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194)이며 “덧없이 달아나는 몇몇 정의들을 붙잡으려는 길고 긴 추적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207).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 후설의 유럽의 인문 정신의 위기에 관한 유명한 강연(<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에 수록)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후설의 요점은 그리스 철학에서 연원한 ‘유럽의’ 인문정신의 위기는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세계를 기술적이고 수학적인 대상으로 축소하고 생활세계(Lebenswelt, 삶의 세계로 번역됨)를 제거해버린 유럽 과학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창시자는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세르반테스(13)이기도 하며, 철학과 과학이 망각한 구체적인 삶과 인간의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은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탄생했다. 세르반테스는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의 더미와 맞서야 한다는 것, 불확실함의 지혜를 지니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는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17) 쿤데라가 주장하는 소설의 지혜는 애매성과 불확실성의 지혜이다. 아이러니는 화나게 만드는데, 이는 아이러니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확실성을 앗아가기 때문이다(199). 동시에 그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를 긍정하면서,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15)이라고 본다. 탈은폐로서 진리가 소설의 모럴이기도 하다면, 쿤데라가 인용하는 다음의 얀 스카첼의 말은 비단 시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정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 오래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143) 후설과 하이데거를 자주 언급하면서 쿤데라가 밝히듯, 소설의 존재 이유는 생활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세계-내-존재인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며, 그렇기에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이다. 시간은 위대한 소설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을 결코 흐리게 만들지 못한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되는 것이어서 소설가들이 발견해 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198) 하는 것이다. 쿤데라가 소설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들은 다분히 현상학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지만, 2부의 대담에서 그는 현상학적이라는 수식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예술을 철학이나 이론적 경향의 한 갈래로 보는 사람들을 무서워한다고 밝히면서, 소설은 이미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을, 마르크스 이전에 계급투쟁을, 현상학자들 이전에 현상학을 실천(예컨대 프루스트)했다는 것이다.(52) 쿤데라는 시나 철학은 소설을 포용할 수 없지만 소설은 시나 철학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으며, 다른 장르들을 수용하는 경향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본다(98).
그런데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하는 것은 그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가 작업의 가설로 삼은 정의에 따르면, “시인이란 그가 들어갈 수 없는 세상에 어머니에 의해 이끌려 들어와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게 된 젊은이다.”(51) 물론 쿤데라가 보는 소설은 물론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만일 소설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소설의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소설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세계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했던 것처럼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현상의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세계의 모델인 소설은 전체주의적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이는 정치, 도덕적 구분임과 동시에 존재론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적 진리는 상대성과 의혹과 질문을 제거하고, 따라서 소설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27).
잠시 유럽 소설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소설들은 무한해 보이는 세계를 편력하는 여행담들이었다(<운명론자 자크>, <돈키호테>). 그런데 디드로 이후 반세기가 지난 후 발자크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는 지평선이 경찰, 법률, 재정, 범죄,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 제도의 배후로 사라지고, 역사라는 기차에 실려간다. 훨씬 오래 후 엠마 보바리에게 지평선은 울타리처럼 좁아졌고, 일상의 권태 속에서 꿈과 몽상만이 중요하게 된다. “잃어버린 외부 세계의 무한함은 영혼의 무한함으로 대치된다. 유럽의 가장 멋진 환상 중 하나인, 대체할 수 없는 개인의 독자성이라는 환상이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19) 그러나 이 무한한 영혼에 대한 꿈은 전능한 사회의 초인간적 힘이 인간을 장악하면서 그 신통력을 잃는다. 이제 개인은 겨우 성 앞에 선 K, 측량 기사에 지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에마 보바리처럼 꿈 조차 꿀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이라는 괴물하고만 싸워야 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으며, 카프카, 하세크, 무질, 브로흐의 소설에서 괴물은 바깥에서, 역사에서 온다. 이 역사는 비인격적이고, 다스릴 수도,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쿤데라가 역사를 다루는 네 가지 방식(57~9)은 그의 소설적 입장과 관련해서 새겨볼 만하다. 그는 첫째로 모든 역사적 정황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소품처럼 취급하며, 둘째로 역사에서 단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셋째 원칙은 역사적 연대기는 사회의 역사를 기록하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원칙은 역사적 정황은 소설 속 인물에게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가 실존적 상황으로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두브체크가 소련군에 투옥되었다가 돌아온 에피소드는 실존의 매우 일반적인 범주로서 ‘나약함’을 보여준다(이 책의 처음 제목은 ‘비체험의 위성’이었다고 한다. 190쪽. 