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종의 인식을 향하여: 스피노자와 “마주침의 유물론”


최 원

(뉴 스쿨 대 철학 박사과정)


왜 바다에, 큰 길에, 사구(砂丘)에 비가 오는지

― 말브랑슈(Malebranche)1)


자신의 아내 엘렌(Hélèn)을 살해한 비극적인 사건 이후 그에게 강요된 침묵의 심연으로부터 빠져 나와 “공적으로 말(parole)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면서,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자신의 생각에 관해 맹렬한 집필을 시작했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2)은 그 같은 투쟁의 결과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철학적 대립이 작동하는 지반 그 자체를 뒤흔들려는 시도였다. 우연성이란 부차적인 요소로서 필연성이 자신을 실현하고 스스로에게 복귀하기 위한 매개에 불과하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우연성을 필연성의 바로 그 토대에 위치시킴으로써 알튀세르는 유물론과 관념론 양자 모두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기원(archē) 및 목적(telos)이라는 관념(혹은 출발점과 종착점의 일치라는 관념)을 비판했다. 그는 다양한 유물론들을 내부로부터 그렇게 자주 무장 해제시키곤 했던 목적론을 관념론들의 관념론으로 식별해냈다. 이러한 급진적인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세계 및 세계의 의미의 형성을 클리나멘(clinamen)의 결과로, 즉 공백 속에 평행으로 낙하하는 무한수의 원자 가운데 하나의 우연한 빗나감과 그에 따른 충돌 및 응고의 결과로 설명한 에피큐로스적인 전통을 특권화시켰다. “우발적인 것(l'aléatoire)”의 유물론이라는 이 전통 안에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홉스, 루소, 맑스, 하이데거, 데리다와 같은, 그들 모두가 통상적으로 유물론자들로 분류되지는 않는 철학자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가장 기이하게 보이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스피노자일 것이다. 비록 그가 철학의 전 역사를 통해 목적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들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 철학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러한 비판은 우연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또 다른 비판을 기초로 해서만 가능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포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스피노자가 『윤리학』3)에서 가공했던 “제 3종의 인식(the third kind of knowledge)”의 종별적인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에서, 알튀세르가 발견하고 재건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전통에 스피노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제 3종의 인식의 급진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알튀세르 자신이 또한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스피노자는 인식을 세 가지 종류로 나눈다. 제 1종의 인식은 상상(Imagination)의 인식으로 “우연적인 경험들” 및 “기호들(signs)”을 통해 획득되는 것을 말한다. 제 2종의 인식은 “공통의 통념(common notions)”에 기반한 이성(Reason)의 인식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제 3종의 인식은 직관(Intuition), 혹은 “직관적 인식”으로 스피노자는 이를 “특정한 신(神)의 속성들(attributes)의 형식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NS4): 형식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가는”(E2P40S2) 인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의 분류는 이미 『지성향상론』5)에 나타나고 『윤리학』에 재등장한다. 그러나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텍스트가 각각 인식의 세 가지 종류를 분절시키고 정의하는 방식은 상당히 판이하다. 이 두 텍스트 사이에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한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자신의 글6)에서 이 두 텍스트의 관계를 단절이라기 보다는 “진화(evolution)”로 특징지음으로써 그들 사이의 일정한 연속성을 가정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나는 곧 이 점에 관해 자세히 논하겠다.

     “제 2종의 인식”의 정의에 관한 『지성향상론』과 『윤리학』의 두 가지 주요한 차이점을 묘사함으로써 시작해 보자.7) 1) 『지성향상론』이 제 2종의 인식을 “부적합한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윤리학』은 그것을 제 3종의 인식과 함께 “필연적으로 적합한 것”(E2P41)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제 2종의 인식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많은 혼란을 야기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성향상론』의 입장을 『윤리학』의 독해에 투사하면서 『윤리학』에도 제 2종의 인식에 대한 모순적인 평가들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주장하도록 허용했다.8) 2) 또 다른 주요한 차이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지성향상론』이 제 2종의 인식을 “보편적”인 통념에 기반한 것으로 보는 반면, 『윤리학』은 그것을 “공통의 통념”(E2P40S)에 기반한 것으로 봤다는 점이다. 사실, 공통의 통념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에게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단지 『윤리학』(2P38C)에 이르러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성향상론』의 보편적 통념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적절한 이름의 부재’라는 부차적인 문제로 봐야하는 것일까? 바꿔 말해서, 우리는 회고적으로 『지성향상론』의 보편적 통념을 『윤리학』의 공통의 통념과 실천적으로 같은 것으로 동일시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정확히 저 두 텍스트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 혹은 단절을 지워버리는 것이며,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왜 공통의 통념을 초월적 통념(Transcendental notions: “존재, 사물, 어떤 것”)뿐만 아니라 보편적 통념(“사람, 말, 개, 등”)으로부터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 그토록 애썼는지의 이유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E2P40S1).

     이러한 두 가지 차이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그 두 텍스트의 관계에 관한 들뢰즈의 설명을 우회해 보자.


     1. 들뢰즈의 설명: “스피노자의 진화”


     앞서 지적했듯이 『지성향상론』과 『윤리학』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들뢰즈가 사용하는 “진화”라는 용어는 모호하다. 그것은 분명한 단절보다 연속적인 발전을 가정한다.

     『스피노자: 실천적 철학』(이하 SPP)에서 들뢰즈는 두 텍스트의 주요한 차이점을 정당하게 『윤리학』에 등장하는 “공통의 통념” 이론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공통의 통념” 이론을 『윤리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향상론』이 이성과 적합한 관념의 형성이라는 질문에 관해 달성한 것들을 완전히 재구성한다. 그러나 공통의 통념 이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기하학적 방법론으로부터 [『지성향상론』 안에서] 그것의 실행을 제약한 허구들과 추상들을 제거”(SPP, 56~57)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이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공통의 통념들은 육체들(bodies)의 물리적인 조우9)의 경험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공통의 통념들은 우선적으로 육체들에 관련되는 것이고, 정신 내에서의 그것들의 형성은 항상 육체들 사이에서의 구성에 이차적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공통의 통념의 육체적인 특성들이야말로 관념들의 추상을 엄격하게 제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에게 있어 공통의 통념의 의미는 “수학적이라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SPP, 54).

     그러나 질문이 따라나온다. 만일 공통의 통념이 육체들 사이의 조우의 “경험들”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왜 필연적으로 적합한가? 경험들이란 스피노자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상상적인 것의 주요한 두 원천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서, 왜 공통의 통념이 제 1종의 인식이 아닌 제 2종의 인식에 속한다는 말인가? 들뢰즈는 이를, 일치(agreement)의 관계에 진입하는 개별적인 사물들은 즉시 “기쁜 정념(joyful passions)”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렬(disagreement)의 관계는 육체들을 필연적으로 슬픔에 의해 변용(affect)시키기 때문에, 육체들로 하여금 어떤 공통의 통념도 형성하도록 유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통의 통념은, 들뢰즈에 따르면, 상상과 이성 사이의 미분(differentiation)으로 기능한다. 그는 공통의 통념이란 “우리의 역능에 관련된 실천적 관념들(practical Ideas)[이며], 단지 관념들만에 관련되는 그것들의 해명(exposition)의 질서들과 달리, 그것들의 형성의 질서는 정동들(affects)과 관련된다”(SPP, 119)고 말한다.

