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주의라는 말의 유행과 더불어, 관용에 관한 담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 르네상스라고 부를 만큼 성행한다. 한국 역시 90년대 중반 이후 ‘똘레랑스’ 담론의 유행을 겪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웬디 브라운은 오늘날 관용이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도구로 작동하고, 야만이라는 수사나 서구의 위기 담론과 결합하는 방식, 폭력을 정당화하고 선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용은 평등주의나 보편주의와 같은 자유주의 담론의 대리보충으로 작용하며(“추상적 시민권과 결합된 개인주의의 경계 설정 기능이 약화되고, 동질성에 기반한 평등이 정의의 원칙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차이의 탈정치화가 국가의 차원에서든 주체의 차원에서든 완전히 성취되지도 완전히 옹호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관용은 평등의 확장이 아니라 평등의 대리보충으로서 등장한다. 대리보충으로서 관용은 다방면에서 평등을 보충하고 대리하며, 무엇보다도 평등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진정한’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순간 개입하여, 교묘하게 평등의 불완전성을 보완한다.” 125), 차이를 존재론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즉 차이를 물화시키고 자연화, 본질화시킴으로써 권력과 역사에 대한 담론을 차단시킨다(“관용은, 예컨대 ‘제도화된 인종주의’ 같은 불평등의 문제를 ‘상이한 행위와 믿음’의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관용해야 할 차이 자체를 생산해내는 불평등과 지배 문화의 작동을 은폐한다. 관용은 차이를 본질화하고 섹슈얼리티, 인종, 종족의 문제를 물신화함으로써, 섹슈얼리티, 종족, 인종이라고 불리는 차이들을 생산해 온 역사와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89). 관용은 이렇게 정치의 문제를 개인화하고 탈역사화, 탈정치화하며, 도덕적 상대주의를 부추긴다. 문명 담론으로서 관용 담론은 애초에 서구의 종교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기능을 가졌지만, 오늘날 관용의 최초의 의미는 희박해졌으며, 비서구 사회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요컨대, 관용은 오늘날 민족적이고 초민족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통치성의 한 방식이다. 문제는 관용에 대한 거부나 불관용의 지지가 아니라, 통치성의 한 방식으로서 관용 담론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이것이 갖는 탈정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효과들에 대해 싸워나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책의 요지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장은 4장인데, 이 장은 관용 담론이 이전 시대처럼 국가와 교회의 전유물이 아닌 통치성governmentality의 한 형태로 등장함을 다룬다. 오늘날 관용은 법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법적인 담론은 아니며 국가 담론인 동시에 대중 담론인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브라운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설명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데, 이 부분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유용한 설명으로도 읽힐 수도 있다. 푸코에 따르면 통치는 법의 부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의 배치 문제, 전술들tactics을 적용하고 법 자체도 전술로서 활용하는 문제인 것이다("Governmentality", in The Foucault Effect, 95). 법적이면서 비법적인 담론, 교육적, 종교적, 사회적 담론으로서 관용 담론은 근대적 통치성의 핵심인 “전체화하면서 개별화하는”omnes et singulatim 효과(사목권력 : 왕이나 지도자를 양떼를 이끄는 목자로 비유한 고대 오리엔트 사회의 사목 개념과 서구의 정치 사상의 결합에 주목, ) 역시 갖는다. 푸코가 통치성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는 것은, 1970년대 내내 그가 주목한 일련의 주제들, 주권 개념(죽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 비판, 국가 이론 및 정치경제학에 기반한 권력 개념의 해체, 국가와 자본의 탈중심화, 규율 및 조절, 규범 등의 권력 분석, 억압 가설을 비판하고 근대적 주체의 생산을 분석하기, 생체권력(‘삶을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 분석 등을 통합하는 것이다. 통치와 합리성을 결합시킨 통치성 개념은 제도와 지식에 의한 통치와 합리성 간의 근대적 결합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행위의 지도’conduct of conduct와 관련된다. 통치성은 주체들의 신체, 욕구와 능력, 욕망 등을 관리하며, 광범위한 비가시적 권력들과 다양한 과학적, 종교적, 대중적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
브라운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이 갖는 유용성을 긍정하면서도, 근대 정치 권력에서 국가가 갖는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한다(142). 현대 국가는 한편으로 세계화로 인한 주권의 약화와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표방해왔던 보편성의 위기로 인해 곤란에 처해 있는데, 관용 담론은 이러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강화시키고 정당화하며,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푸코의 말처럼 “국가의 통치화”(“Governmentality", 103)가 문제라고 해도, 국가는 여전히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 기반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142). 그러나 푸코는 제도에 종속된 이들이 제도에 부여하는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으며(푸코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를 간과한 것은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그의 부정적 입장 때문이다. 진리의 생산은 권력의 전제 조건이며, 우리는 진리에 철저히 종속되어있다는 것이다. “Two Lectures", Power/Knowledge, 93~94. 또한 푸코는 권력을 이론화하면서 의식과 주체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이 점에서 심리학적 행동주의와 몇몇 수렴하는 부분을 갖는다) 통치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정당성의 문제는 누락되어 있다(143). 명시적으로 브라운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의식, 정당성, 주체성의 문제가 푸코에서 누락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그녀는 푸코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부재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통치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주체의 생산, 조직, 동원뿐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는 정치권력의 장에서 여전히 이러한 정당화의 문제를 책임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44) 국가에 의한 관용 담론은 이 점에서 국가 정당성의 결핍 상황, 국가가 보편적 재현을 체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한 것이다(144). 제1의 시민덕목으로서 관용은 수동적인 시민상을 옹호하고, 사회적 삶을 혐오를 제어할 줄 아는 고립된 개인 및 집단의 상호작용으로 축소시킨다(150). 관용은 증오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 발생을 막기 위한 미봉책이 된다. 더 나아가 관용은 “차이를 자연화/사사화함으로써 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갈등을 개인화/사사화하고, 개인화와 탈연대를 지향하는 관용의 움직임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조장”(153)한다. 이처럼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용 담론 속에서, 차이는 영구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만다. 가령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 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130)이 되며, “국가는 평등한 대우와 평등한 보호에 대한 요구를 관용으로 대체해 버림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것의 평등한 향유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170)
