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세 개념 : 해방, 변혁, 시빌리테
1. 들어가며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변별되는 개념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의 첫 번째 개념은 정치의 자율성(autonomie)이라고 불리며, 이는 해방(émancipation)이라는 형상에 대응된다. 정치의 두 번째 개념은 정치의 타율성(hétéronomie), 즉 구조적이고 정세적인 조건들에 관련된 정치로서, 이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형상에 대응된다. 이 두 번째 개념의 아포리아로부터 세 번째 개념이 도입되는데, 이는 타율성의 타율성이다. 이 개념은 정치가 의존하는 조건들이 결코 최종심급(dernière instance)이 아님을 보여주며, 반대로 이 조건들을 결정적이게 하는 것은 조건들이 주체를 낳는 방식, 또는 조건들이 주체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주체는 자신에게 부과되거나 스스로 창조하는 동일성에 따라 행동한다. 동일성들, 소속들, 그리고 단절(rupture)의 상상적인 것(l'imaginaire)은 조건들의 조건이다. 이는 정치의 자율성과 타율성의 효과들이 설치되는 또 다른 장면/무대(scene)과도 같다. 해방이나 변혁으로 환원불가능한 하나의 정치가 이에 조응하며 나는 이것의 윤리적 지평을 시빌리테(civilité)라고 특징짓는다.
2. 정치의 자율성 : 해방
정치(la politique)의 자율성은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자율성이 아니다. 정치는 내포적(intensive)이라고 할 권리의 보편성을 정치가 참조할 때, 정치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정치의 자율성은 집단(인민, 민족, 사회, 국가...)이 구성원들의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로의 예속화(assujetisement) 및 제약, 차별의 확립에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해방의 정치에서 가장 결정적인 언표행위 중 하나인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자율성 선포의 전형적인 정식화는 평등-자유(égaliberté) 명제이다. 즉 자유 없이는 평등도 없으며 평등 없이는 자유도 없다. 평등한 자유라는 명제는 논박(elenchos)이라 불리는 논리적 형식, 어느 명제의 부정이 곧 자기 반박으로 귀착되는 논리적 형식을 갖는다. 평등한 자유는 무제약적(inconditionée)이며 이는 다음의 두 가지 결과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정치란 우선 권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총체인 인민(peuple/demos)의 자기결정의 전개이다. 정치적 주체가 처해 있는 조건들이나 자유와 평등에 가해지는 제약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으로 그것의 폐지는 즉각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민을 스스로에게서, 즉 자신의 고유한 자율성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모든 지배에 맞선 인민 자신의 민주주의 쟁취의 조건이며, 인민 자신의 책임이다. 다음으로 이 명제의 무제약적 형식은 또한 호혜성의 조항(clause de réciprocité)이라 부를 또 다른 명제를 초래한다. 이 명제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표현한다. 어떤 사람도 외적인, 일방적 결정이나 시혜에 의해 해방될 수 없고 오직 호혜적으로만, 상호 인정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평등한 자유는 정의상 개인들의 권리들이지만, 이는 집단적으로 쟁취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들의 본질은 개인들이 서로에게 부여하고 보장하는 권리라는 것이다. 정치의 자율성은, 시민권 외에는 기원도 목적도 갖지 않는 하나의 과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 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이때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은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근본적 권리들을 서로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인민이 스스로 만들어진다(se faire)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주체들이 서로를 위해 해방의 궁극적 원천 및 준거가 되는 한에서 정치의 자율성이 가능하다. 정치의 주체들은 보편적인 것, 즉 정의상 스스로가 그 속에 함축된 것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의 담지자들이다. 시민이기 위해서는 조건없이(ohne Eigenschaften) 인간인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순과 아포리아로 가득 차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스스로를 대표하고 보편적인 것의 대변인(porte-parole)이 된다는 관념의 경우가 그러한데, 말(parole)이 또한 하나의 권력 관계일 때부터 그렇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진정한 아포리아와 변증법의 측면들 가운데 하나를 분석했다. 그는 영속적으로 치안적 논리에 대립하여 평등주의적 논리를 내세우는 바른 정치가 ‘몫이 없는 부분’(part des sans part)의 구축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계쟁(litige)없이 민주적 정치가 없다면, 민주적 정치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몫이 없는 자들(또는 무소유자들)은 정치의(de) 주체도 될 수 없고, 정치 내의(dans) 주체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본적인 의미의 몫이 없는 자들은 따라서 전체일 수도 부분일 수도 없다(ni tout ni partie).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인 그들[몫이 없는 자들]의 실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이러한 곤란은 역사적으로 전위된다. 비-배제는 법적 사실로서 자율성의 최초의 유일한 언표행위 속에 있다기보다는, 그 언표행위가 새로운 부정을 통해 포함하게 되는 사후성(après-coup)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율성은 사회의 한 부분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부터 배제된 것(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이 명백해질 때 정치가 된다. 이러한 부분은 시민권의 가장 능동적인 대변자로 스스로를 제시하며, 자신의 해방을 일반적 해방의 기준으로 행사할 수 있는 분파, 즉 프롤레타리아들, 여성들, 유색인들, 성적 소수자들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든 해방의 역사가 이미 선언된 권리들의 향유를 위한 실제적 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시민권의 부인에 맞선 전투는 해방의 정치의 생명이다. 물론 이는 복잡성과 근본적인 양가성을 수반한다.