     비록 이러한 설명은 상상으로부터 이성으로의 이행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장점을 갖는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논리적 결함을 갖고 있다. 우리는 들뢰즈가 공통의 통념을 “실천적 관념들”이라고 해석한 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공통의 통념이란 관념들과의 어떤 관련도 없이 정동들에만 우선적으로 관계하고 이차적으로 관념들에 관계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둘 째, 그것은 조우한 대상들에 대한 관념들에 의해서 야기된 정동들에 우선적으로 관계하지만 아직 그 정동(기쁜 정념)의 내적인 원인들은 정신에 해명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스피노자의 공리(Axiom)와 모순된다: “사랑, 욕망, 혹은 정신의 정동들이라는 말로 지시될 수 있는 모든 것과 같은 사유의 양태는 동일한 개체(Individual) 안에 그 사랑하거나 욕망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없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념은 다른 사유의 양태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E2A3) 후자의 경우, 그것은 스피노자의 정의(Definition)와 충돌한다: “나는 적합한 관념이란 대상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진실한 관념의 모든 성질들과 내적인 지표들(denominations)을 갖는 관념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E2D4, 강조는 인용자) 바꿔 말해서, 공통의 통념이 진정 “적합한” 관념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그것들이 이미 특정한 “해명(exposition)”의 과정을 통과한 관념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공통의 통념이 우선은 육체들의 문제이고 단지 이차적으로만 정신의 문제라는 들뢰즈의 주장은 “연장의 양태와 그 양태에 대한 관념은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E2P7S)라는 스피노자 자신의 말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나에게는 이러한 모순들은 스피노자에게 일종의 생기론적 형상을 부여하려고 하는 들뢰즈의 경향 때문에 초래되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다시 스피노자 안으로 정신-육체의 이원론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데카르트에게서와 달리 특권화되는 것은 육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생물학적인 것”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SPP, 56)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것”이 “수학적인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구체적이라는 주장은 스피노자 자신에게는 상당히 낯선 것이 아닐까?10)   

     공통의 통념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을 조금 더 쫓아가 보자. 그에 따르면, 공통의 통념이 둘 혹은 그 이상의 육체들의 조우로부터 형성되는 한, 그것의 “일반성들”은 최소값(“두 육체들”의 일반성)과 최대값(“모든 육체들”의 일반성)에 의해 표시되어지는 일종의 스펙트럼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공통의 통념은 진동하는 일반성들이다(SPP, 114). 따라서, 더 많은 것들을 우리가 조우할수록 더 “보편적인” 인식을 우리가 획득할 수 있다. 이는 따라서 가장 적은 보편성으로부터 가장 큰 보편성으로의 긴 이행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이행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신의 관념”으로 인도하며, 신의 관념은 이제 “실존하는 실체” 및 “실존하는 양태들”의 개별적인 본질들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제 3종의 인식으로의 이행을 매개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공통의 통념은 제 1종의 인식에서 제 2종의 인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할 뿐 아니라 제 2종에서 제 3종으로의 이행까지도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들뢰즈의 훌륭한 설명에 동의한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설명의 뒷면을 구성하는 그의 생각이다. 들뢰즈는 가장 적은 보편성으로부터 가장 큰 보편성으로의 이행이 또한 ‘이론적인 해명의 질서’라는 측면에서는 거꾸로 가장 큰 보편성으로부터 가장 적은 보편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점을 인정한다(SPP, 114). 왜냐하면, 두 육체가 공유하는 보편성은 모든 육체들이 공유하는 보편성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대면하게 되는 질문은 ‘왜 이러한 이행이 또한 동시에 우리의 사유의 역능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키는 과정으로 여겨져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가 날카롭게 구별하는 “보편적 통념”이 갖는 보편성과 “공통의 통념”이 갖는 보편성의 종별적인 차이를 구성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11) 공통의 통념의 현실성과 경향적으로 동일시되는 그것의 육체적 특징이라는 것은 더 이상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확히 이론적 해명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보편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이라는 용어들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교환 가능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적이다(특히 SPP, 118~9). 요컨대, 개별자들의 육체적 조우의 경험들로부터 형성되는 관념이라는 식으로 공통의 통념을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 이질적인 경험주의의 요소를 수입할 위험을 갖는 것이 아닌가?12)

     이 점에 관해서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의 진술을 한다. 첫 번째는 “진실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일치한다”라는 제 1부의 여섯 번째 공리다. 다른 하나는 적합한 관념의 정의에 대한 해명이다: “나는 내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외적인 것, 즉 관념과 그것의 대상의 일치라는 것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E2D4Exp)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말들은 진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이 갖는 힘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시킨다. 그것들은 진리의 개념화의 적절한 순서를 표현한다. 즉, 진리에 대한 두 개의 연속적인 테제가 있고 그것의 순서는 뒤집어질 수 없다. 1) 만일 어떤 관념의 모든 성질과 내적인 지표들이 그 관념을 진실한 것으로 명시한다면, 반드시 그 경우에만 그 관념은 진실하다. 2) 어떤 관념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그것의 대상과 반드시 일치하게 된다. 이는 경험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그러므로 대상과 관념의 일치가 우연적인 것인 한에서, 그 관념에 의해 야기되는 기쁜 정념은 여전히 슬픈 정념으로 바뀔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은 적합한 관념으로 정의될 수 없다. 기실, 『윤리학』의 제 3부 전체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상반되는 정념의 “양가성(ambivalence)”에 대한 한 편의 긴 논의가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동요하는 정신”(즉 같은 대상이나 유사한 대상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정념을 갖게 되는 것: E3P17S)과 ‘희망과 공포의 동일성’(즉 타인에게 자신의 무능력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희망과 같다: E3DA13Exp)에 관한 주장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스피노자의 반-경험주의적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공통의 통념의 적합함의 원천을 그것의 육체적인 측면에서 찾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보편적 통념”의 추상성을 그것의 물리성(Physicality)의 결여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일을 말이다. 반대로 물리성의 결여(즉 관념과 대상의 불일치)란 보편적 통념의 추상성(즉 관념의 진실로서의 성질과 내적인 지표의 결여)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결과가 아닌가?

     『지성향상론』의 종결부에서 스피노자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연쇄”(TdIE100)라는 매우 낯선 관념을 제안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진화”라는 글의 한 각주에서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것들”을 속성들과 무한 양태들이 아닌 공통의 통념들과 동일시한다. 이 점에 관한 스피노자 자신의 몇몇 구절들을 읽어보자.


