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이라는 학제 내에서도 이런 식의 논의가 가능할 수 있구나, 하고 다소 놀랐다. 저자는 석사 때 문학사회학 쪽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매우 많은 사상가들이 인용되지만 특히 벤야민의 비중이 크다. 재미있게 읽은 편이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 큐에 묶으려는 의욕적인 시도가 다소 무리한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들도 종종 보였다. 특히 저자 자신도 때때로 의식하고 있는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렇게 드러나는 진정성/속물성, 도덕/윤리라는 간단명료한 이분법에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는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가?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1부
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진정성眞正性authenticity은 본래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 (...) 진정성의 윤리는 루소와 헤르더 이후의 낭만주의에서 시작되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적 감성 속에 구현되어 있는 도덕적 기획으로서,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고유한 욕망 사이에 형성된 간극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기 통치 기획의 한 양태이다(19).”
"이런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진입한 듯이 보인다. 진정성이 와해된 자리에 새롭게 들어서는 삶의 태도는, 도구화된 성찰성을 자원으로 성공과 치부를 반성 없이 추구하고 ‘부자 되세요’를 덕담하면서 재테크와 부동산투기와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과 ‘동물성’이다"(20).
Lionel Trilling의 Sincerity and Authencity의 논의. 신실성과 진정성의 차이.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서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은 동시에 타인에게도 진실되기를 바라는 태도. 따라서 신실성을 추구하는 자는 내면과 외면 사이의 상위나 모순을 느끼지 못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의 욕망 사이의 단절이나 간극을 느끼지 못함. 이에 반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에서 부과하는 역할 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의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 즉 불행한 의식을 갖고 있는 주체성. 신실성과 진실성이 상이한 도덕적 이상으로 대립되는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또는 양자의 대립은 헤겔에서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불행한 의식)의 대립에 상응. 인간 정신의 자기 실현에 있어 국가나 부 같은 외적 권능과의 관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개체의 의식은 외부의 사회적 힘과 조화를 유지하며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것이 자신의 외부를 부정하지 않는 고귀한 의식. 이 조화로운 관계가 파괴되면 정신의 본성인 자유를 추구하면서 외적이고 사회적인 힘과 대립하는 의식이 생성되며 이것이 비천한 의식. 이 의식은 권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 가능한 긍정적 태도인 고결성, 정직성, 우아함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경멸과 반항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비열하고 음흉하고 저열한 태도를 보여준다. 비천한 의식은 순진하지 않으며, 외저 강제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 이성의 간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의식이다. 고귀한 정신에서 비천한 정신으로의 전환은 타락이 아니라 진보. 비천한 정신은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을 절감하며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세계의 실정성을 부정하는 한결 고양된 정신. 공동체의 규범과 자유로운 자아의 이상의 충돌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절박한 자기 실현의 세계가 소외된 영혼의 세계이자 근대적 교양의 영역인 부르주아 시민사회. 신실성이 불가능한 시대에 개인은 교양 또는 문화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상실된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찾아야 함. 그것이 소설의 이념이자, 모더니티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정신적 가치인 진정성의 이상. 문예사적으로 디드로, 헤겔, 루소, 제인 오스틴, 사르트르, 조지프 콘래드, 프로이트를 관통하는 이념(25~8).
1960년대 미국에서 진정성의 윤리의 부흥. 청년 세대의 등장, 소외에 대한 감수성, 다양한 정체성들의 인정투쟁의 가열. 실존주의의 유행 등. 1980년 대 한국의 386 세대. 도덕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이들 386세대를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주체로 생산한 진정성의 레짐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는 규범적 우세종normative dominant(29~30).
