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년 전이군; 우연히 발견한 이광일 - 금민 논쟁(사회적 공화주의)과 사회당 게시판에서의 최원 - 금민 논쟁(루소)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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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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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 씨에 대한 답변 : ‘현자와 바보’(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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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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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 씨에게 : ‘죽은 논리학’과 ‘살아 있는 정치학’(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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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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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일-금민 논쟁 촌평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18&page=2 

 
논쟁이 대충 끝난 것 같군요. 흥미있게 봤습니다.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약간 자극적인 말들을 교환하면서 조금 말싸움 비슷하게 된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는 그만큼 열심히 했고, 서로 논쟁이 가열되었다는 증거이므로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두 분 다 자기 소신에 맞게 주장을 펼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함께 참여하고 싶습니다만, 너무 바빠서 촌평만 하나 덧붙일까 합니다.

저는 아직 사회당 전대표 금민 씨의 사회적 공화주의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또 여기 몇편의 글만으로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그러나 글에서 제시된 금민 씨의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읽으면서 제가 떠올렸던 것은 다름아닌 근대 정치철학자 '루소'였습니다.

금민 씨의 주장은 대략 이런 것 같습니다. '허울좋은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화국이 이루어져야 하며, 후자는 전자의 논리적 전제이다.' 사회적 공화국의 실현을 위한 자세한 정책내용까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핵심은 국민들에게 일정 수준의 경제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이 배제됨 없이 민주공화국에서 능동적인 시민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사회적 공화국으로서의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와 공화국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금민씨에게 공화국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다수자 지배'와는 달리 공통의 것(res publica)을 만들어내는 데에 그 목적이 있고, 그것이 갖는 보편성이 따라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공화정은 전제이고, 이 전제 하에서 다수자로서의 데모스에 이니셔티브를 허락하는 민주적 편향 내지 경향성이 있는 것이 바로 민주공화정이겠지요(이런 식의 관점의 타당성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사회적 공화주의를 주장할 때 금민씨에게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루소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루소야말로 사회계약을 통해 '공통의 자아(moi commun)'를 창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사상가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통의 자아는 물론 (단순한 산술적 의미에서의 '만인의 의지'와는 구별되는) '일반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로 '입법자'이자 '주권자'이기도 하지요. 금민 씨의 주장과 관련하여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루소는 이러한 일반 의지를 생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가 균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일반 의지'의 기초를 마련해줄 일종의 '일반 이익'의 수립이 (논리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팔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되고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되지요. 제가 보기에 금민씨가 사회적 공화주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정확히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화국의 일반 의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즉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화국의 일반 이익을 논리적으로 먼저 만들어내야 한다(즉 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그런데, 루소에게는 바로 이런 논리가 그의 이론의 곤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의지를 위해서는 (특수 이익들을 초월하는) 일반 이익이 수립되어야 하지만, 일반 이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평등주의적 입법을 통해 그것을 해야하는데, 평등주의적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주권적 일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적 순환 또는 무한 퇴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발리바르,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 루소와 칸트', [대중들의 공포], b출판사 참조).

루소는 이러한 순환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이론에 (시민종교에 관련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봉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금민 씨는 이러한 논리적 순환을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자꾸 논의가 헛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광일 교수의 문제제기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 특수 이익들 사이의 갈등 또는 적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민씨가 주장하는 사회적 공화주의가 실제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은 특수 이익들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인데, 금민씨는 그것을 평등한 입법의 문제(이러저러한 국민복지 정책의 입법)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단순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지요. 이광일씨가 '정치'를 자꾸 강조하는 것은 '정치'란 (적어도 제가 이해하기로는) 공통된 것 또는 합의라기 보다는 갈등과 적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문제가 계급투쟁의 문제로 제기될 때, 우리는 루소의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가로서의 맑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루소의 정치적 이상을 단순하게 거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것의 물질적 조건들을 사고하고, 계급적대의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전 이광일 교수의 문제제기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금민씨의 입장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래봅니다. 왜냐하면 맑스의 입장도 또한 곤란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 '이행'이라는 문제에 있어 어떻게 목적론적 사고를 그만둘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논쟁 자체는 여기서 일단락되더라도 논의와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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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최원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29&page=3 

