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수동성은 환상의 돌림병 3장에도 등장. 본래는 로베르트 팔러의 개념이라고 함.
지젝, How to read Lacan, 40~45쪽
"이 이상한 기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널리 알려진 상호 작용(interactivity)이란 개념에 상호 수동(interpassivity)이라는 기이한 짝패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전자 미디어의 출현으로 텍스트나 예술 작품에 대한 수동적인 소비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상식이다. 나는 단순히 스크린을 응시할 수만은 없다. 나는 점차 스크린과 상호 작용하며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가상 공동체의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나 소위 '쌍방향 서사'의 플롯을 결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것까지) 대화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뉴미디어의 민주주의적 잠재성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초점을 두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이버 공간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타자가 연출한 스펙터클을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 관람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스펙터클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스펙터클의 규칙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 상호 작용의 또다른 측면이 상호 수동성이다. 대상에 상호 작용하는 것의 이면은 (단지 수동적으로 쇼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수동성을 갖는 것, 내게서 수동성을 빼앗는 것,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쇼를 즐기고 자발적인 향략의 의무에서 해방시켜주는 상황이다. 꼬박꼬박 드라마를 녹화하는 녹화 비디오 애호가들(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이라면, 그렇게 녹화 비디오를 갖게 됨으로써 오히려 옛날의 단순한 TV 시청 때보다 실제적으로는 드라마를 덜 보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TV를 시청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중한 저녁 시간을 TV 시청에 날려버리는 대신 간편하게 녹화를 해 두고 나중에 보려고 한다(물론 그걸 볼 시간도 없다). 실제로는 필름을 안 보지만 내가 좋아하는 필름이 내 비디오 수집함에 있다는 사실은 내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가끔씩 소박한 긴장 완화와 달콤한 무위의 예술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녹화 비디오가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 필름을 보고 있다는 듯이. 여기서 녹화 비디오는 상징적 등록의 매체로서 대타자의 역할을 한다. 오늘날 포르노그래피 역시 점차 이렇게 상호 수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X등급 영화는 더이상 그(혹은 그녀)의 은말한 자위행위를 돕는 수단이 아니다. 단지 '행위가 이뤄지는'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이 내 대신 즐기는 걸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상호 수동성의 또 다른 예로, 우리는 TV에서 썰렁한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자 농담을 한 사람이 "진짜 웃겨. 진짜 웃겨!"라며 소란스럽게 웃어대는 대략 난감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관계의 예상된 반응을 스스로 연출하는 것이다. 이 상황은 관객의 웃음소리를 녹화해서 틀어주는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 대신 웃는 행위자(우리, 지루하고 썰렁해진 관객은 이 사람을 통해 웃는다)는 보이지 않는 인공의 공중(公衆)이라는 익명의 대타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웃기고 있는 화자 자신이다. 그의 강박적인 웃음은 다리를 휘청거릴 때나 뭔가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 흔히 내뱉어야겠다고 느끼는 "저런!" 같은 감탄사와 비슷하다. 이 사례가 함축하고 있는 미스터리는 내 실수를 목격한 사람이 나 대신 "저런!"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그래도 된다는 점이다. "저런!"의 기능은 바보 같은 실수를 상징적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즉 가상의 대타자가 실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폐쇄적인 집단의 구성원 전체가 알고 있는 어떤 껄끄러운 일(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안다)을 그들 중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 말해버릴 때 모두 깜짝 놀라게 되는 전형적이면서도 미묘한 상황을 상기해보자. 왜? 아무도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닌데 왜 그들 모두는 놀라게 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척하지(것처럼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제 대타자가 그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의 교훈이 있다. 어느 누구도 외양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가끔씩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외양을 파괴할 때 외양 뒤의 사물 역시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이런 상호 수동성은 헤겔의 '이성의 간지' 개념과 정반대다. 이성의 간지에서 나는 타인을 통해 활동한다. 타자가 나 대신 행동하는 동안 나는 수동적으로 뒤에서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 내가 해머로 쇳덩이를 내려치는 대신 기계가 그 일을 한다. 내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대신 물이 그 일을 한다. 내가 다루는 대상과 나 사이에 다른 자연 대상을 끼워 넣음으로써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유사한 일이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를 다른 사람과 싸우게 함으로써 나는 편안하게 둘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 박살 나는 걸 지켜볼 수 있다(이것이 헤겔의 절대 관념이 역사를 관통하여 지배하는 방법이다. 절대 관념은 인간의 열정들끼리 서로 투쟁해서 절대 관념을 대신하는 일을 하게 하는 동안 열정들 간의 투쟁 바깥에 남아 있다. 고대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뀐 역사적 필연성은 카이사르의 열정과 야망을 수단으로 실현된다). 반대로 상호 수동성의 경우 나는 타자를 통해 수동적이 된다. 나는 내 경험의 수동적 측면(즐김)을 타인에게 양보하는데, 그동안 나는 계속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녹화 비디오가 내 대신 수동적으로 즐기는 동안 나는 저녁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나 대신 곡비가 애도를 표하는 동안 나는 죽은 자의 유산을 처리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가짜 행위(false activity)란 개념으로 데려다 준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 거기에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전략이 있다. 그는 실재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기 살기로 행동한다. 이를테면,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대화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하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발화 행위는 만약 잠시라도 말을 멈춘다면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되는 것을 물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 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 국민들은 항상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자' 해쓰고, 학계는 끊임없이 의미없는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것은 한발 물러서서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때론 비판적인 참여를 침묵보다 선호한다. 그들은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켜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파괴되었음을 확신시킨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 비판의 첫걸음은 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첫걸음은 진실한 활동, 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 준다."
