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 <정치, 동일시, 주체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pp. 133~147. 

Jacuqes Ranciere, <Politique, identification, subjectivation>, Aux bords du politique, La fabrique édition, 1998, pp. 83~92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은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은 이질발생적인 두 과정의 마주침이다. 첫째는 통치의 과정으로, 이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자리들과 직무fonction(국역 - 기능)를 위계적으로 배분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는 치안police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평등의 과정으로, 이는 아무나n'importe qui와 아무나 사이의 평등이라는 전제와 그 전제를 입증하려는 고민을 따르는 실천들의 놀이로 이루어진다. 이 놀이는 해방emancipation이라고 불린다.


 (방)해tort를 다루기. 조제프 자코토에 의하면, 모든 치안이 평등을 부인하며, 치안 과정과 평등 과정은 공약불가능하다. 이는 개인들의 지적 해방만이 유일하게 가능하고, 정치 무대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치안이 평등을 부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치안은 평등을 (방)해한다faire tort고 말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평등의 입증이 그 위에서 (방)해를 다루는 형태를 취해야 하는 무대이다.1)


 이렇게 해서 세 항이 있다. 치안, 해방, 정치적인 것. 우리는 해방 과정에 정치la politique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은 (방)해를 다루는 가운데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한 공동체의 원리나 법칙, 고유함propre의 현실화가 아니다. 정치는 아르케를 갖지 않는다. 정치는 아나키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그것을 지칭하는데, 플라톤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아르케도 척도도 없다. 데모스의 행위, kratein의 독특함은 원초적 무질서나 오산mécompte을 증언한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이름이자 그것의 분할의 이름이며, (방)해를 다루는 것에 대한 이름이다. 인민의 정치는 자리와 직무에 대한 치안적 분배를 (방)해한다. 인민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거나 더 적기 때문이다. 이는 치안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하나-더un-en-plus의 힘이다.


 현재의 난국은 정치를 한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실화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통치 규칙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치안 원리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러한 동일시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치안과 다르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기-해방의 모습을 띠었던 해방의 관념은 또한 이기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는데, 이는 도덕 문제가 아니라 논리 문제이다. 해방의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고유함un propre impropre의 정치이다. 해방의 논리는 타자론hétérologie이다.


 해방 과정은 아무 말하는 존재와 아무 말하는 다른 존재 사이의 평등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 여성, 흑인 등등. (방)해의 희생자와 희생자의 권리를 내세우는 범주의 이름은 언제나 익명anonymedml 이름이자 아무나의 이름이다. 정치적으로 유일한 보편이란 평등 뿐인데, 이는 인간성이나 이성의 본질에 각인된 가치가 아니다. 평등은 각각의 사례 속에서 전제되고 입증되며,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보편이다. 진리의 자리는 토대나 이상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의 topos논거/장소, 논증 절차에서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진리의 언어는 언제나 방언적이다. 보편성은 그것들의 결과를 증명하는 논증 과정, 노동자도 하나의 시민이며 흑인도 인간이라는 등등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을 말하는 논증 과정에 있다. 사회적 항의protestation 일반의 논리적 도식은 이러하다. 우리는 시민, 인간 등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예컨대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헌법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프랑스인들의 집합에 속하는가 아닌가? 또는 최초의 프랑스 여성운동가들의 경우 : 프랑스 여자도 프랑스인인가? 일견 부조리해보이는 이러한 문장은 사회적 불평등의 책략을 폭로하는 논리적 균열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균열을 하나의 관계로 절합하고(국역 누락) 논리적 비-장소non-lieu를 논쟁적 증명의 장소로 변형시킨다.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soi가 아니라, 자기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의 소송에서 검사장은 그에게 직업을 묻고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장은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고 반박하지만,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라고 응수한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검사장이 옳았겠으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블랑키가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사회 집단의 이름이 아니라 셈-바깥hors-compte, 내쫓긴 자outcast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라틴어 proletarii는 번식하는 자들, 이름없이 살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으며 도시국가의 상징적 구성 속에서 하나의 부분으로 셈해지지 않는 그저 살고 번식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나의 이름, 내쫓긴 자들의 이름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들, 따라서 이 질서의 잠재적 소멸인 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화 과정은 이처럼 탈정체화/탈동일화désidentification 혹은 탈계급화 과정이다.2)


