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의 반성완 번역을 기본으로 김남시님이 오역을 수정한 번역을 퍼옴
(발터 벤야민과 현대 카페)
(2~14번 테제, 파란 부분이 수정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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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말에 의하면 어떤 장기 자동기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기계는 어떤 사람이 장기를 두면 그때마다 그 반대 수를 둠으로써 언제나 이기게끔 만들어졌었다. 터어키 의상을 하고 입에는 水煙筒을 문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여진 장기판 앞에 앉아 잇었다. 거울로 장치를 함으로써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인 등이 굽은 난장이가 그 책상 안에 앉아서는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였다. 우리는 철학에서도 이러한 장치에 대응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소위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불리어지는 인형이다. 이 역사적 유물론은, 만약 그것이 오늘날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어서는 안되는 신학을 자기의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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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는 "인간의 심성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 중의 하나는...개별인들에게 존재하는 저 많은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재가 그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질투심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이 생각을 좀 더 진전시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이 품고 있는 행복에 대한 그림은, 우리 자신의 삶의 과정이 언젠가 우리 스스로를 배제시켰던 저 시간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후회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저 행복은 우리가 숨쉬었던 그 공기 속에, 우리가 말을 걸 수도 있었을 사람들과, 우리 품에 안길 수도 있었을 여인들과 함께 숨쉬었던 저 공기 속에만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행복의 표상 속에는 구원의 표상이 처분할 수 없이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대상으로 삼는 과거에 대한 표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는 하나의 비밀스러운 인덱스를 지니고 있는데, 그를통해 과거는 구원을 지시하게 된다. 저 지나가 버린 순간에 존재했던 한 숨의 공기가 우리 자신을 스쳐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목소리 속에 이제는 그쳐버린 목소리의 메아리가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연연해하는 저 여인들에겐 그녀들이 더 이상 알지 못했던 누이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그렇다면,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엔 어떤 비밀스런 묵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 기다려졌던 존재들이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에겐 우리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과거가 그에대해 요구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요구는 값싸게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에대해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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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크고 작음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연대기 기록자는 그를통해 언젠가 한번 일어났던 것은 그 어느 것도 역사에서 상실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진리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류에게는 그들이 구원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하게 주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는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인용 가능한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모든 순간들은 그 날, 즉 최후 심판의 날의 의사 일정의 인용이 된다.
4 먼저 먹고 입을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신의 왕국은 스스로 열릴 것이다. - 헤겔
마르크스를 따라 교육된 역사가가 눈 앞에 두고있는 계급투쟁은 거칠고 물질적인 것들을 두고 일어나는 싸움이다. 이 거칠고 물질적인 것들이 없이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투쟁 속에서 이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승리자의 손에 떨어지는 노획물과는 다른 이미지를 하고있다. 그것들은 신뢰, 용기, 유머, 기지와 불굴성으로서 이 싸움 속에서 살아있으며 먼 과거의 시간에까지(in die Ferne der Zeit) 영향을 미치고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새로이 우연히 지배자들에게 주어진 모든 승리를 의문시할 것이다. 꽃들이 그들의 머리를 태양을 향해 돌리듯 지나가 버린 과거는 저 비밀스런 종류의 향일성에 힘입어 역사의 하늘에서 떠오르려 하는 태양을 향하려 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모든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띄지 않는 이러한 변화들에 정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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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참된 그림은 휙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것이 인식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번쩍 하고는 다시는 보지못하게 되는 그런 그림으로서만 과거는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우리로부터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 고트프리드 켈러의 이 말은, 역사주의(Historismus)의 역사에 대한 그림 중에서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바로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거의 그림 속에서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못한 현재와 함께 사라져 버릴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 바로 이 되가져올 수 없는 과거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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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을 역사적으로 표명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 어떠했었던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번쩍하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유물론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과거의 그림을 붙잡는 것이다. 그 위험은 전통의 존속 뿐 아니라 그 전통의 계승자들도 위협하고 있다. 이 양자 모두에게 공통되는 그 위험이란 자신을 지배 계급의 도구로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시대마다 새로이 전승된 것을 위압하려하는 타협주의로부터 전승된 것을 뺏어오려는 시도가 행해져야만 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반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도 온다. 바로 그 역사 서술가에게만, 지나간 것 속에서, 바로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져 있다. 죽은자들조차도 적으로부터, 만일 적이 승리한다면, 안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적은 지금껏 승리하기를 멈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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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비참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의 암흑과 혹한을 생각하라.