먼저 평등한 자유라는 명제의 진리에 호소하는 피지배자들,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편에 양가성이 있다. 그들은 인민의 인민으로 스스로를 제시하거나 보편계급으로 스스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자율성의 정치가 자신의 편에서 부정의 부정, 즉 하나의 절대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은 정치의 자율성이 우선 하나의 부정(négation)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치와 그 주체들의 이상화는 그것들을 정초하는 이상성(idéalité)의 맞짝이다. 이러한 이상화는 지배어들(maître mots)의 지명 및 창조에 의해 표현되며, 지배어들이 갖는 상상적 포획의 힘은 그것들이 기원적으로 발본적인 부정성 및 정치적 능력(capacité politique)의 실질적인 대리(représentation)의 거부를 표현해온 만큼 더욱 커진다(인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 이방인). 다음으로 이러한 양가성은 지배자들의 편에서 여전히 다른 측면을 지닌다. 모든 민주적 정치가 노예도덕을 표현한다고 설명하는 니체를 따라가 보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 및 합의 제조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계보학이다. 마르크스가 본 것처럼 기존 질서의 지배는 그 질서가 갖는 원칙의 이데올로기적 보편화에 상당히 의존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본 것과 달리 지배적 관념들은 피지배자들의 관념들이다. 헤게모니적 지배의 담론은 사실상의 차별로부터 권리의 평등으로 그 담론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 모든 항의들은 기존질서의 불의 앞에서 원칙의 동일성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이 때문에 극한에서는 주어진 조건정치의 창립(institution)을 배제된 자들의 권리로 선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양가성은 앞의 양가성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인간 해방과 시민권을 개념으로 갖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3. 정치의 타율성 : 변혁
“인간은 직접적으로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는 언명은 정치의 타율성 개념 또는 현세(Diesseits)의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정치의 자율성 개념과 타율성 개념의 양립불가능성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를 단일한 시나리오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마르크스는, 민주주의야말로 모든 헌정의 진리라고 여겼으며,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자신의 해방이 전인류의 해방의 시금석이 되는 보편계급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의 타율성의 발본적 관념(conception)을 해명하고 자코뱅주의의 가정들을 역전시켰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된 조건들(Umständen, Bedingungen) 속에서만 또는 하에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정치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의 타율성의 유일한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단점 주변에서 서로 대립하는 복수의 모델들이 있다는 것이다. 타율적인 정치라는 관념이 사라지지 않으면서, 물질적 조건들이라는 통념(notion) 자체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규율 사회, 권력의 미시물리학, 통치성 연구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주제들이 본보기가 된다.
마르크스에서 출발하여 두 가지 예비조건을 설정해보자. 우선 마르크스가 사고한 정치의 진리는 정치의 재료를 형성하고 이것을 스스로 물질적 활동으로 구성하는 조건 및 대상에 대해 정치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정치의 주체들(인민)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는 주체들의 자율성을 자신의 고유한 운동의 전제가 아닌 결과로 표현한다. 마르크스의 정치는 자유의 필연적 생성이라는 시각에 기입된다. 평등한 자유가 권리들을 초월적인 기원으로 돌려보내면서 권리들의 보편성을 전제한다면, 마르크스의 정치적 실천은 자유의 필연성, 인민의 자율성의 필연성을 자신의 결과로 생산하는 조건들의 내적 변혁이다. 둘째로 정치의 조건들은 역사의 토대나 경제적 구조로 특징지어진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경제적 토대를 보편화하고, 노동의 인간학을 택했다. 이러한 의미의 경제는 전형적으로 정치의 타자, 정치의 절대적 외부이다. 따라서 정치의 현실성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정치의 타자를 단락(court-circuiter)시킬 필요가 있다. 정치의 현실성은 혁명적 정치로서, 경제적 모순들의 발전과 다른 것이 아니다. 정치(la politique)는 이러한 제도의 비정치적인 조건들(따라서 최종심에서 현저히 정치적인), 즉 경제적 모순들로 소급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라는 모델 위에서, 새로운 사회운동들과 관련하여 경제만큼 결정적인 외적 역사적 조건들 역시 존재한다. 가족 구조, 가부장제 구조, 성적 지배관계, 상징적 자본의 구조(부르디외) 등등.
