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설명하면 다비드, 엔소르, 자르는 존재하는 모든 정치체계의 중심부에 있는 배제를 폭로한다. 사회가 정치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구성원 중 일부가 제명되어야 한다. 대개, 배제된 사람들 사이에는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 좋든 나쁘든 간에 예술에 의해 발견된 가능성들은 정치적 가능성들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 위치한다. 그러나 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미학적 재현들이 사회사상과 정치이론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인데 (...) 그것들은 민주주의의 영속적인 실패를, 그것이 불가피하게 스스로의 기초적인 원칙들을 타락시키는 방식들을 보여 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실패는 또한 그것의 끊임없는 쇄신을 위한 자극이다. 우리가 다비드, 엔소르, 자르에게서 배우는 것은 민주주의가 그것의 유토피아 없이는 해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바로 모두에 의한, 그리고 모두의 이익을 위한 지배라는 발상이다. 권력이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행사되는 사회이다. 이 급진적인 민주주의 개념이 과거의 혁명들에 영감을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계속해서 오늘날에도 반란의 움직임들을 이끌고 인민주권의 원칙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추진력을 불어 넣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의 중심에서는 드물지만 사회의 어떤 구석이나 주변부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언제 어디서 그것이 출현하든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어휘로는 해석되기 어려운 언어와 요구들로 나타난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더 압제적인 정부 형태에 의해 뿌리 뽑힌 것으로 보일 정도로 민주주의가 정치권력을 건드리지 못하는 긴 시기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지하의 형태로, 맑은 날에 대한 시인의 꿈속에서, 또는 몰래 주먹을 꼭 쥐고 저항의 예술을 수행하는 인민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스테판 욘손, <대중의 역사 -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영어판 후기

















스테판 욘손, 『대중의 역사』 3부 1989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

 

 

22. 가장 사랑한 것.

  알프레드 자르의 설치미술품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 혁명은 생방송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이 혁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이 혁명이었는지 아닌지 알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목격할 수 없다.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결코 혁명이 아니며 위반이기 때문.

 

23. 국가의 이면

  조르주 자크 당통: 혁명은 그것의 산물을 집어삼킨다. 혁명의 동력은 대중들이 그들보다 삶에서 더 나은 지위를 가진 모든 이들을 향해 품은 억눌린 격노에서 생겨난다. 혁명은 통제 불가능. 프랑스 혁명 외의 더 많은 경우는 반대로 혁명의 산물이 혁명을 집어삼킨다. 1968년의 민주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진압되었으나 다양한 분야에서 전통과 관습을 변화시킴. 문화적 민주화나 일부에서는 권력의 이동. 마르쿠제는 정치 참여는 금지하면서 문화적 활동에 있어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모순적 체계를 억압적 관용이라고 부름.

  자르의 작품은 1968년의 재구성으로, 여기에는 어떤 전체적인 관점도 없으며 무한한 수의 대안적 해석과 조합을 제공한다. 멀리서 볼 때 이 설치미술품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질서 정연한 무질서임. 모든 정치적 대표제는 경직되고 구속되는 경향이 있기에 반란은 계속 될 것. 영구혁명(트로츠키).

 

24. 비어 있는 왕위

  동유럽의 1989년 혁명들은 1871년의 파리코뮌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시각적 재현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코뮌은 우상 파괴라는 아이콘만을 가지며, 인민에 속했기에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다(유인원 같은 야만인으로 묘사한 캐리커쳐들). 1871년 혁명은 틀에 넣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1989년의 혁명들은 초상에 더 저항적이었으며 사람들은 다중으로서 행동했다. 이는 스스로를 인민의 얼굴과 목소리로 묘사해왔던 공산국가 특권의 박탈을 암시. Wir sind das Volk. 복수의 주권은 단수를 물리침. 차우셰스쿠에 맞선 한 봉기에서 나타난 구멍이 난 깃발. 국가에서 당을 뿌리 뽑으려는 이 구멍은 통치자의 자리가 비어있을 뿐 아니라 인민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

  민주주의는 상징들 없이 해나가야 한다(존 애덤스). 그림 같은 상징적 표상은 제한된 수의 인물이나 상류층을 강조해야 하는데 이는 대다수를 틀 밖으로 배제함을 의미하기 때문. 전체주의 국가에서 인민의 지도자는 국민의 무대인 후경에 대해 전경으로 나타난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차이도 존재하지 않고 다수는 하나가 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삽화가 드러내는 전제주의적 대표제. 민주주의의 틀을 만드는 것은 정치적 공동체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자 인류를 나누고 분할하는 것.      

