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www.masilga.com/philosophy

수학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래서 수학(mathematiques)은 복수로 쓴다. 수학은 양(quantité)의 과학이며 측정(la mesure)의 과학, 즉 양들간의 관계(les rapports)의 과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이란 우선 불연속적인 양(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양),즉 수(le nombre)가 있으며, 이는 산술학의 대상이 된다. 그 다음 연속적인 양, 즉 크기(grandeur, 크기는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기하학의 대상이다.

기하학적 도형은 대수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것은 해석 기하학의 대상이며, 17세기의 해석 기하학의 창시자는 페르마(Fermat, 1601-1655)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이다.

18세기에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학의 기초가 되는 무한소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 당시의 역학은 운동의 과학이며 수학에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이후로 군론, 집합론, 위상학이 등장한다. 군론(Groupe)이란 여러 수학적 요소들이 특정의 법칙에 따라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체계이다. 예를 들면 정수, 3의 배수, 볼록꼴 다각형 등이다. 집합론(théorie des ensembles)이란 수학적인 존재들의 유한집합 또는 무한집합에 관한 이론이다. 위상학(topologie)은 위치의 기하학이라고도 한다. 위상학은 어떤 도형을 이루는 여러 점들의 연속적인 순서, 즉 그 도형의 부분들의 상대적인 위치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위상학에서는 음반은 구조적으로 동전과 구별되나 동전과 접시는 구별되지 않는다.

수학을 일반적으로 정의를 보면, 데카르트는 "순서와 측정의 과학"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군론과 위상학은 전형적인 순서의 과학이다.


1.수학의 기원

1)경험론과 관념론

*수학의 기원은 구체적인 경험인가?

경험론자들에 의하면 수학은 관찰의 과학이다. 밀(J. Stuart Mill)은 "각자가 정신 속에 가지고 있는 점, 선, 원들은 각자가 경험 속에서 알고 있는 점, 선, 원들의 단순한 복사이다"

수 개념의 발생은 전체적으로 파악된 구체적인 다수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목동의 양의 수, 시골 여인숙의 여주인의 계산, 미개사회에서 셈 단위, 등등에서 다르다.

*수학과 플라톤(Platon)의 이데아

관념론적 관점은 경험론적 관점에 대립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뼈로 만든 알맹이 5개로 된 장난감에 대하여 명상한다. 여기서 "다섯"은 사물이 아니라 이데아(관념)이다. 수학자는 이데아들의 세계, 정신에 속한 반투명의 순수관계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 수학자는 자연을 관찰하지 않고, 이데아들의 순수한 관계들을 명상한다. 심지어, 기하학자의 공간은 "가지적인 연장(l'étendue, intelligible)이지 구체적인 연장(l'étendue concrète)이 아니다."

*플라톤에서 훗설까지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를 구별한다: 하나는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 다른 하나는 영원한 본질들의 세계이다.

포물선은 경험적인 그림을 초월한 이데아적인 본질이며, 우리는 경험적인 그림에 의해서 포물선이라는 이데아적인 본질을 상징(기호)로 표시한다.

훗설은 "기하학에 경험이 개입될 때, 경험이 경험으로서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 도형을 그리는 물리적 동작이나 그려진 그림을 경험으로서 경험하는 것은 기하학적인 본질을 대상으로 하는 직관과 사유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기하학자에게는... 본질직관(Wesenschau)이 ... 궁극적 기초를 제공한다."

경험론과 관념론사이의 공통점이 있다. 수학자의 활동은 (경험적으로 보는 것이거나 지성적으로 보는 것이거나 간에)[형태를] 보는 것(vision), 즉 수동적 관조(une contemplation passive)이다. 오늘날에는, 경험론과 관념론의 대립은 수학의 연산론(조작이론, théorie opératoire)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2)수학의 기원의 연산 이론(Théorie opératoire)

* 수학적 존재들은 도구(les outils)이다.

수학적 존재들은 단지 처음에는 구체적이다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는 연산 기술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예로 '수'개념을 보자.