마르크스의 정리(théorèmes) : 첫째, 조건들이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이다. 곧 조건들은 자신의 모순들 자체를 대가로 해서 규칙적으로 재생산되는(생산, 소비, 교환, 법, 문화, 이데올로기적 실천들) 관개체적 실천들의 객관적 총화(ensemble) 속에 있다. 둘째, 사회적 관계들은 경제적 관계들이다. 그러나 경제적 관계들은 그것의 편에서는 사회적 관계들이다. 정치의 사회적 조건들에 관한 모든 분석은 그 조건들이 발휘하는 구조적 인과성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사회효과(effet de société)를 동시에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마르크스의 경우 이러한 원인과 효과의 구조는 자본의 생산 및 재생산 과정과 그 동역학(dynamique)이다.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이 과정의 함수로서, 마르크스의 야심은 임금노동 착취 과정이라는 동일한 기초 구조가 경제적 공동체와 동시에 국가 형태의 맹아를 구성하고, 역사 전반에 걸친 두 형태 사이의 의존 관계 및 상관 관계의 맹아를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관계들(조건들)은 역사를 갖는다. 이 역사의 의미는 경제적 과정의 동역학에 의해 설명된다. 정치적 실천은 항상 이미 이 변화의 도정에 삽입되며, 사회의 자본주의적 구조는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는 조건들의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변화 속의 변화 또는 변화의 미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는 주체 없는 것이 아니다(주체없는 것은 역사이다). 모든 정치 개념은 각각 종별적인(spécifique) 주체 개념을 함축한다. 문제는 정치의 타율성에 연계된 주체 개념의 곤란들을 보는 것이다. 헤겔의 직접적 상속자로서 마르크스의 경우, 정치적 주체라는 관념은 즉각 모순 관념에 준거한다. 주체화(subjectivation)는 변화가 변화하는 지점에서 생산되는 집단적 개인화이다. 문제는 유일하고 동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때 객관적 반경향의 형성과 주체화의 운동 중 무엇이 먼저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역량(puissance)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향과 반경향이 서로 싸우는 모순의 운동은 끝없는 나선이며, 이는 정치의 관점에서 이 운동이 주체화와 탈주체화(désubjectivation)의 국면들을 부단히 통과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모순적 경향들의 변증법의 기초는 권력쟁취가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적 축적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적인 사회적 양식들의 갈라짐(dissociation)이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축적 속에서 서로에게 맞서 발전한다.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라고 부른 사회화 양식이 있고, 다른 편에는 그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이 있다. 이 관계의 근본 요점은 그것이 하나의 갈라짐의 문제라는 것,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인들을 변용(affecter)시키거나 자신에 반한 선택을 하도록 하는 양립 불가능한 실존 양식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의 타율성과 인민의 자율화 사이의 연결고리가 재발견된다. 요컨대 마르크스가 이론화한 바의 정치는 구조적 조건들의 총화가 끼치는 효과들의 가변성을 묘사하면서 이러한 갖가지 실천 양태들을 연결하는 주체화의 한 도정이다.
이제 가장 역설적이고 또 가장 계발적인 대조, 푸코의 몇몇 이론화들과 대조해보자(권력 관계들에 입각해서 제도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권력관계는 행위들에 대한 행위의 한 양식이며 사회적 연계 속에 깊이 뿌리내린다. 정치적 과제는 권력관계들과 자유의 자동사적 성격 간의 갈등에 대한 분석, 가공, 문제제기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존재론에 대해 일종의 전도를 행하면서, 마찬가지로 조건들과 변혁이라는 단어에 중심적인 자리를 부여한다. 푸코의 이론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건들과 변혁 간의 거리가 최소화되고, 서로 동시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푸코는 정치에서 제도들, 거대 실체들, 거대 기계들(국가, 당, 계급)의 독점을 제거하고자 할 때에조차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정치의 지평으로서 역사와 사회에 관해 지속적으로 말한다. 사회는 서로 조건짓고 변혁하는 행위들의 복합체이다. 어떤 행위도 다른 행위의 실행의 새로운 조건들을 창조하지 않으면서 다른 행위를 변혁할 수 없으며, 어떤 행위도 다른 행위의 담지자의 자유를 변혁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조건지을 수는 없다. 또한 개인들은 이러한 복합체의 모든 독특성들(singularités), 이러한 독특성들 모두에 연결된 육체들이다. 역사적 갈등은 항상 이미 권력관계들에 본래적이다.