 

25. 정치적 폭력

  아렌트: 정치는 말이나 논쟁에서 기원할까? 폭력과 권력을 위한 투쟁에서 기원할까?(『혁명론』). 정치는 공통 관심사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모임이나 협회에 모이는 순간 시작된다. 본질적 문제는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사회적 정치적 질서로의 불가사의한 이행. 정치적인 것은 사회 자체의 최초의 발전에 대한 언급이며 역사상 중대한 국면들, 즉 국가가 만들어지거나 붕괴하는 혁명적 순간들에 관련. 대개 사회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유럽에서 나타난 사회 형태를 의미했으나 사회과학자들은 1989년 이후 민족국가의 해체를 이야기함.

  세계화에 대한 관심과 지정학, 대중심리학 담론과 공명. 지정학의 경우 세계사와 세계체제의 거시적 역학 파악 위한 노력, 오래된 사회공동체, 국가를 해산시키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과정들에 관심. 반면 대중심리학은 17,8세기 철학자들처럼 사람들을 통합하는 정념에 관심(들뢰즈/가타리, 누스바움, 공동체주의자들). ‘정념이 우리 개개인에게서 생길 때 우리 안에서부터 사회가 솟아난다’(세르주 모스코비치). 사회의 기반은 정념과 욕구들. 19세기 대중심리학자들은 정념이 파국을 초래하지 않게 이를 가공, 보강, 정제할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 ‘지도자: 대중 = 화가: 페인트’(괴벨스). 대중심리학의 강적은 결국 민주주의이며 대중에 대한 르봉의 관점의 결론은 다수 사람들이 정치 과정 바깥에 남겨져야 한다는 것. 1989년 벨벳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심각한 불확실성과 더불어 제기된 이론적 논의들의 세 쟁점 1) 주권은 어디에 속하는가 2) 어떤 대중운동과 제도를 통해 인민이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을 되찾을까 3) 인민, 데모스는 무엇인가. 자르의 작품에서 경찰과 군대는 시위자들과 투쟁한다. 이는 아렌트의 불편한 문제, 즉 폭력과 이를 통해 경계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상기시킨다.

 

26. 도금된 못들로

 1990년대 중반 자르의 르완다 학살 관련 프로젝트(그림 참조): 르완다 인민의 ‘인공적’ 익명성.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의 영화적 구조(스틸 사진을 영화 시퀀스로 편집). 틀이 유발하는 현실 효과. 자르의 목표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현실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묘사되는가에 달려있다는 점, 예술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현실의 어떤 부분이 시각적 재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보이려 함. 결정적인 요인은 틀로서, 형상과 틀 사이의 관계는 포함의 관계가 아니라 배제의 관계이다. 형상은 틀 바깥에 넣어진다. 자르의 예술에서 우리는 틀 안에 넣어진 모티프가 아닌 모티프 안에 넣어진 틀을 본다. 세상을 부분들로 나누는 틀은 때로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거나 이미지 전체를 가린다. 사회의 틀들을 초월하려는 욕망, 관객을 틀들 자체로 향하게 하기. 사실에 대한 욕망이자 정치적 욕망, 민주주의를 향한 욕망.

  데리다 『회화에서의 진리』: 틀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틀의 유일한 기능은 의미를 안정시키고 현상들과 지각들을 의미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 틀은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세운다. 정치적인 문제와 미학적 문제의 공통점 –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재현할까? 틀은 세계가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방식들뿐 아니라 인간이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방식들의 한계를 규정. 틀의 바깥에 있는 것은 대표되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나타난다.

 

27. 인간과 짐승의

  1989년 이후 우리 시대 모든 주요한 문제들은 경계들을 중심으로 전개(영토, 문명, 종교, 문화적, 민족적, 성적 경계들). 경계들은 도처에 존재하며 이는 결국 정체성이 존재하기에 생겨난다(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인간과 짐승 사이의 단순한 구별. 경계는 폭력의 현장이며 경멸과 잔인함을 유발. 시민이 되거나 국적이 없을 수 있으나 경계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앙드레 그린). 우리 시대 최악의 충돌 중 다수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서 유발된다. 발리바르의 질문은 알튀세르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개인들을 사회로 묶어주는 것은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정체성을 부여하며 개인은 이를 제약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의 본질의 실현으로서 이해. 동일시의 과정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들. 현실에 대해 미디어는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공식화하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의 이미지를 한정하는 틀은 정치공동체가 자신의 틀을 만드는 방식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과 미디어의 제도들이 정치적 경제적 체제와 밀접히 일치한다는 사실.