Interpassivitä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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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passivität bezeichnet eine von
Robert Pfaller und anderen ausgearbeitete Theorie aus dem Bereich der
Kulturwissenschaft und der
Psychoanalyse. Interpassivität ist die Praxis, eigene
Handlungen und
Empfindungen an äußere
Objekte, d.h. Menschen oder Dinge zu
delegieren. Die Theorie der Interpassivität bezieht sich hauptsächlich auf den Bereich der
Lustempfindungen, weshalb Interpassivität auch als „delegiertes Genießen“ definiert werden kann.
Delegiertes Genießen [Bearbeiten]
Psychologisch ist Interpassivität eine subtile Form der
Flucht vor dem eigenen Genießen. Anstatt selbst zu genießen, lässt der Interpassive Andere für sich genießen. Obwohl er diese Auslagerung als Luststeigerung empfindet, flüchtet er vor seiner Lust. Pfaller grenzt die Interpassivität jedoch von der
Askese ab, wenn er betont, dass Interpassivität nicht eine Verneinung des Genießens bedeutet, sondern nur seine Verschiebung auf Andere und damit eine
andere Form des Genießens. Das Genießen des Anderen (der auch
Lacans großer Anderer sein kann) ist gerade das, wodurch man selbst – nur eben passiv – genießt.
Hinter dem Wunsch nach Interpassivität steht die Angst, die die Konfrontation mit dem eigenen Genießen, der
Jouissance im Sinne
Jacques Lacans, verursacht. Das Subjekt wehrt die Verunsicherung ab, die mit intensiven Gefühlsregungen einhergeht, und begnügt sich mit der passiven, delegierten Form des Empfindens, die es vor echter Anteilnahme schützt. Die
traumatische Präsenz realer Gefühle wird
abgewehrt und durch die distanzierende Vermittlung durch den Anderen ersetzt. Als
neurotische Stabilisierung der eigenen
Identität und als
Ersatzhandlung hat die Interpassivität Züge der
Zwangshandlung und der
Perversion im Sinne der
Psychoanalyse.
Interpassivität als kulturelles Phänomen [Bearbeiten]
Interpassivität besitzt jedoch auch eine überindividuelle, soziale,
kulturelle Dimension. So analysieren die Autoren in dem von Pfaller herausgegebenen Band
Interpassivität. Studien über delegiertes Genießen (2000) zahlreiche sozial verbreitete Verhaltensmuster als Formen der Interpassivität, die insofern keine pathologische Abweichung von der Normalität darstellt, sondern als „normales“ Verhalten akzeptiert ist. Auch stellt die Gesellschaft selbst zahlreiche Angebote für interpassives Delegieren bereit, etwa in Form bestimmter
Konsumartikel,
massenmedialer Inszenierungen und
Rituale (siehe Beispiele unten). Interpassivität ist ein
reziproker Prozess, der eine Wechselwirkung zwischen
Individuum und
Gesellschaft beschreibt.
Das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Bearbeiten]
Pfaller betont noch einen weiteren,
ideologischen Aspekt der Interpassivität: Man glaubt als rationaler, vernünftiger Mensch nicht an den Erfolg der interpassiven Delegation, sondern geht stets von der Existenz eines fiktiven Publikums aus. Dieses Publikum, das die Funktion eines „naiven Beobachters“ der eigenen Interpassivität einnimmt, braucht realiter nicht zu existieren. Es ist, mit Lacan gesprochen, ein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Es „glaubt“ an die Inszenierung des Interpassiven, wodurch diese erst funktionieren kann und sinnvoll wird. Diese Funktion wird dadurch ermöglicht, dass der naive Beobachter, anders etwa als das
Freudsche Über-Ich, nicht die geheimen Regungen der interpassiven Person, sondern nur die täuschende Oberfläche seiner Inszenierung sieht. Pfaller unterstreicht seine These durch das Beispiel der Darstellung einer toten Person auf einer
Theaterbühne. Wenn diese Person niesen muss, erfolgt üblicherweise allgemeines Gelächter. Aber warum? Sowohl die übrigen Darsteller als auch das Publikum wissen, dass die Person in Wirklichkeit nicht tot ist. Die Freude lässt sich, so Pfaller, dadurch erklären, dass durch den
Fauxpas bewusst werde, dass durch die Theaterinszenierung nicht so sehr die realen Zuschauer getäuscht wurden, sondern vor allem der fiktive naive Beobachter. Dieser (dem Bereich der
Magie und des
Aberglaubens angehörende) Glaube ermöglicht den
ästhetischen Genuss der
Fiktion überhaupt erst. Gelacht wird also nicht über die
eigene Ent-Täuschung, sondern über die des naiven Beobachters.