푸코가 정치를 구성하는 방식은 정치의 자율성의 재구성과는 무관하다. 다소 안정된 사회적 형식들, 행위의 규범들은 구성되는 반면, 권력관계는 진정으로 구성하는 것(constituante)이다. 권력관계는 결코 하나의 의지나 의지들의 대결로서 사고되지 않는다. 이는 푸코가 육체들에 대한 준거(référence)를 개인성의 궁극적 지시대상(référent)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방식에 관련된다. 권력관계와 예속화는 지배와 예속(법의 부과)의 견지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들을 형성하고 어떤 행위들(action)에 배치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기술들(technologies)로 해석되는 방식에 관련된다. 정치적 행위들은 이제 전략들(stratégies)의 견지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이는 상대편 개인성의 반작용들을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하도록 육체적 성향들을 변형(transformation)하는 것에 관한 일반적 도식이다. 이는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형상 및 장기간 지속되는 사회적 구조에도 통합될 수 있으나 그 효력의 원리는 항상 미시정치적(micro-politique)이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곤란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것은 저항(résistance)이라는 통념이다. 모든 권력은 저항을 전제하지만, 권력관계가 또 하나의 지배관계가 될 때 ‘자유의 자유화’가 취할 수 있는 형식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명확하게 귀결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저항들의 우연적 생성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권력관계들에 관한 푸코의 분석은 역전불가능하고 절대적인 권력관계들의 비대칭성이라는 질문에 의해 어떤 한계에 부딪힌다. 무엇보다 극단적 상황들이라는 문제, 그 속에서 주체들의 개인화로서 권력의 기술들이 총괄적인(global) 하나의 적대에 자리를 양보할 뿐 아니라, 죽음의 질서 및 파괴의 질서 속에서 발휘되는 벌거벗은 힘에 자리를 양보하는 상황들의 문제가 있다. 생명만이 통치될 수 있고 훈육될 수 있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다양한 형태의 절멸(extermination)의 실천들이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배(domination)의 뿌리 깊은 구조들이라는 질문이 또 있다(권력관계들은 지배의 상태와는 다른 것으로, 한 개인 또는 사회집단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이를 유동성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 운동의 모든 역전가능성을 막는데 이를 때 우리는 지배의 상태와 대면한다. 권력관계들 속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의 가능성이 있다. 저항의 가능성이 없다면 권력관계들도 없다. 권력관계들이 있다면 이는 도처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배의 경우들에 문제는 사실 저항이 어디에서 형성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관계들의 비대칭성이 역전이나 전위의 즉각적 가능성에 항상 준거하는 전략적 현재라는 시간을 잡아 늘리도록 강제된다. 구조들(제약, 법, 규범의 질서)이 나타났는데, 이 구조들로부터 주체는 분리되어 있고, 이 구조들은 육체의 친밀함 속에서까지 주체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권력을 고정시킨다. 이 구조들에 대해 푸코는 단지 사회운동들에 대한 고전적인 호소에 의존할 뿐이다. 푸코의 유일한 독창성은 사회운동들의 범위가 사회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지배관계들 전체의 범위와 동연장적이고, 그 운동들은 어떤 미리 설정된 조직형태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마침내 갈수록 푸코의 관심을 독점하는 것은 자기의 기술들(techniques de soi)에 대한 분석인데, 이는 또 다시 곤란의 장소이다. 저항의 관념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고 이는 무한퇴행에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푸코는 더 이상 권력을 분석하지 않고, 개인의 자기와 그것의 생산 또는 창조의 양식(자기의 미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 스토아적 영감의 운동은 지배의 양태가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에 의해 여전히 결정되는지를 아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운동은 최종분석에서 미완성이고 열려있으며, 아포리아적이다. 이 아포리아는 자기 또는 개인성의 통념들에 관련되며, 푸코는 이를 비판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단지 경험적이고 동시에 절충적인 방식으로 취했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것은 푸코의 아포리아와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를 나란히 놓는 것이다. 이 곤란들은 대립되는 것이지만 변혁이라는 중심적 관념에 본래적인 두 곤란들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을 정치적 실천의 외적 조건들로 놓는 동시에 그 속에서 정치적 실천의 혁명적 분열과정이 발전되는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세계의 변혁(Veränderung der Welt)을 조건들의 총체를 포괄하는 유효한 변혁 전체의 궁극적 지평으로 제시한다. 세계의 변혁은 세계적 정치와 세계적인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가정한다. 이러한 통념은 모순들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이율배반들에 대한 칸트적 비판이라는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다. 변혁 개념은 단지 우리를 무한퇴행 속에 연루시키고, 이는 세계가 실제로 세계화(지구화)된 것으로 드러날 때부터 완전히 가시적이 된다. 반대로 푸코는 자기라는 질문 및 그것의 구성에 관한 질문을 의식과 실체의 지반으로부터 육체성(corporéité)이라는 지반으로, 따라서 금욕(ascesis)이라는 지반으로 전위시키면서, 이러한 배리(paralogisme)를 다른 형태로 되풀이한다. 그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노동을 수동적인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능동적인 것으로 만든 한에서 말이다. 이러한 이중구속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것만큼이나 칸트적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다. 이로부터 (주기적으로 부인되는) 숙명주의와 사실상의 주의주의 간의 잠재적 진동이 유래하며, 이때 니체에 대한 준거는 중화제(correctif)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물론 변혁이라는 관념의 발본적 정식화가 아포리아에 부딪힌다는 사실 때문에 변혁 관념 자체가 자격박탈이 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그러한 사실은 영속적 발명의 원동력이다. 이러한 관념이 진정한 불가능성에 직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면을 지나가야 한다.