비체험이란 인간 조건의 한 특질로서, 사람은 단 한번 태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도 프라하의 봄은 단순히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차원에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라는 실존적 상황으로 묘사된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고 소유자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문득 그가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자연의 주인도 아니며, 역사의 주인도 아니고, 자신의 주인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파괴된다. “신도 사라져버렸고 인가도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주인은 누굽니까? 지구는 주인 없이 공허 속을 전진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죠.”(64)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확인의 영역에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116)이며 소설적 성찰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은 단지 “실존의 탐구자”(68)일 뿐이며, 카프카의 표현을 빌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다른 집을 짓는 사람”(196)이다. 따라서 소설가의 일대기를 쓰는 전기 작가는 소설가가 세운 것을 허물고 허문 것을 다시 세우는 셈으로, 소설의 가치도 의미도 밝혀주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관련하여 2부 소설의 기술에 대한 대담과 4부 예술의 구성에 대한 대담에서 쿤데라가 자신의 소설적 기법을 언급하는 부분 역시 흥미로운데, 그는 한정된 지면에 현대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특유의 다성적 대위법 뿐만 아니라 생략의 기법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생략은 “사물의 본질로 곧장 갈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작곡자 레오 야나체크의 요구이기도 했다. 즉 “기법의 자동성과 장황함을 제거해 소설을 압축”(109)하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 시간적 길이의 템포의 변화는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까지도 내포하는 것으로서, 쿤데라는 그 자신이 스물다섯살까지만 해도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음을 고백한다(133). 특히 가벼운 형식과 무거운 주제의 결합(<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쿤데라 소설의 두 가지 원형적 방식은 “첫째, 7이라는 숫자에 바탕을 둔 건축술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는 다성적 구성, 둘째, 희극적, 동질적, 극적이면서 그럴 듯하지 않음과 맞닿아 있는 구성”(140)의 방식. 이 밖에 쿤데라가 제시하는 소설에 관한 여러 개념어들도 6부에서 제시된다. 가령 유명한 서정적 바람둥이(모든 여자들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는)와 서사적 바람둥이(여자들에게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하는)의 구분과 헤겔의 <미학>에서 다루어진 고전적인 분류(서정적인 것은 자신을 고백하는 주체의 표현이고 서사적인 것은 세계의 객관성을 파악하려는 정열로부터 오는 것)와의 상응 등등.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거대한 미학적 혁명”이자 “예술적 기적”인 카프카에 대해서는 주로 5부에서 다루어진다. 그의 경이로움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만큼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간에게 남은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에 있다(43). 카프카의 세계는 관료화된 세계인데, 이때 관료성은 여러 사회 현상들 중 하나가 아니라 “세계의 본질로서 관료성”(73)이다. 그렇다면 대체 ‘카프카적인 것’은 무엇인가?(147~151) 우선 첫째로 카프카에게 제도는 그 자체의 법칙만을 따르는 메커니즘, 그 법칙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인간적 이해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이해되지도 않는 것이다. 둘째로, 카프카적 세계 속에서 서류는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흡사한데, 진정한 실체인 그것에 비해 인간이라는 육신을 지닌 존재는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측량 기사 K나 프라하의 엔지니어는 서류 속 신상카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거나, 또는 이보다 더 하찮은 존재이다. 권력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내며, 권력이 신처럼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그 자신을 향한 종교적 감정을 촉발한다는 것 등, 카프카 본인이 종교적 알레고리를 쓰지 않았더라도 카프카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셋째로,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하고 평온을 찾기 위해 스스로 처벌받고자 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죄가 벌을 만든다)와는 달리, 카프카에서는 벌 받는 자가 자신이 벌을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부조리함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벌을 받는 사람은 평온을 찾기 위해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합리화하려 한다. 즉 벌이 죄를 만든다. 넷째로 카프카적인 것에서 코믹한 것은 불가분한데, 카프카적인 것은 우리를 농담의 내장 안으로, 코믹한 것의 무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비극은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우위안을 제공한다면, 희극은 이보다 가혹하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216).”(이중 셋째, 넷째 특징은 지젝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활용하는 카프카적인 것에 상응한다)
쿤데라가 보는 카프카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카프카적 세계에는 자본주의도 사유재산도 계급투쟁도 없다. 그것은 전체주의도 아니며(그러나 비일관적이게도 쿤데라는 또한 전체주의 국가와 관료제를 동일시한다), 당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다만 카프카적인 것은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153)인 것이다. 관료제는 자발성, 창의성, 자유가 없고 단지 명령과 규율만이 있는 복종의 세계이다. 이는 그 거대한 활동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카프카적인 것은 단순히 커다란 사회 규모에서 생산되는 관료제와 소외, 비인격화로서만 요약될 수는 없다. 카프카 소설은 공동체와 인간적 교류에 대한 열렬한 욕구가 아니다. 오히려 쿤데라가 보기에, 측량 기사 K는 공동체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부정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지옥이다. 그는 단 한순간도 혼자가 아니다. “외로움이 아니라 ‘박탈당한 외로움’이라는 저주, 바로 이것이 카프카의 강박관념인 것이다!”(159) 측량기사 K가 절망적으로 찾는 것은 인간적 유대감이 아니라 획일성인데, 이것 없이 그는 현실과의 관련을 갖지 못한다. 이전에 사람들이 다양함,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남에서 이상과 승리를 찾았다면, 미래에는 획일성으로부터 상실이라는 것이 절대적 불행, 인간적인 것 바깥으로의 추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15).
