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힘 우리 시대의 고전 16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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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법에서 정의로-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읽기(괄호 안은 쪽수)

법은 흔히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평가된다. 흔히 법의 이념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의가 법과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 이 때 자연법과 실정법, 정의와 법, 불문법과 성문법이라는 이항 대립은 사람들이 흔히 법에 대해 갖는 쉬운 통념을 밑에서부터 뒷받침한다. 이 때 법 또는 정의가 해체의 주제가 된다는 것은 이 대립관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한 ‘差移적 오염’ 을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데리다는 우선 관용어의 문제를 언급한다. 우선 그는 청중들에게 영어로 말해야 하는 ‘의무’ 그리고 고유어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이 글은 원래 강연문인데,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청중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상황과 관련한 addresse의 타동사적 용법의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제기된다.) 가령 그는 불어에는 없고 영어에는 있는 표현을 언급한다. 우선 법의 집행을 뜻하는 to en‘force’ the law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힘없는 법은 없다는 것, 강제성은 법에 결코 보충적이거나 부차적, 외재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또한 독어 gewalt가 한편으로는 폭력, 다른 한편으로 적법한 권력과 권위를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의 힘과 대개는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분명 어느 순간에인가 권위를 설립했을 것이고, 이전의 어떤 적법성에 의해서도 권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을, 다시 말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고 부당하지도 않은 기원적 폭력 그리고 법과 힘의 뒤얽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다음부터는 좀더 본격적으로 정의와 힘, 법의 힘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법이 단순히 일체의 폭력과 각종의 물리적, 상징적 힘과 동떨어진 한갓 초월적 관념이 아닌 이상 법은 언제나 실제적인 설립과 정초, 해석적이고 동시에 수행적인 정당화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법의 강제력, 법의 힘의 시제는 언제나 ‘전미래적’이다. (“태초에 힘이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 이처럼 힘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미래완료의 형식으로, 즉 사후적으로 정당화된다.) 데리다가 덧붙이는 파스칼로부터의 인용을 따라가보자.
“정의, 힘-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이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26~27)

뒤이어지는 몽테뉴의 단편은 법적 권위의 토대가 갖는 맹목적인 자기지시성, 그 심연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법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를 갖기 때문에 복종한다. 그 권위의 유일한 토대는 단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믿음의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토픽, 어떤 AIE적인 유사성)
“모든 것이 시간과 더불어 변천한다.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그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그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28)

이에 따르면 법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법의 힘이 갖는 설립의 계기가 그 시초에서 (동질적이고 텅 빈 역사에 구멍을 내고 절단하는) 사건적 성질을 갖는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선행하는 토대나 정의도 반박하거나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 해석적 ‘폭력’과 분리될 수 없다. 곧 어떠한 담론도 이 ‘창설적’인 언어활동에 대한 메타언어적 역할을 할 수 없다.

또한 (앞에서 제기된 바, adresse의 문제와 관련해) 정의를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전달내용과 주소의 정확성이다. 그렇지만 이 전달/주소는 언제나 독특한 것인데 반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규칙 및 규범의 일반성과 관계한다. 이 두 가지 환원불가능한 특유한 두 가지 요구들 속에서 정의의 행위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게다가 ‘메타언어는 없다’라는 테제에 보태어, 그리고 손쉬운 목적론에 반대하여 ‘편지는 제자리에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테제의 추가)데리다는 애초에 다루고자 했던 주제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유사성, 동일성을 넘는 진정한 보편성의 문제. 일반-특수의 쌍이 아닌 보편-독특의 쌍의 문제로.
“어떤 공동체의 성원들 모두가 전체적으로 동일한 고유어를 공유하지 못할 때, 어떤 불의의 폭력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40) “국법을 강제하기 위한 정초적 폭력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재편된 민족적 또는 종족적 소수자에게 언어를 강제하는 것이다.”(46)