4. 타율성의 타율성 : 시빌리테의 문제
푸코가 정치를 후면에서 공격하는 문제들이라고 부른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들이다. 이는 폭력(과 잔혹), 동일성(과 동일성의 정치), 합리성과 보편성의 도착적 효과들(effets pervers)에 의해 발생한다. 우선 종족 정화에 관한 페티 벤슬라마의 텍스트(이방인의 이방성은 그가 다르다거나 그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가 너무 가깝고 친숙하고 자기와 분리할 수 없도록 섞여 있는 어떤 자라는 것이다. 동일성과 관련된 병으로 인한 모든 파괴는 정확히 이러한 조건에서 유래하며, 고유한 것의 재영유는 모든 정화의 슬로건이다. 이러한 증오는 적에게 승리를 거두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육체의 표상에 섞여 있는 이방의 육체와 육체의 이방성을 근절하려는 절단과 절멸의 실천이다. 그만큼 동일자와 타자는 밀접히 섞여 있다)와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남성은 다수적이고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다. 다수성은 어떤 표준, 남성-어른-백인-인간 등을 뜻한다. 생성이나 과정으로서 소수와 집합이나 상태로서의 소수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생성 속에서 우리는 탈영토화되며, 흑인 조차 흑인이 되어야 하며, 여성들조차 여성이 되어야 한다.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흑인-되기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에서 출발해보자. 첫째로 폭력의 문제와 동일성의 문제의 융합에 의해 구성되는 수수께끼의 항들을 정확히 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에서 타율성의 타율성으로 돌아가게 한다. 둘째, 동일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특징짓기 위해 시빌리테라는 개념을 시험할 것이다.
폭력을 그 극단적인 형태들, 즉 초자연주의적이고 초객관적이며 초주체적인 형태들, 지향성의 발작들 사이에서 영속적으로 진동하는 잔혹(cruauté)의 형태에서 고려해보자. 오질비는 최근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말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폭력의 종별적으로 현대적인 새로운 형상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는 일회용 인간의 생산, 인간 자재 착취, 잉여 인구들을 죽도록 방치하는 절멸(전염병들, 집단학살들, 자연재해 등)의 예를 든다. 이러한 비주체성(a-subjectivité)의 환상적 압력과 함께 우리는 푸코가 이론화한 모든 권력관계의 정반대 편에 와 있다. 또한 우리는 정치에 대한 권리의 요구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 있다.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면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직접 스스로를 사고하고 제시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 폭력은 체계의 재생산과 양립불가능한 저항들을 파괴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본래적인 억압이다. 그러나 비기능적이지만 세계경제의 계획 속에 기입되어 있는 수백만의 총체적 제거와 함께, 우리는 구조적 폭력의 한계를 넘어섰고,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 안으로 진입했다.
폭력의 초객관적 형태들, "주소없는 폭력들"(오질비)의 일반화, 폭력의 초주체적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거기서 파시즘의 일상적 형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문화의 한복판에서 가능한, 증오의 이상화(idéalisation de la haine)의 증식 속에 있다. 이는 초주체적 폭력이라 불리는데, 왜냐하면 이와 같은 행위들은 의지와 목적을 갖고 행해지지만, 극한에서 그것들이 실행하는 의지란 주체가 그 도구에 불과한 하나의 사물(chose)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속에 있는(있다고 그가 믿는) 동일성, 타자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배타적이고 ‘우리’와 ‘자기’ 속의 이타성의 그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실현을 오만하게 명령하는 이러한 동일성 말이다. 이는 혼합이나 탈고유화(dépropriation)의 위험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선호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러한 각각의 극단적인 형상들에서 폭력의 비전환성(non-convertibilité)이라는 환원불가능한 사실의 표지를 볼 필요가 있다. 어떤 폭력은 억압하거나 추방할 수 없고, 역사를 만드는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전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폭력은 따라서 동시에 정치와 역사의 재료이고 경향적으로 그 전개의 영속적인 하나의 조건이 되지만, 이는 역사성의 장 내에서 정치의 이행 및 정치의 범위 내에서 역사적 조건들의 이행의 한계를 표시한다. 이 때문에 정치의 타율성을 넘어, 해방의 정치만큼이나 변혁으로서의 정치의 구성을 다시 의문시하는 타율성의 타율성을 보아야 한다. 이때 극단성이나 한계들은 지정불가능하며 고정되지 않는다. 폭력의 초객관성은 지배 관계들의 자연화 속에 적어도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고, 폭력의 초주체성은 ‘죽음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로 충분히 잔인하고 불가해한 정신적 권위의 제국으로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지평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들의 역사란 동일성 자체가 고정되거나 변형되는 방식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다만 세 가지 정도의 테제를 제안해보자.