*수 개념

수라는 개념 자체의 기원은 분명히 기술적이고 연산적인 것이다. 수가 순수한 이데아라는 플라톤의 말은 틀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물질적인 사물들의 수를 세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수의 단위(l'unité)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자, 산술의 수와 기하의 수가 다르다. 아마도 플라톤은 산술의 수를 한번 더 추상하여 기하의 수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양뼈 "다섯"의 명상에서 다섯은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사물도 아니고 명상할 수 있는 본질도 아니다. "다섯"은 연산의 산물이다. (최초의 상인들은 운반하기 편리한 조약돌을 가지고 가축들과 대응시켜서 거래하였다; '계산(calculs)'이란 말의 어원은 조약돌(cailloux)이다).

역사가 흐르면서, 이러한 연산들은 점점 더 추상화되고 일반화 되었다. 영(zéro)이라는 숫자는 인도의 수학자들이 발명하였고,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보급하였다. 영이라는 숫자를 정의하면,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는 것, 어떤 실재도 지시하지 않는 것이다. 영이란 말은 힌두어로는 'sunya'이며, sunya는 공(vide)를 의미한다. 수 제로는 연산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영은 이러한 자리를 채우고 그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 개념의 일반화

삐아제(Piaget)의 말과 같이 "음수(le nombre négatif)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과 대응이 되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음수는 경제적 연산(부채)이나 기하학적 연산(반대 방향)과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무리수(le mombre fractionnaire)는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이 크기를 측정할 때 나타난 난점들로부터 유래한 기호들이다. 허수(le nombre imaginaire, i=√-1)는, 상상의 수이며, 그 명칭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제곱근을 구하는 연산을 음수에까지 확대하여 대응시킨 것이다. 허수는 교류 전류를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삐아제의 말과 같이 허수는 처음에는 "대상이 없는 연산의 도식"을 구성하였다.(Piaget, Epistémologie génétique, t.I, p.55.)

(호그벤(Hogben, Les mathématiques pour tous, Payot, p.28.)의 말과 같이, 숫자언어의 발전은 "가축의 무리와 계절을 셈하는 데에서 신전을 건립하는 것으로, 신전 건립에서 미지의 바다에서 배의 방향을 찾는 것으로, 항해술에서 물질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동력기)의 발명으로 진행한 인간재능의 발자취"를 따라서 발전하였다.

결론적으로 수학적 추상이 어떤 단계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연산활동이다.


2.수학적 추리:논리학과 수학

1)연역법과 동어반복

라이프니츠는 증명이란 "어떤 명제를 확실하게 만드는 추리"라고 정의한다.

쇼펜하우어의 비유적 표현을 빌면, 수학자는 목발을 짚고 다니기 위해서 두 다리를 절단하는 사람과 같다. 왜 직관이라는 자발적이고 신속한 능력을 추리라는 목발로 대치시키는가? (블랑셰(Blanché)는『공리론(L'Axiomatique)』에서, 『뽀르-그와얄(Port-Royal)의 논리학』에서는 수학자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물들을 증명한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 18세기에 끌레로(Clairaut)는 유클리드를 용서할 필요를 느꼈다. 유클리드는 "두 개의 원이 교차할 때, 그 두 원의 중심이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명제를 증명한다는 것은, 그 명제가 이미 인정된 다른 명제들과 동일한 것을 말하는 동어 반복적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희랍어의 to auto legein은 동일한 것을 말한다는 의미이다) 라이프니츠는 "증명이란 어떤 진리를 이미 알려진 다른 진리로 변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산술적이든 기하적이든 수학적 증명은 항상 동어반복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직접 연역하는 경우도 있고, 소급적(régressive) 증명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불합리(l'absurde)한 것에 의해서' 어떤 명제를 증명하는 귀류법이 있다. 귀류법은 참이라고 가정된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참이라고 생각되는 명제와 모순이 되는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이전에 이미 설정되어 있던 명제들과 모순이 되는 명제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결론으로 수학은 거대한 동어반복으로 환원된다.