그런데 어떻게 카프카는 이 우울한 非時적 소재를 매혹적 소설로 바꾸어 놓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관청은 멍청한 기구가 아니에요. 그것은 멍청함이 아니라 오히려 환상적인 것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랍니다.”(163) 이것이 바로 카프카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인데, 그는 관료주의적 현상을 통해 인간과 인간 조건뿐만 아니라 관청의 유령적 성격에 내포된 시적 잠재성까지 보았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 생전에 보지 못했던 관료제의 진실을 파헤쳐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예견이 아니라 언젠가 역사가 나름대로 발견하게 될, 이미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 오래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 그러나 이때 시인이 저 뒤쪽 어디에 숨겨진 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어떤 진실(저절로 주어지고 앞에 있는 아마 쿤데라는 여기서도 하이데거를 본받아 Vorhandensein을 염두하는 듯)에 봉사하기 위해 ‘참여’한다면 그것은 시의 고유한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가 소설, 또는 소설이라는 시가 정치 등 여타의 분야에 대해 지니는 근본적인 ‘자율성’ 때문이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등 일체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강박적으로 선을 그으려는 그는 또한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나타난 “권력에 대항하여 벌이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항하는 기억의 투쟁과 같다”라는 말이 소설의 메시지로 간주되는 것에 반대하면서, “망각은 절대적 불의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위안”(185)이라고 한다. 미소뮈즈misomuse(187)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에 치욕을 느끼고 그것을 증오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종종 사변적이고 지적인 미소뮈즈들은 예술을 미학의 바깥에 종속시킴으로써 즉 참여 예술로 활용함으로써 예술에 복수한다. 쿤데라는 바로이 미소뮈즈에 반대한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그에게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네 개의 단어, 네 개의 허위”(카스토리아디스)에 지나지 않는다.
7부 예루살렘 강연은 그의 입장을 짧은 분량에서 잘 마무리하고 있는 글로서, 리처드 로티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제사로 삼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강조하며,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인용하는 플로베르에 따르면 소설가란 자신의 작품 뒤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인데, 이는 오늘날 공인으로서 역할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가는 누군가의 대변인이 아니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조차 아니다(222). 쿤데라는 유대의 속담,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경탄할 만한 속담을 듣고 라블레가 어느날 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유럽 최초의 소설을 착상한 것이라고 상상하기를 즐긴다고 고백한다. 신은 왜 생각하는 인간을 보며 웃는가? 인간이 생각해봐야 진리는 그들로부터 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223). 결국 인간은 결코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블레가 고안한 신조어 중 애석하게 잊혀진 것은 바로 아젤라스트agélaste라는 단어인데, 희랍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웃지 않는 사람, 유머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는 불가능하다.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는 명확한 것이며 모든 이가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한 개인이 되는 것은 진리의 명증성과 타인들과의 일치된 동의를 상실함으로써이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이다.”(224) 라블레의 박학은 데카르트의 박학과 의미가 다르며, 소설의 지혜는 철학의 지혜와 다르다. “소설은 이론적 정신이 아니라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225)한다. 최근 러시아의 전체주의가 계몽주의 시대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이성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의 소산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쿤데라는 “18세기가 비단 루소와 볼테르와 돌바흐의 시대만은 아니었다는 것, 동시에(라기보다는 특히) 필딩, 스턴, 괴테, 라클로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특히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는 오직 형식 하나만으로 “시 정신은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멈추는 곳에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 사이의 다리가 무너지는 곳, 생각이 감미롭고 한가로운 자유를 배회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227)한다. 한 세기의 정신은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사상과 이론 개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는 기차를 발명해 냈고 헤겔은 보편적 정신 자체를 포착해냈다고 확신했는데,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쿤데라가 보기에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한 세기의 위대한 발견이다. 멍청함이란 무지가 아니라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을 의미하는데, 그는 이것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그 까닭은 계급투쟁이 없는 미래, 정신분석이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있어도, 모든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뭉게버리고, 근대 유럽 문화를 질식시키게 될 통상적 생각, 컴퓨터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전파되는 통상적인 생각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229). “아젤라스트들,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 키치, 이 셋은 신의 웃음의 메아리에서 탄생했고 어느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매력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 줄 알았던 예술에 대한,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하나의 적”(230)이다. 쿤데라가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소설이라는 상상적 세계와 유럽이라는 현실 세계)는 허약하고 소멸할 수 있다. 다만 유럽 문화가 위협받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유럽 정신의 진수는 소설의 역사, 소설의 지혜 속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가장 소중한 지혜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