이어지는 6장에서 브라운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관용 담론에 연루되는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관용의 자유주의, 외견상의 보편주의가 그 이면으로 갖는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어떤 문화는 관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고, 다른 문화들은 불관용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관용 담론의 속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에 지배되고, 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를 소유한다. 이러한 담론은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 대 문화라는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자유주의없이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245). 데카르트, 로크, 칸트, 롤즈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합리성은 문화적 장소를 초월해서 존재하며, 합리성을 문화나 주체성과 분리시킴으로써, 자유주의 담론은 개인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선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247). 이처럼 합리성과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정식화는 그 자체로 합리성과 의지의 영역에서 미성숙한 반대항을 함축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관용은 자율성이라는 선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역으로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미덕이 된다. 관용은 “자신이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을, 이미 그 전제로 삼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이는 비개인화된 비자유주의적 주체는, 관용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250)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참조점은 가장 주되게는 물론 칸트이지만, 브라운은 “관용적인 자유주의적 자아와 불관용적인 유기체적 타자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251)를 프로이트를 통해서 살펴본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집단적 정체성은 개인화된 정신의 반대라기보다는 성숙함으로부터의 퇴행이며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작업은 “성숙-개인-양심-억압-문명 대 유아스러움-원시-충동-본능-야만의 대립 구도, 즉 현대의 관용 담론에도 스며들어 있는 지극히 단순한 대립 구도”(254)에 기반해 있다. 철저히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개인이 집단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을 하나로 묶는 추동, 에로스를 통해 개인 간의 경쟁과 원자화가 극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잡단의 유대가 구성원 상호 간의 사랑으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는데, 고슴도치 콤플렉스와 같은 사랑의 양가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지나친 근접성과 고립이라는 두 위험 사이의 동요가 안정적인 친밀함으로 대체되는가? 이는 집단 내부의 에로스라기보다는 우리를 리비도 차원에서 결합시켜주는 집단 외부의 지도자나 이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집단은 집단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사랑과 이상화를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를 동일시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259).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만족에서 시작된 사랑하는 대상화의 이상화는 종종 극단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이렇게 이상화된 대상이 자아이상을 대체하고 자아를 흡수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분별력은 붕괴할 수 있다. 즉 집단은 개개인의 자아이상이 공통의 대상에 의해 대체되는 한에서, 공고하게 유지된다. 이러한 응집을 통해 집단은 공통의 나를 만들어내며, 이는 사회계약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상태이다(이러한 공통의 나commune moi의 구성은 루소의 사회계약 모델에서도 의도되었던 것이며, 루소 역시 시민종교를 사회계약의 필수적인 보충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파시즘이나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으나, 이 이론의 전제들은 오늘날 유기체적 사회를 위험과 불관용에 등치시키는 자유주의적 설명틀, 관용 담론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64). 관용 담론은 비자유주의 국가와 자유주의 국가를 나누고, 전자를 원시 상태로의 퇴행으로 간주하고 후자를 성숙한 자기 규제적 개인이 가능한 사회로 간주한다. 이는 문화에 선행하고 문화로부터 자율성을 가진 원자론적 주체를 전제하며, 개인의 자율성과 문명을 위협하는 집단 정체성을 억제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함축한다. 문명 담론과 결합된 관용의 통치성은 유기체적이고 비서구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인 타자를 제어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268).
결론적으로, 우리가 관용 담론에 맞서 선택해야 할 대안은 물론 자유주의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성찰하고, 자유주의가 자신의 타자로 삼아왔던 것들과 조우함으로써 자유주의 자체가 변환될 가능성을 개방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자율성과 유기체, 세속주의와 근본주의와 같은 허구적 대당을 해체하고, 자유주의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부분을 억제하여 자유주의 내에 항상 존재하는 혼종성을 의식하고 또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브라운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주의적 관용 담론의 탈정치화를 넘어서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실천해나갈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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