이 때 하버마스 식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제시하는 패러다임이 과연 상호주관적 주체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보증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폭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담화 상황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언제나 일반성에 포섭되지 않는 단독성, 타자성이 존재하며 그런 한에서 그 고유어는 늘 독특한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지금 데리다의 상황(외국어로 자신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타자의 언어를 경유한 정의의 가능성은 아포리아적인 경험을 요구한다. 고진 식으로 말하자면 언어의 문제만큼 주체의 문제 또한 가르치기-배우기, 팔기-사기에서 보이는 것고 같은 같은 비대칭성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종 가운데에는 주체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물 취급을 받고 있는 많은 ‘주체들’이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41)

궁극적인 토대 위에 정초해 있지 않은 법의 해체 가능성, 그리고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은 어떤 불균형, 스스로를 초과하는 고뇌의 경험을 개시한다. 단순히 제도의 밖으로 도주하는 무정부주의와 제도 내의 자유주의는 어쩌면 너무나 완고한 동전의 양면이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제도 내의 변혁은 씨빌리테적인 방식을, 그러나 제도의 틀을 영속적으로 넘어서는 제도화의 규율을 겨냥해야 한다. 정세 속의 과잉결정의 방식은 또한 법과 정의 간의 다면적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 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48)
뒤이어 세 가지의 아포리아적 사례들이 제시된다.

1. 규칙의 판단중지: 데리다는 법의 집행하는 판사의 결정을 예로 든다. 이른바 창설적 판단은 기존의 법에 일치하면서도 단순한 기계적 순응이나 칸트 식의 규정적 판단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요컨대 어떤 결정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적어도 그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 재긍정과 확증 속에서 이를 재발명할 수 있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 중지적이어야 한다. 매 경우가 각각 다른 것인 만큼, 각각의 결정은 상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법전화된 어떤 규칙도 절대적으로 보증할 수 없고 보증해서도 안 되는, 절대적으로 특유한 해석을 요구한다.”(50)

2.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 그러므로 이제 결정은 ‘현전적으로’ 또는 ‘충만하게’ 정당하지 않다. 이렇게 모든 결정에 유령같이 붙어 따라다니는 결정 불가능성은 무한한 정의의 이념, 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타자와 ‘책임’을 통해서 관계맺는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우리는 이 해야 함(devoir)으로부터 말해야 한다-것의 경험이다.”(52)

3.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 이렇게 기존의 규칙에 판단중지를 해야 하는 순간에도, 결정 불가능한 사태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은 언제나 이미 긴급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역사에는 언제나, 때로는 무한하게 작을지라도, 역사의 흐름을 절단하는 사건의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결정의 순간은 정당해야만 하는 이 순간 자체는 항상 긴급하고 촉박한 유한한 순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이는 하나의 광기이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도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56)

그러므로 해체론적 망설임은 단순히 두 가지 대당을 무너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진 목적론적 유토피아를 기다리지 않는다. 해체의 정치, 해체의 정의는 언제나 단호한 선택이자 개입, 행동을 요구한다.
“정의의 이러한 긴급함과 본질적인 촉박함 때문에, 정의는 기다림(규제적이거나 메시아적인)의 지평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아마도 하나의 장래avenir,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futur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하나의 도래-하기를 갖게 될 것이다.”(58)

그렇게 해서 정의는 역사의 구성적 주체의 편에서는 포착되기 쉽지 않은 것이 된다. 그것은 차라리 주체없는 과정 또는 구성되는 주체의 역사의 편에 서 있다. 근시近視지만 끈기있는 ‘두더지’(다니엘 벤사이드)의 저항은 정의를 도래하게 한다.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이다. 이는 분명...역사가 문제될 때, 역사라는 이 단어로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식될 수 없는 하나의 역사다."(59)

이처럼 법에서 정의로 가는 길은 끝이 없다. 도단道斷으로서의 아포리아는 행동의 포기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것은 차라리 숱한 에움길을 요구한다. 또한 이 과정은 국가와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의가 법과 계산을 이처럼 초과하고, 현전 불가능한 것이 규정가능한 것을 이처럼 범람한다고 해서 이를 제도나 국가 내부에서, 제도들이나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적 정치적 투쟁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삼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59)
“정치화-비록 결코 총체적일 수 없으며, 총체적이어서도 안 되지만-는 끝이 없는 것이다....곧 정치화에서 각각의 진전은 이전에 계산되거나 한정되었던 정치의 토대 자체를 재고찰하고, 따라서 재해석하도록 강제한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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