우리는 항상 모든 우리의 관념을 물리적인 것들이나 혹은 실제적 존재들로부터 연역해야만 한다. 가능한 한 원인들의 연쇄를 따라 하나의 실제적인 존재로부터 또 다른 실제적인 존재로 추상들이나 보편적인 것들로 넘어가지 않는 그러한 방식으로 말이다. (TdIE99)


그러나 원인들과 실제적 존재의 연쇄라는 것을 나는 개별적이고 변화하기 쉬운 사물들의 연쇄가 아니라 단지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연쇄로 이해한다. (TdIE 100)


진정 이러한 개별적이고 변화하기 쉬운 것들은 […] 그것들이 없다면 존재할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는 고정된 사물들에 밀접하게 의존한다. 그래서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은 개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천에 널려있는 그것의 존재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확장적인(extensive) 역능 때문에,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개별적이고 변화하기 쉬운 것들의 정의(definition)의 보편들이나 일반류들(genera)인 듯 보이고 모든 사물들의 가까운 원인(proximate cause)인 것처럼 보인다. (TdIE101, 강조는 인용자)   


확실히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과 들뢰즈가 “공통의 통념”으로 정의한 것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 특히 추상성(보편성)과 물리성 사이의 대립이 눈에 띈다. 비록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는 표현이나 “지천에 널려있는 그것의 존재”라는 표현은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을 속성들과 무한 양태들로 보이게 만들지만, 들뢰즈는 “여기서 속성들과 무한 양태들은 변화하기 쉬운 개별적 사물들에로의 그것들의 적용이라는 정확한 의미에서만 개입”하며, 따라서 그것들이 여기서는 단지 “공통의 통념으로서”만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한다(SPP, 120~21). 이로부터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은 『윤리학』의 공통의 통념을 예상한다는 그의 주장이 따라나온다. 그러나 진정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그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은 진정 공통의 통념의 예상인가? 아니면, 차라리 공통의 통념 안으로 『지성향상론』의 그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을 투사하고 있는 들뢰즈의 해석을 표현하는 것인가? 그 어떤 경우이든, 들뢰즈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두 텍스트간의 모종의 연속성을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따라서 단절이라기 보다는 “진화”가 어울리게 된다).

     여전히, 수수께끼는 남는다. 즉,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이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보편들이나 일반류들인 듯 보인다”고 말할 때 스피노자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관한 논의를 한 후 그는 곧 『지성향상론』의 집필을 중단하고 그것을 미완성인 채로 놔둔다. 그렇다면 이것은, 들뢰즈가 주장하듯이, 스피노자가 마침내 공통의 통념(비록 그것을 그렇게 부르진 않았다고 할지라도)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지성향상론』을 다시 쓰는 것이 필요해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스피노자가 결국 하나의 불가능성(impasse)에 봉착했으며, 그리하여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사고하고 다시 가공하는 것이 필요해졌다는 뜻일까?


     2. 알튀세르의 설명: 제 3종의 인식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1985; 이하 UTM)13)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라는 두 명의 철학자에 관해 쓴다. 그는 스피노자에 관한 첫 번째 장에서 세 가지 인식의 종류들을 논한다. 그에 따르면, 제 1종의 인식, 즉 상상은 우리가 즉시 스스로를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생활세계(Lebenswelt)” 그 자체다. 알튀세르는 『윤리학』 제 1부의 부록을 원용하면서, 상상은 “(인간) 주체를 모든 지각과 행동, 목표, 그리고 의미의 중심과 기원에 두지만, […]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이처럼 사물의 실제 질서를 전도시키는데, 왜냐하면 사물의 실제 질서는 원인들의 유일한 결정에 의해 설명[…]되기 때문이”(UTM, 154,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생활세계는 하나의 ‘주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않고 오직 전도의 “장치” 안에서만 경험한다. 그리고 나서 알튀세르는 더 이상 제 2종의 인식, 즉 이성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제 3종의 인식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나중에 왜 그가 제 2종의 인식에 관한 논의를 완전히 생략하는지의 놀라운 이유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의 제 3종의 인식에 관한 사고들을 따라가 보자.

     알튀세르는 제 3종의 인식이 모호하고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하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amor intellectus Dei)’과 ‘지복(至福, beatitudo)’에 관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3종의 인식에 관한 어떠한 구체적인 예도 사실상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매우 예외적인 예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학-정치학 논고』에 등장하는 유태인민의 개별적인 역사라는 사례다. 그는 이 “사례(case)”를 동시에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인 어떤 것이라고 특징짓는다. 그는 모든 사례들이 개별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인정하지만, 만일 개별적인 사례가 그 자체로 동시에 보편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문제고 파문이 인다고 말한다(UTM, 157). 진정, 이것은 스피노자가 『지성향상론』의 끝에서 마주친 것과 같은 역설이 아닌가? 즉,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이라는 역설 말이다. 알튀세르는 계속해서, 만일 개별적인 사례가 그 자체로 보편적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 사례에 관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면(왜냐하면 ‘보편적인 것’ 없이는 그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므로), 경험들에 의한 이론의 검증가능성(칼 포퍼(Karl Popper)는 이를 ‘과학’의 기준으로 만들었다)이라는 실증주의적 질문은 그 자체로 무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이론이란 그 아래로 모든 개별적인 사례들이 포섭되어야만 하는 어떤 “보편적인” 이론들이 아니라 사실 스스로가 그만큼의 많은 사례들에 불과한 “개별적인” 이론들이기 때문이다.14)

     그러나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인 “사례”라는 것은 무엇인가? 알튀세르 자신이 이 질문을 던진다: “결코 “동일한 사례”를 만나지 않으며, 항상 그리고 오로지 개별적이고 따라서 상이한 “사례들”만 만난”다면, “어떻게 거기서 일반적인, 즉 추상적인 인식들을 끌어낸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UTM, 158) 여기서 그는 개별적-보편적 사례들이라는 스피노자적 쉐마를 “부정”과 “매개”라는 수단에 의해 작동하는, 개별성, 보편성, 특수성에 관한 헤겔적인 쉐마로부터 조심스럽게 분리한다. 이러한 개별적-보편적 사례들이라는 스피노자적인 쉐마는 순수하게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즉,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의 직접성, 즉 일종의 “단락(short-circuit)”(발리바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확히 질문은 여기-지금-이-나무의 개별적인 본질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 그것은 여기-지금-이-나무(헤겔적 즉자)를 인식하는 문제도 아니고 보편적인 “나무”의 실현되거나 특수화된 형태(“떡갈나무, 너도밤나무, 양자두나무, 배나무 따위”)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난해한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 우리가 재검토해야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공통의 통념”이다.