2)수학적 연역법의 엄밀함(rigueur)과 풍요함(fécondité)

수학적 추리가 동어반복을 확립하는 것으로 환원된다면, 수학은 논리학이 발전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논리학의 삼단논법은 엄밀함의 모델이지만, 엄밀함은 아무것도 생겨나게 하지 않는 불모의 엄밀함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삼단논법을 '장엄한 무용성'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연역법은 생산적이다. 딴네리(Jules Tannery, 1848-1910)도 생산성을 긍정했다. 삼단논법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별한 것으로 진행하는 반면, 수학적 추리가 일반화시켜 나간다. 나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얼마인지를 알기 때문에 다각형의 내각의 합이 '다각형의 내각의 합은 변의 수에서 둘을 뺀 다음 2직각을 곱한 것, 즉 180*(n-2)의 일반성을 찾는다. [수학에는 수학의 고유한 발전이 있다.]

3)수학적 귀납법의 문제

뿌엥까레(Poincaré, 1854-1912)는 수학적 추리는 연역법뿐만 아니라 귀납법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귀납법은 사실들을 여러 번 관찰하여서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을 긍정하는 방법이다. 뿌엥까레는 순환에 의한 증명에서 귀납법이 '작용한다'고 대답한다. 예를 들어 (1+a)n > 1+ na이라면, (1+a)x+1 > 1+ (x+1)a를 증명해보자, (1+a)x+1 > 1+ (x+1)a +xa2이니까 당연히 [귀납적으로] 1+ (x+1)a +xa2 > 1+ (x+1)a 보다 크다. 결국 (1+a)x+1 > 1+ (x+1)a 보다 크지. (이 명제는 n의 모든 값, 즉 무한히 연속되는 n의 값에 대해서 참이라는 것을 나는 '귀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블로(Goblot)가 지적하듯이 이 명제는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된 것이다 "순환에 의한 추리는 일종의 증명을 포함하지만, 결국 그 증명은 설명될 수 없는 증명이다."

뿌앙까레 "삼단 논법의 폭포(cascade de syllogisme)"에 의한 작용에서 일반화의 합법성은 이전에 이미 증명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전건도 참이고 후건도 참일 경우]

4)수학적 추리의 풍요함은 연산의 특징에 의해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의 불모성ㆍ비생산성은 포함(l'inclusion)의 특징이 일상 언어의 용례를 벗어나지 못한 초보적 연산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수학적 추리도 역시 동어 반복적이며, 동어반복은 수학의 엄밀성의 유일한 비법이다. 동어반복을 밝히려면 연산의 여러 가지 조작기술, 여러 가지 구성규칙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a/b = c/d 라는 식과 ad=bc라는 식은 동어반복이라는 것을 알려면 변형 즉 연산조작이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각형의 내각의 합을 연역하려면, 다각형을 그리고 그 그림을 삼각형으로 분할하여야 한다. 연역법은 항상 동어반복적이다 : 다만 수학자가 연역을 할 수 있으려면, 연산 규칙들을 발명하여야 한다.

수학강의를 이해하는 것이 수학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쉽다.

연산규칙의 발명과 선택에는 연역법 이외에도 예견적인(divinatrice) 직관의 역할이 강조된다. (빠스깔(Pascal)은 수학자에게 "명제들을 모든 방향으로 회전시켜 보라"라고 하고 갈르와(Galoi)는 수학자가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하고 비교하며", 그래서 "이쪽 저쪽 부딪히면서" 발견을 하게된다고 한다.)

결국 수학자는 처음에 잘 보이지 않는 동어반복들을 부상시킬 수 있는 연산기술을 확립하기 위하여 창의적인 직관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3. 수학의 원리들; 정의(définition), 공리(Axiome), 공준(postulat)- 공리론(L'axiomatique)

연역의 출발점으로 올라가면, 그 자신은 연역되지 않는 최초의 명제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 제일 명제, 원리라 부른다. [존재의 근원도 원리, 인식의 근원도 원리라 실천의 원칙도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1) 수학적 정의(définition)

수학적 존재들은 우리가 자연 속에서 발견한 대상들이 아니다. 수학의 대상에 대한 수학적 정의와 대립되는 경험론적 정의는 [추상을 통하여 수학적 대상으로] 정의하기 앞서서 존재하는 사물들을 소박하게 기술한 것이다. 수학적 존재로서 원은 자연 속에 있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원을 창조한 것은 원에 대한 정의이다.