첫째, 모든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관개인적이다. 그것은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으로 경험될 수 있으나, 그것은 실재적이고 상징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 역으로, 집단적 동일성, 소속의 관계나 우리의 구성은 개인적인 상상적인 것들 가운데 현실 속에서 인가되는 관계의 구성일 뿐이다. 상상적인 것은 개인들이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하다. 둘째, 동일성보다는 동일화들(identifications)과 동일화의 과정들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어떤 동일성도 주어지거나 단번에 획득될 수 없고(고정될 수는 있지만), 항상 불균등하고 미완성인 하나의 과정, 다소간 강력한 상징적 보증을 불러내는 위험한 구성들로부터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일화는 타자들로부터 오며 항상 아직 타자들에 의존한다. 조건들의 조건은 자기와 타자들의 역할, 연결과 단절의 상징화가능성이 의존하는 제도들의 실존에 의해 구성된다. 셋째, 모든 동일성은 모호하다. 이 모호성은 우선 주체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떤 개인도 특유하게 하나의 유일한 동일성, 유일한 소속을 갖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개인은 불균등하게 함축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등적인 복수의 동일성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일의적일 수 없는 동일성 그 자체의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의 동일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동시에 복수의 기능을 수행하며 항상 과잉결정된다. 그것은 항상 복수의 상징적 준거들 사이에서 이행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스스로에 대해 착각하고 다른 것으로 오인될 위험에 노출된 채, 항상 빗나가 있다(à coté).
이러한 테제들은 적어도 폭력과 동일성들 간의 결합이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해준다. 동일성의 견지에서 숙고할 때, 두 극단적인 상황들은 똑같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상황이 정상적인 실존과 교통이 파괴되는 자율성의 영점 상태에 상응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러한 상황들 중 하나는 개인성을 집괴적(massive)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유일한 일의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 포스트모던한 어떤 유토피아뿐 아니라 시장의 유연성 요구에 순응하여 - 동일성으로 하여금 모든 역할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즉 절대적으로 한 사람이 되거나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도들의 역할은 동일화들과 소속들의 다면성(multiplicité), 복잡성, 갈등성을 제거하지는 않으면서, 감축하는 것(réduire)이다. 제도들과 대항제도들 없는 사회란 없다. 그러나 제도들이 정치는 아니며, 제도들은 정치의 수단들 또는 결과들을 구성한다. 정치가 총체적 동일화와 부동하는(fluctuante) 동일화의 불가능한 한계들 사이에서 동일화들의 갈등을 규제하는 한에서 그러한 정치는 시빌리테라고 불린다. 시빌리테는 모든 폭력을 제거하는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해방, 변혁)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폭력 그 자체의 역사화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동일화의 극단성들 사이를 벌려 놓는다/배제한다(écarter).
시빌리테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 첫 번째 거대한 문제는 시빌리테로서의 모든 정치가 필연적으로 ‘위로부터’, 주인의 행동 및 권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 아니면 그것이 또한 ‘아래로부터’ 개인들과 집단들의 고유한 노력과 힘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철학은 다중(multitude)이 본래 폭력적이기 때문에 정의 및 사회질서 확립에 있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시빌리테의 관념을 다중의 자율성이라는 관념, 즉 민주적 형태들과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이 법철학에서 제안한 테마를 검토해볼 수 있다. 헤겔은 역사 속에서 폭력이 법치국가, 즉 개인들의 자유화를 목표로 구성되는 국가에 의해 예방적으로 처리된다면 전환가능하다는 변증법적 확신(“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을 가지고 있다. 헤겔의 관념은 동일성들과 일차적 소속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집단적인 정치적 동일성이나 국가적 소속의 특수한 표현 및 매개로 재구성하기 위해 잠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차적 동일성들의 차별적인 취급, 그것들의 인정의 위계화, 그리고 하나의 탈자연화를 가정한다. 다시 말해 국가 또는 상급의 공동체에 의해 미리 통제된, 따라서 그 결과가 보장되는 탈동일화 및 동일화의 동시적인 이중의 운동이 있다. 이러한 운동은 내포적 보편화의 효과를 생산하는데, 가족 공동체의 자연적 속박에서 개인성을 분리시킨다. 요컨대 개인들은 구속(adhérence)에서 가입(adhésion)으로 이행한다. 우리는 헤겔을 따라 탈동일화-동일화(영유-탈영유)의 운동이야말로 시빌리테 개념의 핵심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헤겔주의자라고 선언할 수 없는 이유는 헤겔의 삼중적 모순 때문이다. 첫째, 헤겔은 자유화의 대가인 일차적 동일성들의 해체가 그 자체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과정이며, 하나의 구속으로 기능할 소속의 탈통합(désincorporation) 또는 절단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한다. 