 주체는 사이에 있는 것un in-between, 둘-사이에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사이에 - 여러 이름, 지위, 정체성들 사이에, 인간성과 비인간성, 시민성과 그것의 부인 사이에, 도구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말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지위 사이에 -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에게 고유한 이름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사이에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이 평등을 현실태로 만드는 것, 혹은 (방)해를 다루는 것이다. 정치란 하나의 불가능한 동일시에 바탕을 둔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는 1968년의 슬로건.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또한 타자론, 타자성altérité에 대한 세 가지 규정에 따른 타자autre의 논리이기도 하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치안 논리에 따라서 고착된,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이름들, 잘못된 명칭들misnomers의 문제다.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인 바, 이 증명은 그것의 전달 대상인 하나의 타자를 전제한다. 이는 비록 하버마스 식의 대화 혹은 합의 추구의 장소가 아닐지라도,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합의는 없으며, 손해 없는 소통이란 없고, (방)해의 해결도 없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서사와 문화는 모두 논쟁의 줄거리를 하나의 목소리가 되게 하며, 이 목소리를 한 신체의 현시가 되게 한다. 서사와 문화라는 개념들은 주체화를 하나의 동일시가 되게 한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화의 삶은 목소리와 신체의 거리, 두 정체성들 사이의 틈새로 만들어진다. 평등의 과정은 차이의 과정이며, 이 차이는 다른 정체성의 현시나 두 정체성 심급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차이가 현시되는 장소는 한 집단의 고유함이나 문화가 아니라, 논증의 topos이다. 토포스가 전시되는 장소는 틈새이며, 정치적 주체의 장소는 틈새 혹은 균열이다. 이름들, 정체성들 혹은 문화들 사이에 있음으로서 함께 있음.


 이는 확실히 불편한 입장인데, 이는 메타-정치적 담론의 발전에 자리를 내준다. 메타-정치3)는 치안의 관점에서 정치를 해석하는 것이다. 메타-정치적 해석의 패러다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인데, 그것은 인간과 시민의 차이를 속임수의 징표로 본다. 시민이라는 천상의 정체성 뒤에 인간, 소유자라는 지상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방의 정치는 인간에 대한 동화와 시민에 대한 동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의 정치의 주장에 따르면, 권리 선언의 보편성은 선언이 가능케 하는 논증들의 보편성이다. 인간으로도 시민으로도 셈해지지 않는 그들 혹은 그녀들의 권리들을 포함하는, 권리에 대한 무수한 증명들의 연출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는 보편주의냐 정체성주의냐의 선택지에 갇혀 있지 않다. 선택지는 오히려 주체화와 동일시 사이에 있다.        





1) 랑시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대립시킨다. 치안은 몫의 배분을 다루는 것으로서 지배가 수반되는 과정이고, 국가의 행정 전반이 해당된다. 반면 정치는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봉기적 순간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적 주체화를 탈동일화로 보면서 치안이나 AIE(알튀세르)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동일성/정체성 또는 동일시/정체화가 없는 정치가 과연 가능한지, 또한 사회권을 비롯한 권리들의 문제는 치안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2) “Politics is a matter of subjects or, rather, modes of subjectification [...] Descartes's ego sum, ego exisito is the prototype of such indissoluble subjects of a series of operations implying the production of a new field of experience. Any political subjectification holds to this formula. It is a nos sumus, nos existimus, [...] Any subjectification is a disidentification, removal from the naturalness of a place, the opening up of a subject space where anyone can be counted is made between having a part and having no part.” Rancière, J., Disagreement : Politics and Philosophy, translated by Julie Rose, Mi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Press, 1999, pp. 36~37.


3) 랑시에르는 <<불화>> 4장 from archipolitics to metapolitics에서 정치를 archipolitics, parapolitics, metapolitics로 구분한다. metapolitics는 맑스로 대표되는 정치 전통인데, 경제가 정치의 진실이라는 도식으로 요약된다. 이때 맑스의 인권 비판은 가령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맑스적 정치의 핵심은 정치의 거짓을 드러내고, 정치의 진실은 경제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결과로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정치란 단지 사물의 관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국가재산으로 전화시킨다. 2) 인간에 대한 지배 대신 “사물에 대한 관리 및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하고, 계급 국가는 소멸한다. 3)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의식적·계획적 조직”으로 대체된다. “하나의 거대한 계획”에 입각해서 사회적 생산력이 전국에 적절하게 배치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듀링론󰡕, 새길, 1987, 300-303쪽과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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