말하자면 수에 대한 경험적인 정의는 복사(copie)이지만, 수학적인 정의는 모델(modèl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명이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우화를 연상하게 한다.]

수학적 정의는 어떤 구체적인 것과 일치할 필요가 없다(음수나 허수 등이 그 예이다). 르 르와(E. Le Roy)의 말과 같이, 수학적 정의가 제시하는 개념은 "효과적이고 연산적인 실행 자료를 정신에게 제공한다."

그래서 수학적 정의는 생산적인 풍요함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순수한 연산도식이 되었다. (플라톤은 "기하학자가 아니면 이곳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했고, 수학이 궁전과 사원건축을 주도했고, 황금비(le nombre d'or)가 건축술을 지배했다 하더라도, 러셀 "수학은 수학하는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학문이며, 자기가 말한 것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학문이다(Les mathématiques sont une science où l'on ne sait jamais de quoi l'on parle, ni si que l'on dit est vrai)."

수 계열에서 다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 수에 다른 수를 첨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Lalande, La raison et les normes). [ - 이 미래 지배적(예측적) 사유는 과거를 미래로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따라서 수의 무한성은 수 자체의 형성법칙 중에, 즉 첨가하는 행위 자체 중에 포함되어 있다.

2) 공준(Les postulats)

* 공준은 직관인가?

공준은 수학자가 청중에게 동의를 '요청하는(demande, postulare)' 명제이다. 유클리드는 자신의 29번째 명제, 한 직선과 평행하는 직선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해 주기를 원하였다. 정리(théoreme)로부터 중요한 결과들을 연역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준으로부터도 중요한 결과들을 연역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공준을 단순한 경험적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유클리드는 도형을 변형되지 않고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공준(요청)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가치는 경험적 차원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공간의 구조는 연장이 있는 사물들에 대한 경험에 선행하고 우리 지각의 본유적인 틀(un cadre inné), 모든 가능한 경험의 선천적 조건, 즉 감성의 선천적 형식(la forme a priori de la sensibilité)을 구성한다. 이처럼 유클리드의 공간도 필연성이나 직관적 자명성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성립

평행선의 공준(postulat), 29번 명제

18세기에는 이탈리아의 수학자 사케리(Geronimo Sacheri)신부가 이 유명한 유클리드의 명제를 귀류법에 의해서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 19세기에는 러시아의 수학자 로바체프스키(Lobatchevsky)와 헝가리의 수학자 보야이(Bolyai)는 귀류법에 의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보다 작다(삼각형의 면적이 클수록 내각의 합은 작다)는 공간을 상정하고, 그래서 로바체프스키의 기하학에서 공간을 음의 곡률(陰曲率, 負曲率, courbure negative)로 나타낸다. - 1851년 리만(Riemann)이 비유클리드적인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리만의 기하학에서 공간을 양의 곡률(陽曲率, 正曲率, courbure positive)로 나타낸다.

* 공준은 변장된 정의(une difinition déguisée)이다.

19세기까지 유클리드 기하학은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나, 기하학의 한 특수형태, 곡률이 제로(0)인 기하학이 되었다. 수학의 발전은 지난날의 수학적 '진리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가능한 경우로 취급하면서 보다 큰 전체 속에 위치 시켰다.

뿌엥까레에 의하면, 공준이란 '위장된 정의'라 할 수 있다.

유클리트 공준의 조작적 특징만으로 본다면, 유클리드의 공준들은 측량사의 수준에 맞는 공간 '사용법'을 표현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리만의 도식 속에서 잘 설명된다).

3) 공리들(les axiomes)

*옛날에는 공리는 자명한 것이었다.

공준(postulat)은 증명할 수 없는 명제, 정리(théoreme)와 같은 것이라면, 공리들(axiomes) 순전히 논리적인 요구(exigence)이며, 수학의 모든 분야에 강제적으로 부과되며, 정신적인 조작을 하는 모든 정신에게 부과된다. 예를 들어,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제 3의 양과 동일한 두 개의 양은 동일하다.