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푸스텔 드 코라쥬는 역사가들에게 권고하길, 한 시대를 추체험해보고자 한다면 그 시대 이후 역사의 경과에 대해 그가 알고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서 떨쳐버리라고 말한다. 역사적 유물론이 그로부터 결별했던 방법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그것은 바로 감정 이입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순간적으로 번쩍 지나가 버리는 진정한 역사적 그림을 낚아 챌 만한 용기를 잃은 심장의 관성, 곧 권태 acedia에 그 근원을 갖는다. 이것은 중세 신학자들에게선 우울함의 근원으로 여겨졌었다. 이에 친숙해 있었던 플로베르는 <카르타고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얼만큼의 슬픔 triste 이 존재해야 하는지 짐작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썼다. 이 우울함의 본성은 역사주의의 역사 서술가가 도대체 누구의 입장에 자신을 위치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승리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그때마다의 지배자들은 언젠가 승리했던 모든 이들의 상속자이다. 승리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따라서 언제나 그때마다의 지배자들을 위하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자에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말해졌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역사의 승리를 거머쥐고 있는 자는 오늘날의 지배자들을 오늘날 바닥에 누워있는 피지배자들 위로 이끌고 가는 개선행렬에 함께 행진하는 자이다. 늘 그러했듯이 그 개선행렬엔 노획물이 함께 따라 다닌다. 사람들은 그 노획물을 문화유산이라 부른다. 그 문화유산들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거리를 둔 관찰자로써 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유산에서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예외없이 참혹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원천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저 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를 창조했던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 뿐 아니라 그 동시대인들의 이름없는 노동에도 빚지고 있다.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지 않은 문화의 기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의 기록이 야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듯이 이들에게서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가는 전승의 과정 역시 야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때문에 가능한 한 그 전승으로부터 거리를 취한다. 그는 역사를 결에 거슬려 빗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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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있는 <예외적상태>라는 것이 상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외적 상태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겐 진짜 예외적 상태를 불러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사실이 분명해 질 것이다. 그를통해 파시즘과의 투쟁에 있어서 우리의 입지가 더 나아질 것이다. 파시즘이 승산을 갖는 데에는 적지않게 그 반대자들(좌파)이 진보라는 역사적 규범의 이름으로 파시즘과 접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들이 20세기에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놀라움은 결코 철학적 놀라움이 아니다. 그로부터 저 놀라움이 기인하는 저 역사에 대한 표상이 유지되는 한 저 놀라움은 인식의 출발을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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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날개는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난 기꺼이 되돌아 가련다.
살아있는 시간동안 내가 머문다 하더라도
난 별로 행복하지 않을테니까.
게르하르트 쇼렘 <천사로부터의 인사>
앙겔루스 노부스 (새로운 천사)라고 불리는 클레의 그림이 있다. 거기엔 한 천사가 그려져 있는데, 그 는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막 물러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눈은 크게 떠있고 그의 입은 열려있으며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가 틀림없이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그는 얼굴을 과거를 향하고 있다. 사건들의 연쇄가 우리 앞에 드러나는 곳에서 그는 하나의 유일한 재난을 바라 보고있다. 그 재난은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올리며 그것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 던지고 있다. 그는 기꺼이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죽은자들을 흔들어 깨우고 부서진 것을 다시 결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파라다이스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 그의 날개에 휘몰아 들어가는데 그 폭풍은 천사가 더 이상 날개를 접지도 못할 만큼 강하다. 이 폭풍이 쉴새없이 그를,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밀어대고 있고, 그 사이에 그의 앞에 쌓이는 폐허의 더미는 하늘까지 다다르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폭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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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 규칙을 통해 수사들로 하여금 명상을 위해 지정해 놓은 대상들은 그들이 세상과 이 세상의 번잡함을 싫어하도록 만드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쫓고 있는 사고도 이와 유사한 규정으로부터 나온다. 이 사고는,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희망을 걸었었던 정치가들이 나자빠지고 자신의 일에 대한 배반을 통해 이 패배를 재삼 확인하고 있는 이 순간,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정치적 현세주의자들을 현혹시켰던 그 올가미로부터 정치적 현세주의자들을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관찰은, 이 정치가들의 고집스러운 진보에 대한 믿음과 그들의 '대중기반'에 대한 신뢰,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기구에 대한 그들의 노예같은 적응이 동일한 사태의 세 측면이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관찰은 이 정치가들이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 역사관과의 어떠한 공모도 거부하는 그러한 역사에 대한 표상에 다다르기 위해 우리의 관습적 사고가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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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 속에 비밀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던 순응주의 (Konformismus) 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전략뿐 아니라, 그들의 경제에 대한 사유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저 순응주의는 이후 (사민주의의) 붕괴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독일의 노동자들(연합)을 저토록이나 타락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흐름에 따라 움직여라" (schwimme mit dem Strom) 라고 하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그들에게 기술적인 발전은 그들이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 흐름의 하나라고만 여겨졌던 것이다. 이 생각으로부터, 기술 진보의 과정에서 생겨난 공장 노동은 정치적 성과에 다름 아니다라고 하는 환상까지는 한 걸음 차이밖에 나지않는다. 이전의 프로테스탄티즘적 노동윤리가 세속화된 형태로 독일 노동자들 사이에서 부활한 것이다.