진정성의 구조 : 찰스 테일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정성은 인간이 도덕관념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18세기의 사유에 뿌리내리고 있음. 샤프츠베리나 허치슨의 ‘내면의 목소리’, 루소의 존재감sentiment de l'existence, 헤르더의 자기 척도 등 내적 판단의 원리에 의해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영위하는 존재. 자신의 자아를 다듬고, 개선시키는 자신과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자율적 주체로 정립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소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 진정성의 주체는 무엇보다 내향적인 성찰의 주체이며 이 진정성의 주체가 어떤 삶이 옳은 것인가라고 묻는 참된 자아와의 사이에 건설하는 대화의 공간이 내면. 이 내면은 자폐적, 유아론적 공간이 아니며, 진정성의 주체는 공동체가 부과하는 도덕률을 성찰하고 사적 성찰에서 공공성으로 전향. 윤리적 성찰을 통해 구성되기 시작하는 진정성의 주체는 공저 의미 지평에의 앙가주망을 실행 혹은 기도함으로써 집합적으로 의미있는 행위의 실천 주체(학생, 노동열사, 시민군)로 성립되며, 이 행위가 다시 공동체 도덕적 지평에 하나의 모형으로 정립되어 다른 주체화의 대상들에게 일정한 도덕적 압력을 행사(32~5).
한계 : 1 진정성의 폭력 - 진정성의 개념은 예술품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데 사용되었던 진품성의 개념에서 연원하며 여기에서 유일성의 신화가 발생.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의 계기와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도덕’의 계기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간다는 진정성의 구조적 행위 패턴은 실상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것. 윤리적 진정성은 진정성에 이르는 모든 절차적 고뇌, 방황, 번민, 주저, 우유부단의 제스처 전체를 신성화하며, 윤리적 진정성의 순수한 형태는 행위나 실천이 아니라 행위나 실천의 극단적인 지연(망설임, 주저, 실천적 무능)에 깃든다. 90년대의 진정성은 내면의 공간, 자의식의 공간, 사소설적 공간으로 확충되어 감(36~8). 2 요절 - 열사. 죽음을 통해 진압되지 않는 정치적 생명, 즉 bios의 불멸성의 화신들, 비록 육신은 소멸되었으나 그 죽음이 망각됮 않고 공동체에 의해 의례적으로 기억됨. 또한 예술의 영역(유재하, 김현식, 김광석, 기형도, 김소진 등)에서 진정성의 신화. 진정성은 일종의 청춘의 형이상학으로서, 물질적 재생산, 사소한 욕망의 추구, 목숨의 비루하지만 절박한 호소 등 삶의 일상성은 저급한 것으로 타기됨. 진정성의 추구와 긴밀하게 결합된 정의의 이상은 속되고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를 죄악시. 비극의 주인공이 너무나 진지하여 먹고 마시는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표상되듯이, 진정성의 주체 역시 고매한 정신과 도덕적 이상과 불굴의 투지의 소유자일 뿐 욕망의 덩어리인 육체의 자발성에는 맹목적이며, 진정성에는 비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결여되어 있기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는 항상적인 급진성(죄와 고독 혹은 파멸 등)을 동반하게 되어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괴물일 수 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진정성의 주체 이후 요절자의 이미지를 대신하는 것은 97년 체제의 생존자의 이미지(경제적 생존, 입신출세주의 또는 노골적인 속물주의, 생물학적 생존 등 부유, 성공, 장수)이다. 생존주의라는 새로운 마음의 레짐 속에서 주체는 한편으로 나르시시즘, 자폐, 탈정치화 등을 통해 사적 세계를 성채화하는 모나드로 전락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성찰성의 도구화, 탈내면화, 사회적 과시, 대중추수주의 등을 통하여 타인의 취향, 가치,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속물로 전락함(38~42)
이제 진정성은 오직 기억과 무용담 속에서 공허하게 빛나거나 표현주의적 라이프스타일로서 상업적으로 생산되어 상품으로 소비되어, 진정성의 소멸은 상업적 보편화와 결합된다.