 

28. 무법자들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대중들에 대해 말했을 때 훗날 사회학자들이 네 개의 범주로 분류할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 범죄적이고 위험한 하층계급 2) 거주 증명서가 없는 부랑자와 노숙인 3) 가난한 사람들과 문맹들 4) 조직화된 공장 노동자와 장인들(정치적 투사). 인구 중에 이런 부류들을 배제하지 않았던 사회가 여태껏 존재한 적이 있는가? 이 네 범주는 4인조, 즉 노상강도, 낯선 사람, 거지, 폭도에 해당하는데 이들을 폴리스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싶어 할 사회를 상상하기 어려움. 그러나 보편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란 그런 사회의 가능성 아닌가? 이 네 집단들이 배제되는 한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가능성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거짓말로 남을 것. 자르의 작품은 이 야만적인 네 집단을 다룬다. 틀 내부에 위치한 제재가 아니라 제재 내부에 위치한 틀. 「네 번의 응우옌」

 

29. 자기 면역

  난민을 우리 사회의 지표로 택하자(조르주 아감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정반대의 것이 아니며 양자 모두 국가 권력을 중앙집권화된 것으로, 원론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 즉 주권의 본질에 대한 동일한 관념 공유. 통치자에게 최후의 수단이 되는 특별한 도구로서 비상사태는 통치자에게 법의 바깥에서 행동할 수 있는 법적 권리 부여. 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시민들에게서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권위의 형태 없이 견뎌낼 수 없었을까? 이는 아감벤의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서 아렌트, 푸코 등에게 부분적으로 물려받은 것. 조에/비오스의 구분에서부터, 곧 처음부터 정치의 영역은 여성, 하인, 생식, 노동의 영역과 구별되었음. 민주주의의 출현으로 다수는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으나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삶정치. 정치의 목적은 인민의 몸의 관리와 훈육, 착취. 인구는 등급이 매겨지고 고정된 배역을 맡게 되는 정치적 계획 과정에 종속되며 나머지는 병자, 범죄자, 외국인 등으로 거부됨. 통치권과 자연의 무기력한 삶 사이의 양극화가 재발. 인민의 두 개념. 대문자로서 인민(구성권력이고 주권자이며 민주주의적 이상인)과 소문자로서 인민(빈자, 노동계급, 여성, 아이들, 농민, 실업자 등). 인민 개념의 모호함이 정치학의 기원들에 뿌리두고 있으며 서양 정치사를 가로지르는 충돌을 압축(비오스/조에, 정치적 삶/자연적 삶). 민주주의는 항상 그 자체와 충돌. 민주주의는 틀에 넣어져야 하고 포함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자기면역적(데리다). ex) 1992년 알제리의 선거 사례.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반. 모든 민주주의 사회는 경계를 필요로 함.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국인들, 발전도상국의 대부분의 인구, 18세 이하의 사람들이 경계 바깥에 있음. 데리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동물, 식물도 포함. 민주주의 경계들은 자의적으로 어떤 이론도 특정 존재가 다른 이를 대신하여 결정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입증할 수 없음. 왜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이렇게 제한하는가? 자유와 평등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박애는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오직 형제들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동일한 성별과 가족, 국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증명. 대중들의 힘은 우리가 외국인을 만나는 즉시 경계들에서 멈춘다. 대중들의 힘은 사회의 더 나쁜, 일탈적인 집단이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조건으로만 나타난다. 사회가 민족국가에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계화된 사회에서 경계의 정당화는 불가능하며 유일하게 진정한 민주주의는 경계가 없는 민주주의뿐이다.            

 

30. 성인들

  『호모 사케르』. 대부분의 초기 법률체계는 호모 사케르에 상응하는 법외 추방자를 두고 있다. 더 이상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범죄자는 늑대로 간주되고 숲 속의 늑대의 삶으로 추방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법률과 호모사케르의 관련성. 근대국가들과 나치당 독일 사이의 차이는 오직 정도의 문제이며 강제수용소는 근대국가의 삶정치의 정수. 인권의 실행만큼 민주주의의 실패가 명백한 곳은 없다. 인권은 오직 시민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권력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한 후 위로부터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나오는 권력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삶의 과정, 자연적 삶과 동일. ‘잠재력’과 도래하는 공동체. 그들은 스스로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파괴하고 스스로 권력을 행사. 1989년 텐안먼 광장의 사례. 당시 시위자들의 요구는 매우 모호. 목적 없이, 공동의 목표나 미래상 없이 공동체를 설립하고 사회질서를 공격함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무시하고 공동체의 경계들을 넘어섬으로써 사회와 단절. 그러한 시도들은 보통 동일한 방식으로 끝난다. 탱크와 경찰이 들어오면 인민은 굴복한다.