     스피노자가 보편적 통념으로부터 공통의 통념을 구별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보편적 통념은 말들과 이름들에 관련된다: “인간, 말, 개, 등 저들이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저 통념들은 […] 그렇게 많은 이미지들(예컨대, 인간의)이 인간의 육체 안에 한꺼번에 형성되어서 상상의 역능을 능가하기 때문에 나온다. […] 육체는 [NS: 강력하게] [공통된 것]에 의해 가장 많이 변용되는데, 각각의 개별적인 것이 그것을 [이러한 성질에 의해] 변용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NS: 정신은] 이것을 인간이라는 에 의해 표현하고 그 말을 무수히 많은 개별자들에 대해 서술한다(predicate).”(E2P40S1, 강조는 인용자) 그러므로, 보편적 통념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상상의 역능”의 제한된 능력으로부터 결과된다. 즉,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 육체의 개별적이고 상이한 변용들을 유사성에 따라 하나의 이름 아래 모으는 방식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통념은 개별적인 사물들을 류와 종으로 나누는 분류의 체계에 다름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사물들의 분류가 오로지 우리 육체의 변용들의 효과들결과들에 대해서만 수행된다는 점이다(즉, 그것은 효과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서 진행한다). 공통의 통념들 또한 개별적인 사물들의 분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차이점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공통의 통념의 분류라는 것은 효과가 아닌 원인들에 대해서 행해진다는 사실이다.15) 그리고 이 원인은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고 항상 이미 어떤 종류의 “이론적 해명”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 통념이 결과들의 보편성에 의존한다면, 공통의 통념은 (이성의 작업들을 통해 식별되는) 원인들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 구별은 핵심적이다. 적어도 스피노자의 『윤리학』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보편성이 있다(나는 ‘적어도’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예컨대, 존재, 사물, 어떤 것이라는 신의 속성들에 관한 혼란스런 관념에 관계된 “초월적” 통념들이라는 범주가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구별 위에서만, 우리는 왜 공통의 통념이 보편적 통념과 달리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원인들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원인들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공통의 통념은 정신의 ‘수동(passion)’이라기 보다는 ‘능동(action)’의 토대이다. 우리는 공통의 통념의 보편성을 ‘실제적인 혹은 진정한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보편적 통념의 그것을 ‘상상적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주의 내로의 경험주의의 수입 및 공통의 통념의 물리성에 대한 과잉강조는 모두 이러한 결정적인 구별에 대한 무지/무시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공통의 통념을 원인들의 보편성에 관한 인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지성향상론』과 『윤리학』의 단절의 급진성을 측정하기 시작할 수 있다. 『지성향상론』은 기본적으로 방법론에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방법론의 기원을 지성의 “향상” 과정 속에서 관념들 그 자체로부터 전진적으로만 구별되어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에 의한 방법론의 기원에 대한 인식은 명백히 데카르트의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은 그가 데카르트주의로부터 단지 한 발자국만을 벗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혼란은 정신이 하나의 전체이거나 많은 사물들로 구성된 사물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고, 모르는 것으로부터 아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귀결되므로 […], 이로부터 첫 째, 만일 관념이 어떤 가장 단순한 것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명석판명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따라나온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로서 알려지게 되거나 혹은 전혀 알려지지 않아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 째, 만일 사유 안에서 우리가 많은 사물들로 구성된 사물을 그것의 모든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나누고 이들 각각을 분리해서 관찰한다면 모든 혼란은 사라질 것이다 … (TdIE63 and 64)


여기에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로부터의 한 귀절을 함께 놔보자.


두 번째 [주된 방법론은] 내가 시험하는 각각의 곤란들을 가능한 한 많은 부분들로 나누고 그것을 더 잘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 나누는 것이다. […] 기하학자들이 가장 어려운 증명들에 도달하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매우 단순하고 쉬운 추론으로 구성된 이들 긴 사슬들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인식 하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은 똑 같은 방식으로 상호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하게 하곤 했다.16)


우리가 볼 수 있듯,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양자 모두에게 있어 명석판명한 관념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혼란되고 복잡한 관념을 “그것의 모든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나누어 나가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질문이 따라나온다. 혼란된 관념을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단순히 나누는 이러한 과정이 왜 우리를 명석판명한 관념으로 필연적으로 이끈다고 가정될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나눔의 방법론은 정확히 효과들이나 결과들의 분류법이라는 방법론이 아닌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자신의 저서 『날것과 익힌 것』에서 한 번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방법론의 부적합함에 관해 비판한 적이 있다(물론 이러한 비판은 데카르트 자신에게 만큼이나 스피노자 자신에게도 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화들의 연구는 방법론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필요한 만큼 많은 부분들로 곤란을 나누어나가는 데카르트적 원칙에 따라 그 연구가 행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신화학적 분석에는 어떤 실제적인 끝이 없고 그 나눔의 과정이 종결됐을 때 움켜쥘 숨겨진 단위(unity)도 없다. 테마들은 무한하게 갈라질 수 있다.”17) 요컨대, 우리가 혼란된 관념을 얼마나 잘게 자르던 간에, 우리는 결코 어떤 단순한, 즉 명석판명한 관념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다시 또 다른 혼란스런 관념만을 만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나눔의 과정은 기껏해야 결과들의 분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여기서 더 나아가서 모든 혼란스런 관념들은 사실 그만큼의 “신화”들이며 우리가 그 원인에 대해 무지한 최종생산물, 효과, 결과로서의 신화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방법론의 질문은 또한 “관념의 관념(an idea of an idea)”으로서의 ‘확실성’의 질문이기도 하며, 따라서 그것은 진리의 기준이라는 질문이다. 비록 진리의 기준은 그 초기적인 단계에서 진실한 관념들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기 힘들지만, 그것은 지성향상의 과정을 통해서 특정한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지성향상론』에서 스피노자는 방법론을 “반성적 인식(Reflexive Knowledge)”과 동일시한다: “이로부터 방법론이란 반성적 인식 혹은 관념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추론될 수 있다.”(TdIE38,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자기-반성으로 정의된 방법론은 또한 의식이기도 하다.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오류를 가장하기(feigning)라는 질문(예컨대, ‘지구는 평평하다’가 잘못된 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상상하거나 말하기)에 관해 논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즉 “우리는 먼저 우리가 때때로 오류를 범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오류를 의식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가장할 수 있다.” (TdIE56, 강조는 인용자). 만일 누군가가 이 구절을 놓고 그것이 윤리학의 다음과 같은 정리와 실제로 같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오류는 부적합하거나 잘려져 있거나 혼란스런 관념들이 포함하고 있는 인식의 결핍 속에서 구성된다.”(E2P35) 『지성향상론』과 『윤리학』의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정확히 지적 과정의 순서의 정식화에 관련된다. 『지성향상론』에서 우리는 이렇게 진행한다. 먼저 우리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그 오류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성한다; 그 다음 우리는 그렇게 알려진 오류를 우리의 다른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예컨대, 과거로부터의 오류를 기억하는 일이라든지 또는 타인들의 같은 오류를 묘사한다든지 따위). 『윤리학』은 반면 앞에 인용된 그 정리를 선행하는 또 다른 정리가 있다. 즉 “관념 안에는 그것에 의해 그 관념들이 잘못이라고 불릴만한 그 어떤 긍정적인 것도 없다.”(E2P33)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진행한다. 우리는 먼저 혼란스런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아직 오류로 규정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혼란스런 관념을 가공한다; 그 결과 우리는 적합한 관념이나 진실한 관념을 획득한다; 이제 이러한 진실한 관념에 의해 우리는 혼란스런 관념을 긍정적으로 오류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출발점은 오류나 잘못이 아니라 그 자체 제 1종의 인식이라고 불리는 “상상”인 것이다.18) 여기서 우리는 『지성향상론』과는 달리 오류에서 진리로 진행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류는 진리들 그 자체의 생산의 결정적 효과이다. 이로부터 “진리는 자기 자신과 오류 양자 모두의 기준이다”(E2P43S)라는 저 유명한 테제가 나온다.19) 『지성향상론』과는 달리 『윤리학』에서 “반성적 인식”이라는 것은 완전히 사라진다.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윤리학』에서 관념의 관념 및 확실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의식적 반성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증명”의 문제, 즉 “비-의식적인” 지적 노동의 문제가 된다. 즉, 진리의 생산 과정은 이제 “주체 없는 과정”인 것이다.20)