“금민씨가 주장하는 사회적 공화주의가 실제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은 특수 이익들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서인데, 금민씨는 그것을 평등한 입법의 문제(이러저러한 국민복지 정책의 입법)로 해결할 수 있다고 단순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지요. 이광일씨가 '정치'를 자꾸 강조하는 것은 '정치'란 (적어도 제가 이해하기로는) 공통된 것 또는 합의라기보다는 갈등과 적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최원)




‘특수 이익’과 ‘일반 이익’의 구별을 차용한다면, ‘사회적 공화국’은 특수 이익의 전쟁터에서 일반 이익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드립니다. ‘사회적 공화국’을 단순히 ‘입법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보고 ‘정치’는 ‘입법’과 무관한 수준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법허무주의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물론 ‘정치’는 ‘입법’만이 아니지만, ‘입법’의 수준으로 절충 또는 완성되고, 또한 ‘입법된 제도, 국가’ 속에서 재차 전개됩니다.




루소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전개했지만, 지적하신 문제는 매우 단순한 문제, 혹시 ‘사회적 공화주의’가 법물신주의, 제도물신주의, 국가물신주의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거꾸로 그러한 혐의야말로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사회적 공화국’은 제도적 목표이고, 그런 한에서 ‘정책’ ‘제도 대안’의 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운동은 ‘제도 대안’을 내놓은 것만을 의미할 수 없고 당연히 ‘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싸움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루소를 인용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의 메모를 덧붙입니다.




1. 주권(민주주의 국가)과 ‘주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공통성(공화정)




최원 씨가 파악하신 것처럼 저는 공화국을 민주주의적 주권국가와 동의어로 보지 않습니다. 공화국은 ‘공통의 것’(res publica)이며, 주권자들의 공통성은 민주주의적 주권의 가능조건이라고 봅니다. 저의 파악 방식에서, 공화국이냐 아니냐는 민주주의(주권국가)의 논리적 가능조건입니다. 공통성이 수립되어 있느냐 아니냐는 주권의 전제조건입니다.




공통성과 주권이라는 (국가에 대한 이와 같은) 이원적 이해 방식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폴리테이아와 개별 정체의 이원성으로 등장합니다. 근대 자유주의 역시 공통성과 주권이라는 이원 구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통성은 불가침적 자유권을 누리는 주체들로서 만인의 공통성일 뿐이지 만인의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이 아닙니다. 로크도 이와 같은 공통성을 주권의 전제조건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로크적 자유주의의 문맥에서 바로 그 공통성은 주권을 완성하는 방향이 아니라 제약하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다수자에 의해 행사되는 주권이 자신의 전제조건을 파괴할 수 없다는 논리 구조 위에서 자유권의 주권제약적 성격이 규정됩니다. 그래서 자유권은 로크에게서 주권에 대한 방어권적인 이론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자유권이 방어권적 구조로 변모하는 이유 역시 자유권을 주권의 가능조건인 만인의 공통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할 것입니다. 저는 자유주의의 은폐된 심층 구조에서도 공통성과 주권의 이중구조가 발견된다고 봅니다.