“그러나 진정성의 물적 토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진정성을 규범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스노비즘의 징후일 수 있다 (...) 진정할 수도 없고, 진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포스트-진정성 시대의 아포리아이다. 우리는 이 아포리아를 당분간 매우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대면해야 한다. (...) 진정성의 해체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진정성을 역사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장치’들의 형성과 발명이 이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45)”
2장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진정성은 늘 자기 배반적인 것이다. ‘진정한 것’이 어떻게 쉽게, 한 차례에, 특정 행위 속에, 결정적으로 주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항상적 모색이어야 하며, 부단한 변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결국에는 진정성의 실현에 실패함이어야 한다. 진정으로 진정한 것은 진정성을 향한 향방 속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실현되어 실체로서 주어진 사물이나 사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의 윤리 속에는 무언가 병적으로 진지하고 순결하고 폭력적인 정언명령이 숨어 있다. 따라서 진정성이 삶에 의해서 그 순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성은 자신의 최고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 운동을 멈춰야 하는 것이다.”(54~5)
한국 근대사 최초의 진정성의 속물은 김수영, 또한 고급 속물로서 미시마 유키오(56)
코제브의 논의 : 1938~9년의 헤겔에 대한 콘퍼런스에서 코제브는 역사와 인간의 종언을 행위의 종언(유혈적 전쟁과 혁명의 종언, 세계와 자기의 이해로서 사변적 철학의 사라짐)으로 설명. 소련과 중국은 덜 발전된 미국, 가난한 미국이며 이후 이들이 선택할 삶의 양식도 미국의 그것, 동물로 회귀한 삶. 또는 성찰적 내면이 결여된 타인지향적인 삶(리스먼, <고독한 군중>) 탈역사적 동물은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적 힘, 그러한 반대항을 경유해야만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감벤의 용어로 la nuda vita일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구원이나 불멸이 아닌 단순한 생존. 예컨대 미국에서 시작된 몸만들기physical fitness(스스로의 몸을 조형하고, 성형하고, 개조)로 대표되는 동물적 삶의 궁극적 텔로스는 젊음 혹은 생명을 가능한 한 연장하는 것. 그런데 코제브는 56년에 일본을 방문하고 미국과는 또다른 포스트 히스토리의 삶의 유형(속물)을 목격.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는 일본인들 특유의 속물주의(노가쿠, 다도, 꽃꽂이 등)는 철저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 내용을 완벽히 박탈당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감. 속물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타인지향적 삶의 구조에 종속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시, 과시, 유희의 대상으로 삼음. 변증법적 운동의 공간으로서 역사 속에서 인간은 그가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억압하고 있는 동물성을 초월하거나 통제, 부정하는 한에서 인간일 수 있다.
원조 몸짱으로서 미시마 유키오 :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국경선으로서의 육체. 인간은 육신의 모나드. 타자와의 근원적 단절. (64)
부정성 없는 동물/속물들은 원한 감정도 없지만 또한 주인도 아닌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 용도파기된 부정성(바타이유). 문학과 예술에서 엔터테인먼트로의 이행(가라타니). 최후의 인간들(니체)은 가련한 안락 외에 삶에서 아무런 야망도 소망도 없는데 이것이 귀여운 삶(68~9)
귀여움은 권력자가 갖는 감정, 살아남게 하는faire survivre 생명권력의 모성적 차원은 기르고 감싸고 귀여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 80년대의 억압적 권력은 자신의 대상을 전투적이고 진지하고 진정한 존재로 구성하나 민주화 이후 일상공간을 관통하는 미세한 생명권력들은 어리고 칭얼대는 존재론적 유아들로 구성. 탈숭고, 탈내향, 탈사회, 탈정치, 탈정신적 문화변동의 핵심. 타협주의와 생존주의. ex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69~72)
3장 스노비즘과 윤리
자기계발서들의 홍수와 ‘스놉이 되어라’라는 지상명령. 세속적 성공 또는 공격적 생존에 적합한 스놉의 주체성 형성. 스놉은 더 이상 위선적이며 부도덕한 자가 아니라, 건설적이고 도전적이며 생산적인 주체의 프로젝트. 이중의 지배체제로서 스노보크라시(1. 스노비즘으로 무장한 도구적 성찰성의 주체들이 한국사회의 지배층으로 부상 2. 자아의 통치, 자기 배려의 테크닉과 관련)(81)
스노비즘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안적 가능성인 윤리적 삶. 그러나 윤리적 삶을 절대 준거로 하여 스노비즘을 비판하려는 경솔한 충동은 경계되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스노비즘, 역-스노비즘을 만들 수 있음(83)