     우리는 『윤리학』에 두 종류의 보편성이 있다고 말했고 공통의 통념은 효과가 아닌 원인들의 보편성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통의 통념들은 여전히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설사 적합한 관념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개별적 사물들의 본질들(즉, 지금-여기-이-나무의 본질!)에 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들뢰즈가 공통의 통념의 이행과정에 관해 논할 때, 그가 이론적인 해명의 순서라는 측면에서의 가장 큰 보편성으로부터 가장 적은 보편성으로의 이행이 또한 왜 우리의 인식의 역능을 증가시키는 과정일 수 있는지에 관해 어떤 적절한 설명도 주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모든 육체들로부터 형성되는 “최대의” 공통의 통념들이 ‘가장 희박한 보편성’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는 심지어 그것이 단순한 몇 개의 보편적 관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원인들의 보편성의 인식이며, 사실은 ‘공통원인’으로서의 신의 속성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제 3종의 인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제 3종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길의 출발점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제 3종의 인식은] 신의 특정한 속성들의 형식적 본질에 대한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사물들의 [NS: 형식적] 본질의 적합한 관념으로 나아간다.”(E2P40S2) 물론 질문은 ‘어떻게?’이다.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에서 제 3종의 인식에 관해 논하면서 알튀세르는 오로지 개별성들만이 있고 실제로 개별적이지만 보편적인 개별성들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개별성들이 동시에 보편적인 것은 마치 “반복적 불변수들(invariants répétitives)”이나 “상수들(constants)”이 그 개별성들을 “관통하고 그것들에 붙어다니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들이 물리학의 법칙처럼 어떤 증명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불변수들은 개별성들의 형태에 관한 논의에 특정한 “지표”를 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들은 “일반적”이지 않고 “총칭적(generic)”이다.(UTM, 158~9)

     반드시 알튀세르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와 마찬가지로 ‘개별적-보편’의 개념을 가공하려고 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설명을 여기서 참조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21) 『날것과 익힌 것』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내가 지금부터 참조신화(key myth)로 부르고자 하는 보로로(Bororo) 신화는 내가 보여주려고 시도할 것처럼 단순히 같은 사회, 혹은 이웃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에서 기원하는 다른 신화들의 다소간의 변형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출발점으로 그 그룹의 대표적인 신화의 어떤 것이라도 정당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참조신화는 그것이 전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그룹 내에서의 불규칙한 위치 때문에 흥미롭다.22)


 놀랍게도 여기서 “보로로 신화”는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제 3종의 인식의 예(즉 유태민족의 개별적 역사)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비록 “참조신화”는 다른 신화들에 대해 어떤 특권도 갖지 않는 단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마치 다른 신화들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동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이 “전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이웃하는 신화들의 변형들이 합류하는 독특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이는 정확히 알튀세르가 불변수들이나 상수들은 “일반적”이지 않고 “총칭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이다. 물론 질문은 ‘어떻게 단지 하나의 신화(비록 몇 개의 다른 신화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라고 하지만)에 대해 작업하고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불변수와 상수들을 뽑아냄으로써 다른 모든 신화들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지는가’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대답은 결정적이다.


만일 비평가들이 나에게 남아메리카 신화들을 분석하기 전에 그것들의 완전한 발굴을 수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조롱한다면 그들은 이러한 문서들의 본질과 기능에 관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주어진 공동체에 속하는 신화의 총체(total body)는 그 공동체의 말(speech)과 비교할만하다. 인구가 실제로든 도덕적으로든 다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이러한 총체성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당신은 또한 언어가 생긴 이래 발음된 단어들의 총목록을 작성하지 않은 채, 또 그 언어의 실존의 미래 안에서 무엇이 말해질 것인지를 모르는 채 언어의 문법을 수집(compile)했다는 것에 관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언어학자가 자신이 이론상으로 수집할 수 있었던 문장들[…]에 비해 놀랍도록 적은 수의 문장들로부터 주어진 언어의 문법들을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심지어 부분적인 문법이나 혹은 개요적인 문법도 우리가 모르는 언어들을 다룰 때는 소중한 수확이다. 구문은 단지 (이론적으로 무한한) 사건의 연쇄가 기록되거나 시험된 후에만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그 사건들의 생산을 지배하는 규칙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23)


신화와 언어의 총체는 항상적으로 변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대상들은 살아있고 여전히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일반화나 나눔의 방법론을 통해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사례들” 안에서 발견되는 불변수들 혹은 상수들은 이론적인 도구로 작동할 수 있는데,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알려져 있거나 그렇지 않은 무한히 많은 다른 “사례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것들이 최종-생산물이나 결과들로서의 신화들 그 자체를 지배하는 규칙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을 지배하는 규칙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효과나 결과들의 보편성이 아니라 원인들의 보편성인 것이다. 바로 “공통의 통념들”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신의 속성들의 형식적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개별적인 사물들의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통의 통념들이 비록 그 숫자 상으로는 제한되어 있을지라도(즉 가장 희박한 보편성이라고 할지라도) 개별적 사물들의 그 모든 “생산”을 지배하는 원인들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2종의 인식은 그 자체로는 제 3종의 인식에 “전제”들을 마련해줌으로써 “전제 없는 결론”(E2P28Dem)으로서의 상상적 보편성에 대항해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제 2종의 인식은 인식의 진정한 과정의 출발점에 우리를 데려다 준다. 그리고 개별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하는 “진정한” 인식으로서의 제 3종의 인식은 그 자체가 실천인 인식24)(이것이 바로 왜 스피노자가 그의 저서를 “윤리학”이라고 명명했는지의 궁극적인 이유이다)인 것이다. 마치 제 1종의 인식처럼 말이다. 단 하나의 차이는 제 3종은 제 1종의 전화되거나 “치유”된 인식이라는 점이다. 제 2종의 인식은 그렇다면 제 1종과 제 3종 사이의 “단절”을 생산하는 이론적인 개입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이 왜 알튀세르가 제 1종의 인식을 “생활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한 후에 제 2종의 인식에 대한 논의를 거의 제로로 압축시키면서(그는 집약적으로 그것이 “원인”에 관련된다고만 지적한다) 막바로 제 3종의 인식에 대한 논의로 넘어갔는지의 이유이다. 제 2종의 인식은 실로 이데올로기적인 실천들로부터의 “단절”이면서 동시에 그것들 내로의 “재기입”이 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프로이트 그 자신이 우리에게 이러한 ‘기적’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는 무의식은 아주 빈약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진실과 동시에 매우 단순한 어떤 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뜻은 무의식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아주 빈약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설명에서 열거되었던 아주 적은 수의 요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아주 단순하다. 실은 이 기초적 요소들은 두 손의 손가락들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아주 제한되어 있다. 무의식의 기초적 요소들이 아주 단순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무의식과 나의 무의식이 단순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들은 아주 비상하게 복잡하다. 그것들의 복잡함은 이 단순한 요소들(이것들 각자는 프로이트가 ‘정동(affect)’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수준의 강도를 가질 수 있다)이 결합되는 방식에 기인한다. 정동이 0에서 ∞까지 변할 수 있음을 알 때, 가능한 결합들이 무한하고, 또 따라서 무한히 가변적임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무의식도 다른 무의식과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25)