고대 공화주의이든, 자유주의이든, 근대 공화주의이든, 또는 사회적 공화주의이든, 이러한 이중구조 위에서 전개되는 정치철학이라고 봅니다. 다만 공화주의적 전통은 자유주의적 전통과 달리 주권의 가능조건인 공통성을 주권의 한계를 규정하는 요소, 즉 제약 조건이 아니라 주권을 비로소 완성시키는 조건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소극적 불침해가 전제 조건의 충족인가 아니면 적극적 형성이 전제 조건의 충족인가가 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차이는 주권의 전제 조건을 어디에서 구하는가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루소와 칸트 등의 근대 공화주의는 자유권이 주권의 전제 조건임을 수용하지만 자유권의 지반으로서의 공통이익이나 일체된 정서(루소) 또는 자신의 준칙을 정언명법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이성적 인간(칸트) 에 눈을 돌립니다. 이는 자유권적 주체와는 달리 ‘일반 의지’(루소) 또는 ‘만인의 결합된 의지’(칸트)를 형성할 수 있는 주체, 즉 주권형성적 주체로서 정치적 주체의 발견을 뜻합니다. 방어권적 주체, 저항권적 주체를 넘어서는 근대 정치적 주체가 탄생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근대 정치적 주체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각도에서 수행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이 수립되어야 비로소 주권자의 주권이 실질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이와 같은 주체 비판의 매우 소박한 한 방식일 뿐일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 교묘하기 짝이 없는 근대 정치적 주체의 껍질 벗기기를 시도해 왔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87년 이후 형성기에 있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현실 정치로 전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공화주의 담론의 틀에서 발전시켰을 따름입니다. 저는 그것이 복지 체계와 주권의 연관성을 확보하는 공세적인 담론이며, 80년대 식 사회국가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사고방식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정치적 전화라는 관심을 벗어나서 말하자면, ‘사회적 조건의 공통성’에 입각한 주체 비판은 포괄적인 주체 비판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2. 공통성, 일반성, 동일성




지적하신 문제: “일반 의지를 위해서는 (특수 이익들을 초월하는 일반 이익이 수립되어야 하지만, 일반 이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평등주의적 입법을 통해 그것을 해야하는데, 평등주의적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주권적 일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논리적 순환 또는 무한 퇴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발리바르, '인민이 인민이 되게 하는 것: 루소와 칸트', [대중들의 공포], b출판사 참조).




루소는 이러한 악무한을 잘못된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공통의 정서, 시민종교, 또는 자연 등의 장치가 그렇고, 그런 장치들은 루소와 집단주의, 파시즘의 연관까지도 후대의 비판자들이 추론하게 만듭니다. 참고삼아 칸트의 경우는 이와 같은 악순환이 사라집니다. 일반적 입법자로서의 인간 공통성이라는 칸트의 출발점은 만인의 주권자로서의 공통성이 만인의 실질적 주권의 전제조건이라는 동어반복 같은 구조, 즉 실질적 참정권의 가능조건은 형식적 참정권자로서의 공통성이라는 동어반복(또는 형식주의)에 빠지지만, 이는 주권의 전제조건 문제에 관한 언설로서는 근대 공화주의의 정점이라 할 수 있고 또한 근대 공화주의의 문제 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계약론의 논증구조의 탈역사화가 시작되는 기점이 칸트입니다. 이 이야기를 더 전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에 공통성, 일반성, 동일성에 대한 다음의 설명을 첨부하겠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논리>

1) ‘공통성의 원리’로서의 참정권(선거권/피선거권): 형식적 주권자로서의 모든 국민의 공통성

2) ‘일반성(상징)의 원리’로서 ‘대표의 원리 I’: 형식적 주권자 중의 일부는 피선거권의 실현을 통해 일반적 주권자로 등장한다. 즉 국민(A,B,C... 등의 주권)=국회의원(Z의 입법권)

3) ‘가상적 동일성의 원리’로서 ‘대표의 원리 II’: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즉 국회의원Z=국민A,B,C...등

 

'사회적 공화주의'는 1)에 대한 확장이고, 2)와 3)의 관계에 대해서 부분적 수정임(사회복지 체계의 관리에서 당사자 자치 원칙의 도입)

 

<상품세계의 구성논리>

1) 상품형식은 공통성의 원리: 상품A, 상품B, 상품C... 등의 사회에서 존재자의 공통성은 A, B, C...등이 모두 구체적 유용성과 관계없이 상품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사실.