고전적 스놉은 근대의 산물. 위계적 신분질서가 파괴되고 자유경쟁과 평등의 원리로 재구성되는 시민사회에서 인정투쟁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존재. 이들은 야심가이며 전술가이지만, 인정투쟁의 최종 목표로서 자기의식의 완성 내지 자립을 망각하는 허약한 실존이며 인간적 약자. (83~4)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과 스노비즘의 정신역동. 주체 -> 매개자 -> 대상(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주인공의 죽음에서야 비로소 욕망의 삼각형을 이탈하며 회심conversion. 회심없는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속물성(아렌트). 순전한 무사유와 도구적 성찰성의 전횡. 추와의 변증법적 관계를 상실한 허구적 아름다움으로서 키치(아도르노). “전적인 키치의 제국에서는 대답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적인 키치의 본래적인 적은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쿤데라,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스놉은 도덕적이나 비윤리적인 존재의 전형. 푸코에서 모럴과 윤리의 구별(<성의 역사> 2권). 모럴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공동체의 규칙, 명령들이며, 윤리는 모럴에 대한 자신 고유의 판단과 성찰 및 부정과 의문을 수반. 윤리의 목적은 자유이며 망설임, 주저, 행위의 중단 같은 수동성을 동반. 디오게네스, 사도 바울 등 좋은 삶의 형식은 현 상태 내부에 균열을 내는 것.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는 모럴 부재가 아니라 모랄 과잉의 시대이며 부재하는 것은 윤리(96~100).
4장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
“우리는 어떤 점에서, 문학의 죽음이 단지 문학-제도의 소멸이나 약화가 아니라 성찰적이고 참여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장치로서의 진정성이 소멸되는 사회변동의 한 징후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108)
가라타니의 주요 테제 :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시나 희곡이 아닌 소설의 소멸에 기초. 그가 특히 염두해두는 것은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3장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테제를 제출. 사르트르를 계승하는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죽음을 선고하는 문학은 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변혁을 빚어내는 정신, 운동, 앙가주망을 의미함. 이전의 문학에서는 1. 근대문학(리얼리즘 소설)은 객관적 재현장치인 원근법, 언문일치, 묵독 등을 통해 세계와 내면 공간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내면적 주체를 형성 2. 근대문학은 지적 능력과 감성적 능력을 매개하는 상상력을 활용하여 타자들과의 공감 능력을 훈련시켜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의 형성에 기여. 가라타니가 말하는 문학의 죽음은 문학이 윤리적 주체형성의 기제와 상상된 공동체로서 nation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 비록 문학은 죽었으나 문학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과 실천은 지속 가능.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근대문학 = 소설에게 희망을 품지 않고 떠나야 함(ex 김종철, 아룬다티 로이) (108~110)
근대문학의 부정성 : 헤겔은 사상과 반성이 예술을 능가하고 주관적 내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낭만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예술의 종언을 선포. 보들레르에서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으로 나타나는 모더니티. 보들레르에 따르면 전일적인 상품 세계 속에서 시는 일종의 절대 상품, 자신 이외에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 유미주의 선언해야 함. 무용성-자율성.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문학과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죽음을 이미 자신의 탄생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 근대문예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자신의 몰락Untergang이다. 죽음은 근대문예의 끝을 규정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그 시작을 표시하는 구조적 필수요인인 것이다. 가라타니 종언론은 이처럼 ‘몰락으로서의 근대문학’이라는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맹점을 노정한다.”(118). 블랑쇼에 따르면 근대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의 소멸에 대한 응시이며 자신의 불가능성에 대한 성찰임.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에서 블랑쇼는 혁명이 개체의 삶을 죽이고 전체의 자유 속에서 그 죽음을 다시 살리듯이 언어는 사물을 죽이고 언어라는 상징 속에서 보존한다고 주장(헤겔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실성 참조). “종언은 근대문학을 종결짓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발생론적 구조이다. 가라타니의 착오는 종언의 구조적 성격을 엄폐하고 이를 단순한 사건적 차원으로 오인한 데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일종의 과잉진술이다. (...) 가라타니는 블랑쇼적인 문학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르트르적 문학의 불가능성 앞에서 근대문학 전체를 포기하는 몸짓을 취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문학을 포기하고 문학 외부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가라타니의 희망은, 문학과 정치가 감각적인 것의 차원에서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을 피상적인 수준에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122)