이미 고타 강령 속에 이러한 착각의 흔적이 담겨있다. 고타 강령은 노동을 "모든 문화와 부의 원천"으로 정의하고 있다. 무언가 불길함을 예감한 마르크스는 그에 대해 응답하기를, 자신의 노동력 외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은 "재산가로 성장한 다른 사람들의 노예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혼돈이 생겨나 얼마 뒤에 Josef Diezgen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에 이른다.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치유책이다. 노동을 개선해 나가는 속에 바로 지금 이룩할 수 있는 저 풍요로움이 존재하는데, 그건 지금까지 그 어떤 구원자도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천박한 마르크스적 개념은 다음의 질문 앞에선 오래 버티지 못한다. 즉,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스스로 소유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생산물들이 그들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천박한 노동 개념은 자연지배에 있어서의 진보만을 인식할 뿐, 역사의 퇴보를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이후에 파시즘에서 등장하게될 테크노크라시적 경향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 저 테크노크라시적 경향에 속하는 것이 지난 3월 초 불운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서 등장했던 자연 개념이다. 여기서 이해되고 있는 노동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착취에 대한 나이브한 보상으로 여기고 있는 자연에 대한 착취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positivistischen 개념화와 비교해보면 엄청난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푸리에가 제시한 환상들이 놀랍게도 건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다. 푸리에에 의하면, 성공적으로 이룩된 사회적 노동은 네 개의 달이 지상의 밤을 비추고, 남극과 북극의 얼음들이 사라지며, 바닷물이 더이상 짠맛을 내지 않고, 맹수들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게 하는 데로 이어져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 착취로 부터는 거리가 먼 노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노동은 가능자로써 자연의 무릎 속에서 잠자고 있는 저 피조물들로부터 자연을 출산시킬 수 있는 그런 노동이다. 저 타락한 노동 개념 속에 등장하는 노동의 대응물로써의 자연은, Diezgen이 표현했었던 것처럼 "공짜로 저기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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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역사 Historie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하는 역사는 저 응석받이 같은 하릴없는 자가 지식의 정원에서 필요로 하는 그런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 니체 : 삶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단점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투쟁하고 있는, 억압된 계급 자신이다. 맑스에게서 그 계급은 최후의, 노예화된 계급이자, 이제 복수를 하는 계급으로 등장하는데, 그 계급은 패배한 세대들의 이름으로 해방이라는 작업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러한 의식, 잠시동안이지만 <스파르트쿠스> 에서도 등장했었던, 이러한 의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민주주의에게는 불쾌한 것이었다. 30년의 시간을 거쳐 사회민주주의는 이전의 한 세기를 뒤 흔들었었던 블랑키라는 이름을 거의 사라지게 하는데 성공했다. 사회민주주의는 노동계급에게 미래 세대들의 구원자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만족스러워했다. 그를통해 사회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가장 커다란 힘줄을 잘라버렸다. 저 계급은 이 (사회민주주의적) 학교에서 증오 못지않게 희생정신 또한 잊어버렸다. 저 증오와 희생정신은 해방된 손자들이라는 이상이 아니라, 노예였던 선조들에 대한 그림을 통해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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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일들은 하루 하루 분명해 질 것이고 민중은 나날이 현명해 질 것이다.