2) ‘일반성(상징)의 원리’로서 화폐의 수립: x량의 상품A, y량의 상품B, c량의 상품C... 등=10,000원

3) ‘가상적 동일성의 원리’로서 화폐상품: 10,000원=x량의 상품A, y량의 상품B, c량의 상품C... 등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정은 모두 금지 조항임(인간의 장기나 성서비스 등은 상품일 수 없다.) 상품사회에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품세계 내의 내적 구성논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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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씨에게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30&page=3 

 

답변 감사드립니다. 말씀드렸듯이 논쟁에 참여하고 싶은데, 개인적으로 바쁜 처지라서 그렇게 하질 못하고, 촌평만을 남겨놨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몇 가지 오해를 하시는 부분이 있는 듯하여 그것만 간단히 말씀드리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먼저 저의 입장을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라고 보셨는데, 그건 저를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하신 오해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짤막한 글에서 저의 전반적인 입장을 알아채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의 짤막한 글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상대방의 말들에 입각해서 좀 더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촌평에서 저는 제도란 무용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제가 회원으로 있는 사회진보연대의 '민주노동당 관련 토론회'에 얼마전에 제출했던 저의 의견안을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래 링크를 쫓아가시면 됩니다.

http://pssp.org/bbs/view.php?board=board&id=13096&page=2


제가 촌평에서 법허무주의, 제도허무주의, 국가허무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의 봉기적 실천'으로서의 '정치'는 '제도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제도적인 것은 그러한 정치의 잠정적 결과나 수단을 이룰 뿐이라는 관점 하에서, 제도적인 것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우리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읽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제도적으로) 구성된 시민권'에 대한 '봉기적 시민권'의 우위를 주장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형성된 어떤 제도적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권리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참여'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봉기적 시민권은 그것을 훨씬 초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저의 주된 논점은 아니었지요.

사실 저는 루소 자신도 제도물신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커녕 반대로 루소는 (사회계약의 언어로 표현되는) 혁명정치, 해방의 정치를 꿈꿨던 사람이었고, 이후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서 그 역사적 사례를 찾게되는 '부르주아적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유가 곧 평등이며 평등이 곧 자유임을 명확히 주장한 최초의 이론가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앞의 촌평에서 그의 제도물신주의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평등주의적 입법'에만 의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던 관점은 '공통성'인가 '적대'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였지, 제도인가 제도의 무용성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가 아니었다는 점을 잘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저는 루소의 이론이 여전히 하나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론은 정확히 기존의 권력을 공격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이 주권권력은 국민의 일반의지에서 이탈한 권력이고 따라서 폐지되어야 한다!), 반대로 기존의 주권적 권력을 옹호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었죠(이 주권권력은 국민의 일반의지에 기초해있으며 따라서 정당하다!).