무의식의 이러한 “요소들”은 불변수들 혹은 상수들이다. 숫적으로 적지만 그것들은 무한수의 결합을 생산해내고 그 각각의 결합은 그만큼의 “비슷하지 않은” 개별성이 된다. “신성한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것들이 무한한 양태로 따라나온다 (즉, 무한한 지성하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E1P16)라고 스피노자가 말했을 때, 그가 프로이트, 알튀세르가 보고 있던 바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프로이트(및 알튀세르)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여기서 모두 보고 있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이다. 사실 제 3종의 인식은 과잉결정된 개별성들, 즉 사건들의 열려있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전들에 대한 인식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의 무한한 본질과 그의 영원성이 모두에게 알려진다는 것을 본다. 모든 사물은 신 안에 있고 신을 통해서 인식되므로, 우리는 이 인식으로부터 우리가 적합하게 알고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연역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제 3종의 인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따라나온다.”(E2P47S, 강조는 인용자)

     알튀세르는 스피노자를 “마주침의 유물론”의 전통 안에 포함시켰다. 자연 안에 어떤 공백도 허용하지 않고(“명석한 이성이 무오류적이라는 것을 아는 모든 자들, […] 특히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E1P15S)) 또한 우연적인 것의 관념을 혐오했던 철학자를 파르메니데스적 전통이 아닌 에피큐로스적 전통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스피노자 안에 무한수의 속성들 사이의 구조적인 마주침들이라는 “한계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렇게 쓴다.


나는 스피노자에게는 철학의 대상이 공백이라는 테제[…]를 주장하고자 한다. […]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또는 전체에서, 또는 유일독특한 실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전체와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체 외부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이 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일독특하고 무한한, 무한한 수의 무한한 속성들을 갖추고 있는, 절대적 실체이다. […] 우리는 연장과 사유[사고]라는 두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사유에 대하여 욕망에 있어 사유되지 않은 그 역능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신체에 대하여 그 모든 역능들을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속성들, 수적으로 무한한 이 무한한 속성들이 모든 가능한 것들과 불가능한 것들을 덮어 숨기기 위해 거기에 있다. 이 속성들이 수적으로 무한하며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 이 속성들의 우발적인 형상들에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이 속성들이 평행하며 이 속성들에서는 모든 것이 평행의 효과라는 사실이 에피큐로스의 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속성들은 오직 이 예외적인 평행 속에서만 서로 마주칠 수 있는 빗방울들처럼 자신들의 결정의 빈 공간 속으로 떨어진다. […] 요컨대 그것은 마주침 없는 평행, 그렇지만 각 속성의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관계 바로 그것의 구조상 이미 그 자체로서 마주침인 평행이다.26)


나는 알튀세르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실체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유한자들로서의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실체에 대한 “인식”은 항상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단지 어느 정도까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알튀세르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신의 속성들 가운데 단지 두 가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 두 가지 이외에 그렇게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하는가? 확실히 『윤리학』 이전에 그것들은 거기에 없었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글의 도입부에서 말브랑슈가 던진 질문을 인용한다. “왜 바다에, 큰 길에, 사구(砂丘)에 비가 오는지?” 만일 그 비가 바다에 아무 것도 보태줄 수 없다면, 왜 비는 거기에 내리는가? 그것은 단지 떨어질 뿐이다. 목적도 없이. 마치 스피노자의 속성들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수의 속성들이 자연 안으로 목적 없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리학』의 근본질문이다. 알튀세르는 그것들이 실체를 우리로부터 숨기기 위해 거기 있다고 말한다. 실체가 우리에게 폭로된다면, 그것은 언제나 모든 것이 폭로되는 것은 아니라는 조건하에서, 즉 어떤 것이 어둠 속에 항상 아직 남아있게 된다는 조건하에서 폭로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왜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그 절대적 현전(Presence)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결코 “현전”으로 결정될 수 없는지의 이유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항상 우리는 우연한 것들을 보게 된다. 우리가 몇몇의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질에 관한 다소간 적합한 관념을 획득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어떤 ‘섬뜩한’(unheimlich, 프로이트) 것들을 마주친다. 따라서, 다시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실체에 대한 양태들의 항상적인 과잉이 있다. 이러한 과잉은 그러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어떤 균열 때문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무한한 구조적 다면성의 “표상불가능성”(윤소영)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알튀세르는 “그 자체로 마주침인 것”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러저러한 “사례”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또 다른 사례에 대한 지식으로 “직관적”으로 진행하면서 말이다.


     3. 결론: “과정(process)”으로서의 제 3종의 인식


     발리바르는 「『윤리학』에서의 “의식/양심”에 관한 노트」라는 글에서 제 2종의 인식은 비-의식적인 것이지만 제 3종의 인식은 다시 “의식/양심”에 관련된다고 주장한다.27) 사실, 스피노자는 『윤리학』 5부의 후반부에서 제 3종의 인식을 논하면서 지속적으로 “의식한다(conscius)”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제 2종의 인식을 논할 때 사용되지 않은 것이었다(E5P31S, P34S 및 P39S를 보라). 발리바르에 따르면, 제 5부에서 설명되는 바의 제 3종의 인식의 항은 “네 가지 “대상들”(정신, “그것의” 육체, 신, “사물” 일반)”로 구성된다. 그리고 바로 저 두 번째 대상(즉, 정신 자신의 육체)으로 인하여 “의식하다”라는 용어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이렇게 정의된 제 3종의 인식은 결코 ““고정된” 관념이나 개별관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말을 읽어보자.