Josef Dietzgen : 사회민주주의적 철학
사회민주주의 이론, 특히 그 실천은 현실이 아니라 도그마적 요구에 집착하고 있는 진보 개념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머리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진보란 첫째로, 인류 자체의 (인류의 기술과 지식의 진보일 뿐만 아니라) 진보였다. 두번째로 그 진보는, 결코 끝마쳐질수 없는 (인류의 무한한 완전성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세번째로, 그 진보는, 본질적으로 중단될 수 없는 (스스로 움직이면서 직선 혹은 나선형의 궤도를 따라 나아가는 ) 것이었다. (진보에 대한) 이 모든 술어들은 전부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하나 하나 전부 비판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이 모든 술어들의 배후에로 가 그 모두에 공통적인 것을 향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인류의 진보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동질적이고 homogenes 빈 leere 시간을 따라 나아가는 인류에 대한 표상과 떨어질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동질적이고 빈 시간을 따라) 나아감 Fortgang의 표상에 대한 비판이 진보에 대한 표상 일반에 대한 비판의 근본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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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은 목표이다.(칼 크라우스, [운문으로 된 말들])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그 구성의 장소는 동질적이고 빈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시간에 의해 채워져있는 것이다. 그렇게 로베스피에르에게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으로 충전되어 있는 과거였는데, 그 과거를 그는 역사의 연속체로부터 떼어 잘라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회귀한 로마로 이해했다. 프랑스 혁명은 고대 로마를 마치 모드가 지나간 시대의 복장을 인용하듯 그렇게 인용했던 것이다. 모드는 과거의 정글 속에서만 움직이고 있는 현재적인 것 Aktuelle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모드는 지나간 것에로 향한 호랑이의 도약이다. 다만 그 도약은 지배 계급이 명령권을 가지고 있는 경기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서의 그런 도약은, 마르크스가 혁명이라고 파악했던 저 변증법적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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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의식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의 혁명적 계급에 고유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달력의 첫날은 역사의 저속도 촬영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기억의 날로서 국경일의 모습을 하고 언제나 다시 되돌아오는 그 날은 따지고 보면 항상 동일한 날인 것이다. 따라서 달력은 시계처럼 시간을 계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백년 이래 유럽에서는 그 가장 희미한 흔적조차도 드러내지 않았던 역사의식의 기념비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은 1848년의 7월혁명 동안에 일어났던 하나의 돌발적 사건에서였다. 투쟁의 첫날밤에 파리의 여러 곳에서 상호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시계탑에 총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아마 시의 압운에 힘입어 그의 통찰력을 획득했다고 생각되는 이 사건의 어느 증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가 믿을 것인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든 시계탑 밑에서 있던 새로운 여호수아가 마치 시간이 못마땅하기라고 하듯이 시계판에 총을 쏘아 시간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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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물론자는 과도기로서의 현재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그 속에 머물러 정지상태에 이르고 있는 현재의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이와 같은 현재의 개념에 의해서만 역사를 쓰고 있는 현재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회적인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보여준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 따위는 역사주의의 유곽에서 <옛날 옛적>이라고 불리우는 창녀에게 정력을 탕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겨 버리고, 대신 그는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남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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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주의가 보편적 세계(인류)사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방법론적으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역사보다는 바로 이러한 보편사와 비교해 보면 아마 가장 명확히 구별될 것이다. 보편적 세계사는 아무런 이론적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보편사의 방법론은 첨가적이다. 그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원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사고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고는, 그것이 긴장으로 충만한 사실의 배열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사실의 배열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사고는 하나의 單子 Monade로서 結晶化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가 단자로서 마주 대하는 역사적 대상에만 오로지 접근한다.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식, 달리 말해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과정을 폭파시켜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과거를 인지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시대로부터는 하나의 특정한 삶을, 일생의 사업으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사업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으로부터 얻게 되는 수확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는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는 전체 역사의 진행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파악되어진 것의 영양이 풍부한 열매는, 귀중하지만 맛이 없는 씨앗으로서의 시간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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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의 유기적 생물체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호모 사피엔스(인류)의 보잘것없는 오천년 역사는 이를테면 하루의 24시간 중의 마지막 2초와 같은 것이고 또 이러한 기준에서 두고 보면 문명화된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하루의 마지막 시간의 마치막 초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어느 현대의 생물학자는 말한 바 있다. 메시아적 현재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역사를 엄청나게 축소해서 포괄하고 있는 현재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만든 바로 그 형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부기
1) 역사주의는 역사의 여러 상이한 계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실은, 수천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 하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로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2) 시간으로부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던 점술가들은 확실히 시간을 동질적 시간으로도 또 공허한 시간으로도 체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기억을 통하여 체험되어졌던가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유대인에게는 미래를 연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대인의 경전인 토라와 그들의 기도는 이와는 반대로 기억을 통하여 미래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러한 기억은 유대인들로부터, 점성가들에게서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빠져들었던 미래가 지니는 마력적 힘을 박탈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에겐 그로 인해 미래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미래 속에서는 매초 매초가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었던 조그만 문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