- Jacques Lacan sieht den Chor in der griechischen Tragödie als stellvertretende Instanz, welche die Emotionen des Zuschauers artikuliert und ihm diese abnimmt. (Vgl. Lacan, Seminar XII: Die Ethik der Psychoanalyse, S. 303 ff.)
- Ein geläufiges Beispiel aus der Alltagskultur ist das Dosengelächter („canned laughter“) in Sitcoms, das an unserer Stelle lacht und uns so die „Mühe“ des eigenen Lachens erspart. Wir fühlen uns so befreit, als wäre das Lachen unser eigenes gewesen. (Vgl. Žižek, Liebe Dein Symptom wie Dich selbst, S. 50.)
- Slavoj Žižek illustriert Interpassivität an Lacans Figur des „Subjekts,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Er erläutert dies an einem Beispiel aus der stalinistischen Diktatur: Als der hochrangige sowjetische Politiker Lawrenti Beria 1954 starb und bald darauf als Verräter und Spion geächtet wurde, gab es in der Großen Sowjetischen Enzyklopädie einen lobpreisenden Artikel über ihn. Der Verlag der Enzyklopädie schrieb deshalb alle Empfänger an und forderte sie auf, die Seiten über Beria auszuschneiden und an den Verlag zurückzuschicken. Im Austausch für die fehlenden Seiten bekamen sie einen Artikel über die Beringstraße zugeschickt. Wenn aber alle von der Fälschung wussten, da sie ja an ihr beteiligt waren, wozu oder für wen wurde sie dann noch verschleiert? „Die einzige Antwort lautet selbstverständlich: für das nichtexistente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antwortet Žižek. Dieses fiktive Subjekt, das nach Žižek grundlegender Bestandteil jeder ideologischen Identifikation ist, glaubt sozusagen an unserer Stelle. – Vgl. Žižek, Die Substitution zwischen Interaktivität und Interpassivität, in: Pfaller (Hg.), Interpassivität, S. 15.
- Pornografie: Man sieht Anderen zu, wie sie zusammen sexuelle Lust erleben, und genießt diese fremde Lust.
- Manchmal werden Videorecorder programmiert, um Filme aufzunehmen, die wir selbst nie ansehen werden, sondern lediglich archivieren. Das Gerät schaut den Film gewissermaßen für uns an.
- Der Kopierer „liest“ beim Kopieren die wissenschaftlichen Artikel, die wir danach abheften und nie zu Gesicht kriegen werden.
- Der Bibliomane interessiert sich nicht für das Lesen selbst, sondern nur für das Sammeln der Bücher, die er gerade durch ihre Konservierung im Regal nicht mehr lesen muss.
- Kuratoren nehmen uns die Kunstbetrachtung ab.
- Die Klageweiber ersetzen das eigene Trauern.
- Tibetanische Gebetsmühlen ersetzen das eigene Beten.
- Die sogenannten Claims in der Werbung und auf Produktverpackungen artikulieren das Genießen des Konsumenten, wie etwa bei Coca Cola: „Ooh! Ooh! What taste!“
- Die Laufschriften der Künstlerin Jenny Holzer, eine davon mit dem sinnigen Titel „Protect me from what I want“, verlocken ebenfalls zur Interpassivität: Durch das Wiederholen der Texte gewinnen sie in einer des Lesens müde gewordenen Öffentlichkeit eine solche Präsenz, dass sie selbst gar nicht mehr gelesen werden müssen; sie lesen sich praktisch selbst.
- Der von Walter Thiele erfundene „Lachsack“, der an unserer Stelle lacht.
- In der Nostalgie genießt man das Genießen einer früheren Zeit, z.B. den Sex der siebziger Jahre in Filmen wie Larry Flynt – Die nackte Wahrheit oder Boogie Nights. – „Früher war sogar die Zukunft besser.“ (Karl Valentin)
- Der Sport-Zuschauer erfreut sich an Leistungen anderer, und in der Kochsendung kochen andere zum Vergnügen des Zuschauers[1].
- Robert Pfaller (Hg.): Interpassivität. Studien über delegiertes Genießen, Berlin/New York: Springer 2000, ISBN 321183303-X (mit Beiträgen von Slavoj Žižek, Mladen Dolar, August Ruhs u.a.)
- Robert Pfaller: Die Illusionen der anderen. Über das Lustprinzip in der Kultur. Frankfurt a.M.: Suhrkamp 2002. ISBN 3518122797
- Slavoj Žižek, Liebe Dein Symptom wie Dich selbst! Jacques Lacans Psychoanalyse und die Medien, Berlin: Merve 1991
- Jacques Lacan, Seminar XII: Die Ethik der Psychoanalyse, Berlin/Weinheim: Quadriga 1996
Von „
http://de.wikipedia.org/wiki/Interpassivit%C3%A4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