둘째, 헤겔은 보편주의적 공동체(국가)가 공화적이고 세속적일지라도 또한 하나의 공동체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한다. 그것은 근대에 하나의 민족적 또는 의사민족적공동체이고 그 주체들은 또한 공통의 소속을 상상하며, 상상적인 것 속에서 공유된 자신의 정치적 동일성의 실체, 즉 의제적 종족체(ethnicité fictive)을 구성한다.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탈동일화의 동일화이다. 이는 야만적인 것을 경계 밖으로, 타자의 방향으로 퇴출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매개를 구성하는데, 이는 경계 내에서의 평화와 문명의 향유와 상관적이다. 세계화가 새로운 단계를 넘어설 때 그것은 통합의 갈등의 확대재생산을 준비한다. 세계화된 공간 속에는 국가와 인륜(Sittlichkeit)의 등가물 같은 것은 없다. 셋째, 이는 헤겔이 부인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그 모순의 발전을 오판한 것이다. 헤겔은 국가가 오직 자신의 타자인 경제적 과정들(시민사회)에 본래적인 부정성을 통합함으로써만 자기 고유의 보편성을 구성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과정들이 윤리적 보편과 정치적 제도들에 봉사하는 주변적 기능이 되기는커녕, 추상 노동의 역량 외의 모든 능력을 분해할 수 있다는 것을 헤겔이 이해했을까? 한 쪽에서 그는 사적 소유의 자율화 운동이 빈곤의 양극화를 필연적으로 생산한다고 분명히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시빌리테의 조건들 자체에 대해 파괴적인 계급들의 양극화를 주변적(marginal) 현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헤겔이 주변에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서는 중심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조건들 속에서, 어떤 한계들 속에서 국가가 시빌리테의 구성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20세기의 역사에서, 다중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존엄을 인정하고 행정이나 공적 공간에 시빌리테의 규범들을 도입할 것을 강제하기 위해 연대했다. 다중은 스스로를 문명화하기 위해 국가와 국가의 제도들을 활용하는 한에서 이를 행했다. 이는 단순히 노예도덕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같은 주도권은 다중의 자율성이 충분치 않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시빌리테의 시각에서 ‘아래’(le bas)란, 다시 말해 다중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시각에서 다중은 소수자들이거나 또는 발본적으로 탈동일화를 모든 동일화에 대해, 규범적인(표준적인) 집단적 인정에 대해 우선시할 소수자로 되기의 과정들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취한 예들(흑인, 여성, 유대인)이 유지가능한 것인지, 그 무슨 예를 취한들 그것이 유지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논하지 말자. 다만 우리는 똑같은 변증화(dialectisation)가 대칭적으로 다수자라는 통념에는 적용되지 않아야만 하냐고 물을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성찰 전체를 반파시즘의 시각 속에서,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시각 속에 위치시킨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의 파시스트-되기가 불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개인성의 변환(transmutation)이 어떤 단계에 뿌리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다수자적 다중들의 반파시즘과 소수자적 다중들의 반파시즘 사이에 일종의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이 지배한다고 시사할 수는 없는가? 각각의 관점은 상대방에 대한 논박을 통해 성장한다. 욕망의 미시정치 편에서 보면,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대중운동들의 조직은 하나의 헤게모니 기획에, 전체주의적(totalitaire)이지는 않더라도 총체적인(totale) 이데올로기의 구성에, ‘증오의 이상화’로 귀착할 위험을 항상 지닌 표상에 매여 있다. 사회적 시민권의 거시정치의 편에서 보자면, 집단들의 모든 형성 및 변형의 탈영토화를 겨냥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들(agencements machiniques de désir)은 사회적 연관을 자연화시키는 흐름들과 발본적 탈개인화의 흐름들, 교통·소비·통제의 거대기계의 이면에 불과한 이 흐름들과 본의 아니게, 그러나 우연히는 아니게 공명할 위험을 항상 갖는다. 탈통합은 양날의 무기이다. ‘아래로부터’ 시빌리테라는 정치적 가설은 따라서 저항들의 다수자-되기의 전략과 소수자-되기의 전략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다. 만일 이론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정세(conjoncture)의 문제이거나 정치적 기술(art)의 문제이다. 아마 그것은 또한 단적으로 예술(art)의 문제일 것인데, 시빌리테의 수단들은 언표들, 기호들, 역할들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아포리아는 불가능성(impasse)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재정식화하자면, 어떠한 정치의 개념도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각각의 것들은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 없이는 해방도 시빌리테도 없으며, 해방 없이는 시빌리테도 변혁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전제들로부터 하나의 체계, 하나의 불변의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는 또 하나의 정치철학을, 즉 정치(la politique)의 문제들을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표상으로 전화시키는 도식만을 획득할 뿐이다. 위의 개념들이 정치와 관련되는 한에서 그것들은 개별적인 길 위에서만 절합될 수 있다(s'articuler). 이러한 길들은 진리처럼 필연적으로 독특하며 따라서 모델이 없다.