많은 것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육체를 가진 자는 악한 정동에 의해(IVP38에 의해), 즉 (IVP30에 의해), 우리의 본질에 반대되는 정동들에 의해 가장 덜 곤경에 빠진다. 그래서 (P10에 의해) 그는 그의 육체의 변용들을 지성의 질서에 따라 질서짓고 연결할 수 있는 역능을 갖고 결과적으로 (P14에 의해) 육체의 모든 변용들이 신의 관념에 관계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역능을 갖는다.(E5P39Dem, 강조는 인용자)


이 구절을 읽고,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구절이 또한 제 5부에서 제 3종의 인식에 대한 논의가 출현하기 전에 이미 나왔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5P10S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변용들을 올바르게 질서 짓고 연결하는 역능에 의해 우리는 악한 정동들에 의해 쉽게 변용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제 2종의 인식에 관련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P10S의 나머지 부분이 이를 보여줄 것이다.


(P7에 의해서) 지성의 질서에 따라 질서지어지고 연결된 정동들을 제약하는 것이,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정동들을 제약하는 것보다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동에 대해 우리가 완벽한 인식을 갖지 않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살아있는 혹은 확실한 생활의 금언이라는 올바른 원칙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단단히 기억시키며 그것들을 우리 삶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특수한 사례들에 항상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은 그것들에 의해 상당히 변용이 되고 우리는 항상 그것들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 2종의 인식에 특정한 고정성(fixity)이 따라붙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거의 좋은 습관의 형성을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습관이란 항상 외적인 고정(extrinsic fixation)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금언”이라는 말 앞에 “살아있는”이라는 형용사를 위치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이러한 고정성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 2종의 인식이 사례들로부터 다른 사례들로 끊임없이 움직인다기 보다는 보편적인 금언들을 특수한 사례들에 적용시킴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 제 3종의 인식에 관련된 P39S는 상당히 다른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항상적인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가 더 낫게 더 나쁘게 변화함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개별적인 사물들(알려져 있는 몇몇이 있지만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과의 항상적인 마주침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변용시키는 수없이 많은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끝없는 분석”(프로이트)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은 언제나 “변화에 대한 변화”로서만, 혹은 차라리 (상상 속에서 자신들의 실천을 축적하여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적분적 주체’가 아닌) “변화에 대한 미분[적 주체]”로서, 그 변화들에 작용하는 변화로서 우리의 실천을 조직해 나가야만 한다.28)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듯, 제 3종의 인식은 결코 “고정된 관념”이나 “개별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육체의 변용의 원인들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드는 하나의 “과정”일 수 있을 뿐이다.

     다시 『지성향상론』의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보자. 나는 여기서 스피노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공통의 통념이라기 보다는 제 3종의 인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항상 모든 우리의 관념을 물리적인 것들이나 혹은 실제적 존재들로부터 연역해야만 한다. 가능한 한 원인들의 연쇄를 따라 하나의 실제적인 존재로부터 또 다른 실제적인 존재로 추상들이나 보편적인 것들로 넘어가지 않는 그러한 방식으로 말이다.”(TdIE99, 강조는 인용자) 그러나 원인들의 연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윤리학』의 제 3종의 인식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실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이라는 관념은 『지성향상론』에서 스피노자가 마주쳤던 바로 그 곤란을 표현한다. 그가 “원인들과 실제적 존재의 연쇄라는 것을 나는 개별적이고 변화하기 쉬운 사물들의 연쇄가 아니라 단지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연쇄로 이해한다”(TdIE 100)고 말할 때, 그는 제 3종의 인식 앞에서 주춤거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거나, 혹은 제 2종의 인식의 최대이자 제 3종의 인식의 출발점인 신의 속성들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별적-보편적 사례라는 역설을 풀지 않고 스피노자는 『지성향상론』을 계속 집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지성향상론』 안에는 바로 제 3종의 인식이 완전히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윤리학』에 이르러서였던 것이다.

     제 3종의 인식은 『윤리학』의 대상 그 자체였다. 이를 “가공함”(process-ing)에 의해서 스피노자는 그 자신이 제 3종의 인식의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 사이의 일치(union)는 그 자신의 결론이 되었다.


1) Malebranche, Entretiens sur la métaphysique, IX, Paragraphe 12.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서관모․백승욱 편역, (새길, 1996), 35쪽에서 재인용.


2) 앞의 책, 35~92쪽


3) Spinoza,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 I, Edwin Curley(ed. & tr.),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pp. 408~617. 스피노자의 텍스트에 관련된 이 글의 모든 약자들은 커를리의 것을 따른다.


4) 스피노자 사후 출판된 1677년 네덜란드어 판본인 De Nagelate Schriften van B. D. S. 삽입구절을 말하는 약자다.


5) Op. cit., pp. 7~45.


6) Gilles Deleuze, "Spinoza's Evolution",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Robert Hurley(tr.),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pp. 110~121.


7) 『지성향상론』은 제 2종의 인식(혹은 그것에 해당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또 다른 사물로부터 하나의 사물의 본질이, 그러나 부적합하게, 추론될 때 우리가 갖는 지각(Perception)이 있다. 이것은 어떤 효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할 때 발생하거나, 또는 무엇인가가 어떤 성질을 항상 동반하는 어떤 보편(Universal)으로부터 추론될 때 발생한다.”(TdIE19, 강조는 인용자)


8) 그렇다면, 이러한 이론적인 상황이 제 3종의 인식에 관한 논의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것은 제 2종의 인식과 제 3종의 인식 사이에 하나의 완전한 단절을 위치시킴으로써 제 3종의 인식이란 기본적으로 그노시스적이고 카발라적인 전통에서 등장하는 비교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지혜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해석을 정당화시켜왔다. 니체가 나중에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면서 미학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를 전개할 때 그 안에서 이러한 낭만주의적인 경향의 반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피노자』, (공감, 1996), 185쪽을 참조하라.)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렵다”(E5P42S)는 윤리학의 마지막 구절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해석적 경향은 텍스트와 독해의 질문에 관한 스피노자 자신의 입장을 배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고립분산적인 문장들에 의해 “외적으로 결정된” 독해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 내에 발견되는 “다수의 것들의 일치점, 차이점, 대립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을 동시에”(E2P29S) 내적으로 인식하는 독해를 스피노자 자신의 텍스트들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9) 원래 여기서 “조우”(encounter)라는 것은 “마주침”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마주침”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싣고 있는 만큼 구별을 위해 들뢰즈의 경우에는 “조우”라는 말로 번역한다.