이러한 모호성은 물론 하나의 곤란임이 분명하지만, 단순한 이론적 결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이론적 질문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나온 많은 이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질문에 다양한 방식의 대답을 주려고 시도합니다. 칸트도 이 가운데 하나이고, 맑스도 이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맑스는 정치가 (시민이 자신의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것이라고 보면서 정치의 타자를 경제 또는 계급관계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그것의 물질적 조건들을 분석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아시다시피, 맑스는 정치의 핵심이 사실 '적대'에 있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사회란 인간의 공통된 본질(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에 기초해 있지 않고, 반대로 적대와 적대의 조절에 기초해 있음을 보인것이지요. 하지만 정치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계급적대를 분석함으로써 맑스는 루소가 꿈꾼 '평등한 자유'를 부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사고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루소적 '모호성'의 극복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자유의 필연적(!) 생성'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제가 금민씨의 사회적 공화주의의 주장을 루소에게 연결시킨 것은 금민씨의 입장이 맑스의 변혁의 정치의 입장에 입각해 있는 것이 아니라 루소의 해방의 정치의 입장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면 이광일 교수의 입장은 보다 맑스의 입장에서 문제제기를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람중심 탈배제경제'라는 구호가 정확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금민씨는 그 구호가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와 가치지향이 오버래핑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셨고 오버래핑이 문제는 아니며 구체적 정책의 차별성을 '비교'함으로써 말하자면 그 가치를 실현할 진정성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선거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광일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 가치지향의 오버래핑 자체가 왜 일어나는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사람중심 탈배제경제'라는 구호를 봅시다. 도대체 그 구호의 저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계급적대를 분석하는 맑스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사람'을 중심에 놓는 '인간주의'가 문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포이에르바흐에 대한 맑스의 비판의 핵심중의 하나가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좌파정당인 사회당의 가치지향이 문국현 자본당과 오버래핑하는 것은 단순한 선거 전술의 운용문제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인간주의를 거부하자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천적 구호로서의 인간주의를 정세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정세 속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세 자체를 분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세를 구조짓고 있는 적대들의 양상들을 분석해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대한 분석을 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러저러한 다른 종류의 적대들과 차이들을 분석해야 합니다. 계급적대 뿐만 아니라, 성적 적대, 지적적대, 인종적대 등을 물질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이질적인 물질적 적대들을 단순히 '탈배제'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할 도리는 없습니다. 각각의 적대들은 종별적으로 다른 해결방식들을 요구하고, 또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들은 다시 문제의 복잡한 해결들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정책 하나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지 내지 재분배 정책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런데 사회당의 강령을 보면, 모든 문제를 단순한 배제의 문제로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현재의 자본주의의 여러 관계들의 분석에 입각한 싸움의 전략 등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론적 분석을 강령에서 구구절절히 하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강령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의 사회당 강령은 그런 분석 없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정확히 문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에 이르는 정치철학에서 공통성과 주권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작동한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여기서 제가 구구절절히 답변을 하기 힘들지만(정치철학 일반에 대한 논의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로크의 자유권이 주권에 대한 방어권으로 논의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사실상 주권이란 왕이나 지배계급의 '특권'이었지 인민의 '권리'가 아니었고, 따라서 인민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한 주권개념의 이러한 전도는 따라서 반대편에서 subject 개념의 전도를 동반합니다. 신민에서 주체로.
 
(루소는 사실은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자였고, 칸트야말로 공화주의자였지만, 그것의 핵심은 '법치'이고 그의 사고는 또한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구분--유산자, 백인, 남성만이 능동적 시민일 수 있다--을 재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칸트가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테르미도르적이며, 칸트보다는 루소가 프랑스 혁명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프랑스혁명은 민주정을 포함한 모든 정체에 대한 진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수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전에 쓴 촌평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이론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저도 할말이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 겠군요.

어쨌든 저의 주장의 요점은 맑스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맑스가 문제가 있다고 루소로 후퇴하는 것은 좀 청산주의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당이 과거의 대선 실패에 대응해서 이번에 들고나왔던 방식이 너무 청산주의적으로 보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루소와 맑스를 모두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저의 주장인 것이지요. 그래서 더 광범위한 논의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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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최원 

http://www.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5_2&wr_id=742&page=3 

 

복잡한 문맥의 지적 토론을 확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나는 루소로 후퇴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루소의 사상에 대해서도 나는 루소의 주의주의, 정서의 공통성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공통성 중에서 가장 고약한 공통성이 정서의 공통성입니다.

칸트의 능동시민/수동시민의 이중시민론, 제한선거권론의 문제는 그 사상 전체의 반동성으로 볼 것이 아니라 - 보통시민권이 실현된 경우조차 작동하고 있는 - 근대 시민의 구성조건 문제를 드러내는 근대 공화주의의 전범적인 한계로 보아야만 그 의의와 한께가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문제가 맑스의 문제라면 차라리 나는 루소고 당신은 맑스다고 허황된 대립을 만들지 말고, 당신과 나의 맑스의 문제로 좁혔으면 합니다. 나는 맑스에게서도 적대조차 공통성을 전제한다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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