*공리는 협약(convention)이다.

공리 자체도 위장된 정의(une difinition déguisée)라 할 수 있다. 공리자체는 가능한 연산들의 영역을 제한하는 하나의 연산규칙일 뿐이다.

4) 공리론(L'axiomatique)

공리(l'axiome)란 말은 강제적으로 부과되어 있다는 뜻이다. 요즈음은 공리를 함수적 기호작용으로, 연산 규칙(la règle opératoire)으로 생각한다. "다른 명제들로부터 연역된 명제가 아니라 정신의 결단활동에 따라서 연역의 출발점에서 제시된 모든 명제들"을 일반적으로 공리라고 이해한다. [삼단논법(AAA)의 대전제는 공리이다]

공리와 공준의 조작기능이 동일하기 때문에, 공리와 공준은 구별되지 않는다.

데카르트(Descartes)에 의하면 공리란 지성적인 직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단순한 본성들(les natures simples)'이며, 절대적인 자명함이다. 불리강(Bouligand)에 따르면, 우리시대는 절대 수학의 쇠퇴기이다. 블랑셰(Blanché)의 말처럼, "정리에게는 고립적인 진리, 즉 원자론적인 진리는 없다. [관계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정리의 진리란 정리가 체계로 통합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상호 양립할 수 없는 정리들도 서로 다른 체계들과 관계를 갖게되면 모두 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공리 그 자체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결국 공리란 우연한 조작(연산 규칙)의 단순한 규약이다.

* 공리와 가정

과학자는 먼저 어떤 긍정을 추측하고, 추측한 긍정으로부터 검증할 수 있는 결과를 연역한다. 가정이란 이런 추측의 긍정(une affirmation conjecturale)을 말한다.

수학적인 연역법의 진리는 상대적이며 순수하게 형식적인(formelle) 것이다. 수학적인 연역법은 선택된 공리체계와 일치하기만 하면 된다. 즉 하나의 공리체계는 하나의 공리론(axiomatique)을 구성한다. (랄랑드는 공리론이란 "연역적 학문의 초기에 제시된 원리의 전체이다"(Lalande, Vocaulaire technique et critique de la philosophie,)고 말한다.

*공리론의 규칙들

수학자 힐버트(David Hilbert, 1862-1943)의 경우, 공리는 상호 양립(compatibilité) 할 수 있어야 하며, 상호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비유클리트적 기하학의 가능성은 평행선의 공준의 독립성을 검증한다. 게다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공리들은 충분(suffisants)하여야 한다. 하나의 체계 내에 새로운 공리들을 무한히 첨가 할 수 없다. 그래서 한 공리체계는 그자체로 포화상태(saturé)에 있다고 한다. 한 체계 내에서 어떤 공리를 삭제 할 수 있다. 이때는 체계를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

*형식주의와 직관

유클리드 기하학을 완벽한 방식으로 공리화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힐버트(Hibert)는 공리를 5개 그룹으로 나눈다. 점, 직선, 평면 등을 정의 할 수 있는 속성(l'appartenance), 순서 즉 차원(l'ordre), 합동성 즉 기하학적 동등성(congruence), 평행성(parallélisme), 연속성(continuité)이다. - 19세기의 제르곤느(Gergonne)는 표현된 공리론은 그 내용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한다. - 아르노 레이몽(Arnold Reymond, 1874-): "수학자는 기하학의 도형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놓을 수 있는 순전히 논리적인 캔버스를 구성"한다.

수학의 명제들은 순수한 논리적 관계들, 즉 모든 구체적인 의미와는 독립적인 개념들 상호간의 관계들을 표현한다. - 장기놀이의 기술은 장기말의 진행규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력있는 수학은 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직관의 개입] : 순수 논리학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체계의 공리들이 논리 정연하고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어떤 공리론은 다른 공리론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카르납(Carnap)은 "논리학에는 도덕이 없다"고 말한다. - 뿌앙까레 " 제로(0)는 무(無)라는 집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로를 무라고 정의하고, 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며, 이것은 프랑스어의 풍부함을 남용하는 것이다." 괴델(Gödel)이 말하듯이 "산술의 무모순율은 산술자체의 힘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다." - 뿌앙까레 "논리학이 직관에 의하여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논리학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불모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블랑셰는 "공리론의 방법의 장점은 직관을 배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을 포함하면서, 다른 것으로 대치되니 않는 최소한의 영역에 감금시켜서 억제하는 데 있다."