1) “인민이라는 것이 인종이나 주민이 아닌 한에서 정치는 존재하고, 빈민들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주민의 일부가 아닌 한에서 정치는 존재하며, 프롤레타리아가 산업 노동자 집단이 아닌 등등에 한해서만 정치는 존재한다. 인민이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는 특정한 형상이나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특정한 형상을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보충으로서 기입하는 주체일 때 정치는 존재한다. 이러한 몫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바로 정치의 쟁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치적 계쟁(litige)의 대상이다. [...] ‘부자들’과 ‘빈자들’ 사이의 싸움은 이러한 말들이 나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며, 그들이 공동체를 다른 식으로 셈하는 범주들을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2008, 도서출판 길, pp. 246~247.
2) 이것이 해방의 정치와의 차이점이다. 발리바르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대표자로서 루소를 꼽고, 정치의 타율성의 대표자로 마르크스를 꼽는다. 양자는 전통과의 단절 및 인민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유비될 수 있다. 그러나 인민의 봉기와 정치적 주체의 자율성에 관한 루소주의적 관념이 일종의 관념론의 쇄신이라면, 마르크스의 계급 정치는 정치의 타율성으로서 경제를 제시함으로써 유물론의 쇄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pp. 230~235.
3)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 4장에서 마르크스의 경제주의와 진화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 이데올로기와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로 실현되었는데, 이러한 종말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철학에 대해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진보가 아닌 과정(procès)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과정은 경제적 개념도 도덕적 개념도 아니다. 모순적 경향의 변증법은 단지 경향의 역전이나 반경향의 확립에 의해서 해결되거나 감축될 수 있는 것으로서, 헤겔과 반대로 모순의 화해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논리적이고 정치적 개념이다. “마르크스가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수학적 은유를 사용하여 사태를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즉 역사의 진행 속에서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곡선의 일반적 형태로서 ‘적분’(intégrale)이라기보다는 ‘가속화’의 효과로서 미분, 따라서 각 계기마다 작용하고 전진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들의 관계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문화과학사, 1995, p. 138.
4)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늘 저항이 있다고, 특정한 행동에는 대항행동의 가능성이 항존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예속이 아닌 저항을 택하도록 하는 것, 선택의 선택의 문제 또는 자유의 자유화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는다. 자유의 실천이 가능해지고 저항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자유화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 점에서 푸코는 저항의 생성을 위한 저항, 저항을 가능하게 만드는 저항이라는 무한퇴행에 들어서게 된다. 이 문제를 도외시한 채, 그는 다만 사회운동이나 자기의 배려라는 실존의 미학에 의존할 뿐이며, 이는 결국 정치적 비관주의로 흐를 수 있다.
5) 푸코에서 권력은 모든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고, 권력은 지배자를 통해 작용하는 이상으로 피지배자를 통해서도 작용한다. 계급, 국가, 법 등은 단지 권력을 통합한 것에 불과하며 힘들의 관계의 전략과 관계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억압적 권력 개념에 대한 푸코의 비판은 권력에 대한 니체적 영감에 관련된다. 힘이 힘과 더불어 갖는 관계는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그 힘이 다른 힘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힘들이 언제나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외부를 가리키게 된다. 여기서는 끊임없는 힘의 생성이 존재하며, 외부의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 독특성들의 방출이 된다. 들뢰즈는 이때 힘의 이러한 영향을 주는 힘과 영향을 받는 힘 모두와 혼동되지 않는 제3의 권력을 저항이라고 부른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의 주요 개념들에 대하여」,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pp. 446~456. 그러나 이러한 니체에 대한 의존은 푸코적인 변혁의 정치가 마주치게 되는 주의주의와 숙명주의 사이의 진동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의견이다.
6) 폭력의 감축을 통해 정치의 공간 자체를 개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시빌리테의 정치는 반폭력의 정치의 문제설정과 관련된다. “아마도 이는 정치의 가능성을 부단히 삭제하는 주체적-객관적 폭력의 각각의 형태를 모든 곳에서 퇴치한다는 목표를 동시에 확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적 실천도 더 이상 사고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일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더 이상 단지 폭력의 지양(비폭력으로의 지양)으로도 그 규정적 조건들의 전화(대항폭력의 적용을 요구할 수 있는 것)로도 사고될 수 없다. 정치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 도구도 아니고, 더 이상 그 자체로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는 그것이 그 자체 속에 담지하는 환원불가능한 이타성의 요소와의 대결이 불확실한 쟁점이다. 내가 여기서 어쨌든 가설적으로 ‘반폭력’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러한 또 다른 무한한 순환성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1995, p.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