 

31. 불만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제출한 4만 개 이상의 불만 목록.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석은 절대군주제가 이러한 불평으로 대변되는 고통과 분노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 오늘날의 세계는 이와 얼마나 다른가? 하트, 네그리의 『다중』. 누가 다수를 대변하는가? 대의 민주주의는 최적의 모델이 아니며 근대는 민주주의의 계속 진행되는 이야기의 짧은 장에 불과함. 민주주의는 사회운동의 원동력을 통해 발전하며 결코 완성품이 아닌 진행 중인 작업. ‘민주주의는 역사가 없으며, 역사 그 자체이다’(로장발롱). 현재 민주주의 이론의 많은 근본 개념이 모호해짐. 하트, 네그리는 인민이 고리타분한 개념이라고 하면서 다중은 열려 있고, 가지각색이며, 무한하며 무리이고 네트워크라고 주장한다. 현재 위험에 빠진 것은 공통적인 것(의사소통, 경험, 상상력, 생활양식, 관계, 돌봄 등)이며 경제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으로 변형된다. 공통적인 것을 방어하는 정치적 주체와 인민의 봉기,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없는 상호 연결된 집단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로 존속되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적 실험.

  그러나 다중도 포착이 어려움. 아감벤, 데리다, 발리바르, 로장발롱, 하트/네그리가 촉진시키는 발상은 현실의 남녀가 일정상황 하에서 인민 또는 다중으로 결합하고 융합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주체가 정치적 원칙과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것, 이것이 혁명이라 불리는 한정된 역사적 사건들로 나타난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하지만, 근대 사회과학 및 역사는 대중의 권력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처음 생겨났다. 개인들의 의지의 집합은 아무리 상세히 열거해도 왜 보통 사람들이 수천 명을 이루어 거리로 나오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32. 야만인들의 앙금

  68년 파리 낭테르 대학을 점거했던 142명 중 하나였던 다니엘 콩 방디가 그 이후 동지들을 인터뷰한 결과물인 티비 시리즈이자 책인 『우리는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 1968년에 대한 완전히 모순된 그림들과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환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를 부활시키려는 것이 알프레도 자르의 설치미술품. 68년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려는 혁명적 노력은 실패했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확장으로 이어짐. 민주주의는 더 이상 모든 정치를 위한 미리 주어진 토대나 헌법의 틀이 아니라 도달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치의 필수적인 목표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충돌의 역사를 가지며 혁명은 예측할 수 없는 것.

 

33. 출발

  랑시에르의 여행기 『인민의 땅으로의 짧은 여행』. 모든 근대 정치이론은 인민이 실재하는 무언가이고 사회의 토대라고 간주하지만 이는 규정이 어려운 불가사의한 것. 우리는 결코 인민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인민의 이름으로 말하는, 인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또 하나의 대표제를 만들어낼 뿐(알튀세르와의 결별). 혁명과 반란이라는 대조를 분리시키기. 반란이라 할지라도 혁명이 항상 자발성의 요소를 갖듯이 엄격한 논리를 따른다. 『논리적 반란』. 반란은 옳다, 조반유리의 삼단논법: 모든 사람들은 정의를 가치 있게 생각한다. 사회는 불공평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프롤레타리아의 밤-노동자의 꿈들의 기록』이 보여주는 1830년 파리 노동자들의 생활은 사회주의 사상의 계급의식, 세계관 등에 맞지 않는다. 이 노동자들의 특징은 평등에 대한 요구. 부르주아적 삶에서 좋은 것들에 대한 욕망, 요컨대 그들은 노동자인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들을 봉기하게끔 하는 것은 자신을 억압된 노동계급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의식이 아니라 그들이 접근하는 것이 차단된 또 다른, 더 나은 세계, 즉 부르주아지 세계와의 매일의 조우.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모순과 부정으로서만, 인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저항하는 인민의 능력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엄밀히 말해 인민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은 항상 그들의 대변인의 방언과 겨룬다. 더 이상 대리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인민의 땅이 발견된다. 진정한 평등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인정된 계급과 정체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불미스럽고 위험. 『역사의 이름들』과 질 미슐레: 인민은 정의의 게임에서 항상 비장의 카드를 가진 어릿광대나 영웅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가장 예측할 수 없는 세력. 사회의 가장 깊은 토대 즉 인민의 본능적인 정의감, 대중들의 영감, 순진한 양심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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