4. 우주 인식에 대한 수학의 역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피타고라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에 의하면 수학은 양에 대한 학문이다. 자연학(la physique)은 구체적인 성질에 대한 학문이다. - 17세기에 이르러 근대물리학(la physique)이 탄생한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은 물질적인 우주를 인식하는 데 수학을 이용할 줄 알았다.

피타고라스(Pythagre)도 우주가 수학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가 "세계를 지배한다(gouverner le monde)"다고 하였다. 그는 삼각형을 이루는 형식을 1+2+3+4=10 이라는 생각하고 10을 완전수로 생각하였다. 여기서 1은 제우스, 2는 태양과 달, 3은 기본적인 지수화(地水火), 4는 동서남북을 의미한다. (13이란 수의 미신도 피타고라스 철학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비례수에 관한 조화의 수는 천상의 법칙을 의미한다.]

*수학은 세계를 번역한다.

과학에서 수는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순수한 상징인 조작기호(연산기호, symbole opératire)이다. - 수는 "세계의 왕이 아니라 충실한 통역자이다."란 것은 수가 세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리학에서, 케플러는 메나이코스(Ménechme)를 이은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의 원추분할 기하학에 따라서 화성의 타원궤도를 풀었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법칙을 대수학으로 풀었고, 데카르트는 삼각함수의 관계를 이용하여 굴절의 법칙을 이용했다.

수학은 하나의 개별과학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도구이며, 모든 학문의 언어이다. [그 적용 대상과학에 따라 도구인 기호의 기의가 달라진다. 자기 체계내의 기의로서 만족하는 공리에서만 타당하다.] 왜냐하면, [외적 대상 세계를 측정하는] 과학적 지식이 측정이나 양적인 관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수학자인가?

케플러가 법칙을 발견하고서 신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창조주이고 구세주이신 당신, 당신의 작품의 위대함을 통하여 저의 정신을 기쁘게 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합니다." - 라이프니츠는 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실현하고 있는 우주의 법칙의 지극한 간결성을 찬양한다. 그래서 "세계는 신의 계산으로부터 생겼다" - 플라톤은 "항상 기하학적으로 행동하는"신에게 기도하였다. - 성경의 위서 중, '솔로몬의 위서'에서 "신은 척도와 수를 가지고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

칸트는 수의 존재론적 실재론을 거부하고 관념론적 유형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칸트가 필연적이고 선천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유클리드 유형의 시간적, 공간적 직관이었고, 이제는 이러한 직관이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선천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유클리드 기하학은 선천적 직관이 아니라, 토지측량이라는 초기의 연산작업으로부터 추상된 하나의 도식이다.)

옛 사람들은 천체의 운동이 완전하다고 믿었고, 원운동은 완전한 운동이라고 믿었다.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를 타원형이라 생각했고, 아인슈타인은 행성은 한번 자전할 때마다 궤도가 조금씩 변한다는 가정을 세웠고 또 검증하였다. 그래도 럿셀 말처럼 수학은 물리학자의 능력을 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수학의 약점] 보편수학의 감탄할 만한 꿈은 인간과학과 생명과학에서는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생성이나 복잡한 개별성은 수학적으로 번역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비엔나학파의 선언에서 "물리적 광학에서는 장님이 원리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한다"는 말이 있다. 의식상태들, 감정들 같은 체험의 세계에 대한 가치를 수학적 금욕정신은 합법적으로 배제할 권리가 있다.

[수학에 대한 변호] 그래도 수학적인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기쁨은 라신느(Racine)의 브리타니쿠스(Britanicus)나 베레니스(Vérénice)를 읽으면서 느끼는 기쁨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수학은 정신에게는 엄정성을 가르치는 훌륭한 학교이지만 수학만으로는 인간문화 전반을 정의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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