10) 소산적 자연 내에서의 들뢰즈의 이러한 육체에 대한 강조는 능산적 자연 안에 그것의 맞대응물을 갖는데, 그것은 다른 속성들에 대한 사유라는 속성의 우위라는 그의 사고다. Deleuze,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Martin Joughin(tr.), (New York: Zone Books, 1992), 특히 제 7장을 보라. 이러한 그의 입장은 궁극적으론 정신-육체의 이원론을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더욱 확장된 존재론적 규모에서 도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더욱 중요하게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두 수준의 일정한 분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는 이렇게 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저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의 실체가 아니라 유한한 양태들의 구성이었습니다. 나는 이를 내 책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즉, 유한한 양태들 위에서 실체가 회전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실체 안에서 유한한 양태들이 작동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보려는 희망이 이 책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Op. cit., p. 11) 이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미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스피노자에게는 실체와 양태 사이에 실제적인 틈이 있으며, 이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들뢰즈 자신이 그렇게 할 것처럼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를 전도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의 “리좀(rhizome)”에 관한 이론은 바로 이러한 전도로부터 나오는 것 같고 그것의 이론적인 결과는 바로 일자(一者)와 다자(多者)라는 문제설정의 기각이다. “이것은 일자와 다자(the Multiple)가 아니라 일자와 다자 사이의 어떤 대립도 효과적으로 넘어서는 융합적 다양체라는 문제다. 그와 같이 실체의 존재론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실체적 속성들의 형식적 다양체 말이다. 하나의 개별적 실체 하에 모든 속성들, 혹은 강렬도의 류(genus)들의 연속(continuum)이 있고 개별적인 유형 혹은 속성 하에 특정한 류의 강렬도들의 연속이 있다. 강렬도 안에서의 모든 실체들의 연속과 실체 안에서의 모든 강렬도들의 연속 말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Brian Massumi(tr.), (Minnesota: University of Minnesota, 1987), p. 154). 그러나 적어도 “모든 속성들의 연속”이라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선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11) 비록 『지성향상론』에 나온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일반적으로 존재가 인식될수록 또한 더욱 혼란스럽게 인식되며 아무 것에나 허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반대로 그것이 더욱 특수하게 인식될수록 더욱 명석하게 인식되며 우리가 심지어 자연의 질서에 주의하지 않을 때조차 그 사물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도 허구적으로 그것을 적용하기 어려워진다.” (TdIE55)


12) 더욱이 어떻게 우리가 속성들의 개별적인 본질들의 관념인 신의 관념으로부터 “실존하는 양태들”의 개별적인 본질들에 관한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설명이 들뢰즈 안에는 없다. 그는 스피노자가 이미 말한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반복할 뿐이다. 심지어 그의 『스피노자: 실천적 철학』의 제 4장 “『윤리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색인”에 나타나는 “인식 (그 종류들)”이라는 항목에조차 제 2종에서 제 3종으로의 이행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진정한 설명이 없다. 들뢰즈는 단순히 제 3종의 인식이 제 2종 안에 형상원인(causa fiendi)를 갖는다고 덧붙이고, 신의 관념이 “이러한 [제 2종의 인식의] 새로운 관점 하에 우리로 하여금 제 3종으로 이행하도록 강제한다”(SPP, 83)고 말할 뿐이다. 여전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관해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제 3종의 인식은 엄격히 말한다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발견되는 것”(SPP, 83)이라고 말할 때, 그는 제 3종의 인식을 미스테리 속에 남겨두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비교주의적 지혜라는 오래된 테마로 복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가 제 2종과 제 3종 사이에 완전한 단절을 상정하진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3) 알튀세르,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 『철학과 맑스주의』, 145~205쪽.


14) 그리하여 맑스의 역사과학과 프로이트의 역사과학(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란 개인들의 정신적 장치들의 개별적인 역사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이 정당화될 수 있다. 칼 포퍼의 이론적 공격의 두 주된 타겟이 맑스와 프로이트의 이론들, 즉 그것들의 궁극적인 대상이 ‘개별적인 정세’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이론들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5) 스피노자는 E2P40의 증명에서 “인간 정신 내의 어떤 관념이 인간 정신 내의 적합한 관념들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때, 우리는 […] 신성한 지성 안에는 신이 그 원인인 관념이 있다는 것 이외의 어떤 말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한 뒤, 곧바로 이어지는 주석에서 “이로써 나는 공통되다고 불리는 통념들의 원인을 설명했다”고 말하면서 이를 초월적 통념 및 보편적 통념으로부터 구별한다.


16) Descartes,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 vol. I, J. Gottingham, R. Stoothoff, and D. Murdoch(t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120.


17) Lévi-Strauss, The Raw and the Cooked, John and Dorren Weightman(tr.),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9), p. 5. 이 글에서의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논의를 관해서, 나는 자크 데리다의 훌륭한 설명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Jacques Derrida, "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the Human Sciences", Writing and Difference, Alan Bass(t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78), pp. 278~93을 보라.


18) 스피노자는 이 점에 관해서 아주 명료하다. “그리고 여기서, 오류가 무엇인지를 지시하기 시작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이 마음의 상상들은 그 자체로 고려되었을 때 어떤 오류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마음은 그것이 상상한다는 사실로부터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했으면 좋겠다.”(E2P17S) 그리고 『지성향상론』이 “인식”이 아닌 “지각들(Percep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의 종류에 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이 텍스트는 “인식(knowledge)의 종류”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지만 이 표현은 단지 “오직 본질을 통한 지각”이라는 것에만 적용된다(TdIE22). 사실 “인식”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지각에만 배타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법은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제 2종의 인식에 해당하는 인식을 『지성향상론』은 “부적합한” 인식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19) 『지성향상론』에도 또한 비슷한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리는 스스로를 명시한다”(TdIE44)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윤리학』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저 “양자 모두”(“자기 자신과 오류 양자 모두의…”)라는 말에 달려있다. 그것은 지적 과정의 순서를 완전히 전화시킨다. 또한 이러한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지성향상론』이 “타고난(inborn)” 진실한 관념(이는 데카르트의 “생득관념”이라는 것과 같다)을 출발점에 필요로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다면 애초에 의식이 반성적 심급으로서 등장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관념이라는 것은 『윤리학』에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거기서 모든 적합한 관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어지는 것은 단지 상상적인 것뿐이다.


20) Balibar, "A Note on "Consciousness/Conscience" in the Ethics", Studia Spinozana, vol. 8, (Alling: Walther & Walther, 1992), pp. 37~53. 여기서 들뢰즈가 “의식”을 “스스로를 복사하고 무한하게 재생산(redoubling)하는 관념의 성질, 즉 관념의 관념”(SPP, 58)과 동일시한다는 점에 주의하자. 반면, 발리바르는 『윤리학』에서의 관념의 관념과 확실성은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앞의 논문의 열 번째 각주를 참조하라. 또한 알튀세르가 그의 “인식론적 단절”이론을 가공했을 때, 그것은 정확히 이 『윤리학』의 모델을 따라 행해졌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 개념」, 서관모 역, 『이론』 13호, (새길, 1995), 특히 183쪽 이하를 보라.


21) 이 양자 사이의 쟁점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22) Lévi-Strauss, ibid., p. 2.


23) Op. cit., p. 7. 강조는 인용자.


24) 그러므로 나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실천적 철학”이라고 부른 것에 동의한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공통의 통념들이 그 자체로 “실천적 관념들”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감히 공통의 통념에 기반한 제 2종의 인식은 차라리 “이론적인 관념들”(물론 이론적인 것이 항상 이미 실험과 조사를 포함한다는 조건하에서)이며 반면 제 1종의 인식과 제 3종의 인식이야말로 “실천적 관념들”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25) 알튀세르,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편, (공감, 1996), 62쪽. 강조는 인용자.


26) 알튀세르,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철학과 맑스주의』, 49~51쪽.


27) Balibar, ibid., pp. 48~51.


28) Cf.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É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p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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