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책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조금 읽다가 어디에 뒀는지 영 모르던 책을 찾았다. 그러니까 6년 전, 강박증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히스테리자가 되자고, 또는 되도않는 언타이틀의 '책임져' 드립을 날리던 때가 잠시 생각난다. 인문학이, 철학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던 시절, 지금은 얼마나 달라진건지, 책을 선물해주신 이웃 분께서는 건강히 잘 계신지 또 궁금하다. <책을 펴내며>의 8~10쪽을 옮겨본다. 

(...) 

그리고 서울 사당역, 눈길이 가는 곳마다 어지럽게 나붙은 광고들 속에서 '희망드림프로젝트' 같은 광고가 눈에 띈다. "서울형 복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등장한 신형 복지정책이다. 이 코미디 같은 광고는 '희망 없는 빈곤'이 근본 문제임을 역설하며 희망과 의욕을 줄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 자기성찰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 중요하다며 '희망의 인문학'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이 희망드림프로젝트에 관한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자립의지가 있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이 복지정책은 어쩐지 윤리적인 악몽처럼 느껴진다. 빈곤은 어쨌거나 사회적 현실이다. 빈곤을 그냥 불편이나 불행이라 부르지 않고 빈곤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삶 밖에서 들이닥친 현실임을 알린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희망 없는 빈곤'이란 말 속에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어울려서도 안 되는 차원이 맞붙는다. 희망이 나의 내밀한 삶의 세계에서 비롯된다면 빈곤은 경제적인 생존을 규제하는 바깥 세계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희망 없는 빈곤'이란 말은 빈곤을 나의 책임과 자율의 세계로 떠넘기며, 빈곤을 낳은 원인을 용케 나에게 돌린다. 

내가 못난 탓에 형편없이 살게 되었다는 생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유별나게 다가오는 것은 이제 그런 생각이 어느 한 사람의 변덕스런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조직하는 원리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희망드림프로젝트가 말하는 복지정책은 희망을 품고 자신을 보살필 줄 아는 개인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복지정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주도적인 창의적 학생을 내세우는 교육정책이나 자기의 인적자산 혹은 경력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라는 고용정책이나 모두 다같이 자신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개인을 겨냥한다. 게다가 자존하고 자립하고 자활하라는 윤리적 다그침 속에는 네 삶의 밖의 세계에 어떤 허튼 소리도 하지 말라는 위협적인 목소리가 깔려 있다. 네 스스로 힘껏 살아보라는 말 속에는 그리고 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속삭임 속에는, 사실은 절망과 분노는 내색조차 하지 말라는 협박이 숨어있는 셈이다. 만약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우리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자신에 관한 진단과 힐난, 처방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악인보다 더 불편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제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칭얼대고 투덜대며 곧잘 분을 터뜨리는 사람보다 우리가 더 성가시게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눈길에는 무엇이 더 정의로운 세계인가를 살피고 판단할 수 있는 자리가 처음부터 빠져 있다. 거기에는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리만치 오직 자신하고만 대면하고 있는 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내가 타인을 대하는 것은 오직 그가 자신을 존중하는 개인일 때 뿐이다. 그래서 나와 다름없이 자기를 돌보고 책임지는 개인들로서 서로가 서로를 대면하는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는 생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이런 세계에서 내가 겪는 고통을 발설하는 방식은, 흔히 듣듯이 상처를 받았다는 식의 푸념이다. 거기에는 항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친밀함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데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현실을 개인들끼리 자신의 꿈과 의지를 실현코자 분투하는 세상처럼 그린다. 가난이나 차별을 비관하여 죽은 이에게서 우리는 가난과 차별을 보기보다는 그의 심약하고 무력한 태도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한편 이런 세상에서 나 혹은 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 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지나치게 발랄하거나 자신감에 넘쳐 살아가는 이들이 한편에 있다. 다른 한편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가리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의욕도 없는, 곧잘 자살 충동에 빠지는, 남들이 이루어놓은 성취를 가로채기 일쑤인 쓰레기 같은 삶이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빈민들의 항의를 빈정대는 목소리 안에서도 이런 생각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게으름뱅이나 "루저"들이라고 힐난하는 목소리에서 우리가 식별하는 것은 그런 저속한 욕설을 퍼붓는 이들을 덮누르는 자신에 관한 불안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얼개 안에서 타인에 대해 내 삶과 운명을 같이 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는 자각으로 이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타인들을 뚜렷한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는 힘도 잃어버린다.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신하는 것은 무력하게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는, 마치 자신은 자신의 불행에 관해 무고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진력하는 듯한 가난하고 헐벗은 이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것을 거의 매일 이른바 '휴먼다큐' 프로그램을 통해 쳐다본다. 그것을 보며 우리가 되돌려주는 것은 연민에 가득 찬 흐느낌이지 분노와 연대의 감정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진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물음을 더 깊이 파헤쳐보기 위해 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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