. 예수의 그런 행동이 사람들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을지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기독교인은 과연 어떤 행동으로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땀 흘려 같이 일하고도 남보다 수천 수만배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찬미되는, 계급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착취가 공공연한, 사랑이나 존경까지도 돈으로 매매되는 자본주의는 기독교인에게 말 그대로 악마의 사회체제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80년대 말 자본주의의 강력한 경쟁자이던 동구 사회주의들이 몰락하면서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금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지고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선 공공연한 침략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가장 강한 교회가 바로 한국의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은 흔히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 말하자면 지금 부시 일당이 믿는 그런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얘기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배경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다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은 주로 박정희 개발 파시즘 기간 동안의 일입니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개발 독재의 가장 충직한 선전선동 장치였습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설교는 “하면 된다” 라는 개발 독재의 구호와 일치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무조건적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의 의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저항의식을 배설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교회는 사람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억압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믿으면 남편도 자식도 잘된다는데 당시 여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줌마’들은 교회 부흥의 돌격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씌어졌고 오늘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 물러나고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파시즘이 있던 자리를 대신 자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의 지배는 파시즘의 지배처럼 폭력이나 억압을 통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본의 달콤한 욕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돈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지요.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세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부동산과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지배자에게도 ‘준비된’ 선전선동 장치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욕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는 세계 교회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소중한 실천들도 존재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모든 사회운동의 중심에 진보적인 교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정신을 갖는 교회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이젠 거의 모든 교회가 하느님 대신에 돈을 섬깁니다. 오늘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일 뿐입니다. 그 살벌하던 파시즘 시절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없습니다. 파시즘보다 ‘자본의 신’이 기독교인에게 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예수가 살던 2천년 전 유대사회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착취는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주류 미디어와 여론을 가장한 온갖 이데올로기 공작, 특히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네티즌의 활약은 그 복잡한 구조를 한 번 더 덮어 버립니다. 깊고 뜨거운 신앙심이나 영적 신령함이 그 구조를 자동으로 보여주진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예수의 삶을 실천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성경 공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놈의 자본주의가 대체 사람들의 피를 어떻게 빨아먹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 예수가 당대 지배체제와 대결했다는 사실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 대결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비폭력성만을 편의적으로 발췌하여 예수의 급진성을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다 돈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돈 대신에 다른 걸 섬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바로 ‘내 마음’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은 다 온화하고 도사들 같습니다. 수염 이렇게 기르고 개량한복 입고 조용히 앉아서 “부시나 라덴이나 똑같다”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흉내를 내지만, 그 폭력의 현실과 내 형제의 고통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나거나 초월한 어떤 가치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늘 고민해야 합니다. (평신도 아카데미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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