문학이라는 장치(푸코의 정의. 권력과 지식의 교차점에서 단순한 생명을 주체로 전환시키는 주체화의 기제). 가라타니에 따르면 근대문학이라는 장치는 반성적 주체와 nation의 구성원을 형성하는 힘을 가진다. 1. 기하학적 원근법, 묵독, 언문일치, 고백 등은 공동체와 분리된 고독한 내면의 주체, 반성하는 주체를 형성 2. 근대적 nation은 실제로 경험되고 접촉되는 인간 그룹이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 수단과 커뮤니케이션의 메커니즘(신문, 소설)을 통해 상상되는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 가라타니는 근대인식론의 세 가지 능력인 지성, 감성, 상상력을 당대의 현실적 제도인 국가, 시민사회, nation과 등치시킴(<세계공화국으로>). 사회적 통합과 연대의 원리는 공감, 연민, 동정 등을 통해 가능하며, 미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에 핵심에 자리잡게 됨. 그러나 사실 근대문학이 창출했던 집합의 형식이 반드시 nation일 필요는 없으며 공감의 공동체는 언제나 nation과 민족주의를 범람할 수 있음(123~8).
근대문학의 주체는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면을 매개로 한 성찰 능력을 갖고 있으며, 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감력(상상력)을 매개로 공동체 구성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 근대문학의 주체는 성찰과 참여, 내관과 실천, 이성과 정념, 고독과 연대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가치를 역동적으로 결합시키는 인간유형,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129) 진정성의 주체는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정치적 프로그램,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삶의 공공적 형태를 위한 운동에 관심. insurrection, revolt.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이런 점에서 보면 ‘진정성’이라는 시대정신의 종언을 소설의 종언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과소진술이다. 죽은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장치(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인 동시에 그 장치가 형성하는 특수한 인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라타니의 논의는 문학의 운명에 대한 논의에서 사회의 운명에 대한 논의로 연계되었어야 했다.”(131)
“... 리스본 대지진은 칸트나 루소의 사유에도 그 흔적을 남긴다. 가령,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암묵적으로 거대재난 앞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사회구성이라는 방편으로서의 사회구성이라는 발상을 전제하고 있다.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서 볼테르와 서한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루소는 <언어기원에 관한 시론>(1781)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 사회는 대부분 자연 재난의 작품이다. 대홍수, 해일, 화산 분출, 대지진, 번개로 인한 산불 등은 어떤 한 지역의 야만인들을 두렵게 하여 흩어지게 만들었는데, 훗날 그것들은 다시 공동의 손실을 공동의 힘으로 복원하려는 야만인들을 결집시켰다.”(언어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2, 77쪽) 재난은 사회를 파괴하지만, 근원적인 수준에서는 흩어진 개체들을 하나의 사회로 결집시키는 역설적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루소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동정심pitié의 권능이 존재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받는 타인의 위치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상상력’에 다름 아닌 연민의 능력을 갖고 있다. 환언하면 재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불운으로 그 재난의 희생자가 된 타자들을 연민한다. 연민의 한계가 사회의 경계이다(인간불평등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3, 80~84쪽). 그리하여 루소는 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최초의 말은 ‘나를 사랑해줘요’가 아니라 ‘나를 도와줘요’였다”(언어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2, 88쪽). 도처에서 ‘나를 도와줘요’라는 언어가 터져나오는 상황,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급박한 재난의 상황이 우리를 하나의 사회에 속한 공동의 운명체임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베네딕트 앤더슨을 선취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사회는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 집합체가 아니라 (재난 속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구축되는 상상된 공동체인 것이다. 4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