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ergson, 「형이상학 입문」, 『사유와 운동』 발제(국역 215~242쪽, 불어본 pp. 200~227)
실재적 지속
"분석analyse은 개념이나 도식로 귀착되는데, 이들은 고찰되고 있는 한 움직이지 않는 것immobile을 그 본질적 특성으로 하고 있다(200, 215)." 예컨대 내면의 심리 상태를 살펴볼 때 분석은 단순감각이라고 불리는 움직일 수 없는 요소에 도달한다. 이것이 과학이 필요로 하는 작용이다. 그러나 “정신상태는 그것이 아무리 단순하다 할지라도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억 없는 의식, 다시 말해서 경과해버린 순간의 기억을 현재의 느낌에 첨가하지 않는 상태의 연속이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지속durée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적 지속이란 곧 과거를 현재에로 연장시켜주는 기억의 연속적인 삶이다.”(200, 216) 현재는 과거의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고, 이렇게 현재 속에 과거가 존속하지 않는다면 지속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순간성instantanéité만이 있게 된다. 우리가 분석을 통해 지속으로부터 심리상태를 훔쳐왔다는 비판과는 달리 기본적인 심리 상태는 각각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흔히 몇 분 혹은 몇 초라는 식으로 수량화되서 일컬어지는 한정된 시간은, 단지 동질적homogeneous인 것이라고 가정된 심리상태가 실제로는 "변화하면서 지속하는 상태"임을 알려주는 지표에 불과하며, 시간은 그 상태를 자체로 취해볼 때 “영속적인 생성devenir”(201, 216)인 것이다. 이 생성으로부터 우리는 불변적이라고 가정하는 어떤 평균적인 질을 추출하고, 그리하여 안정적이고, 따라서 도식적인 상태를 구축한다. 거기에서 생성 일반이 추출될 수 있는데, 이 생성 일반은 그 상태가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추상적 시간은 그 시간 안에 위치한 상태만큼이나 부동적으로 보이며, 이 시간은 오직 “연속적인 질의 변화”(201, 217)를 통해서 흘러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질적 시간이라는 가설은 단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지속들을 비교하거나, 동시성을 헤아리고, 지속의 어떤 흐름을 다른 흐름과의 관련 하에서 측정하게 해준다.
두 가지 방법을 비교해보자. 분석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작용한다면, 직관intuition은 운동성mobilité 안에, 또는 이것과 동등한 것인 지속 안에 위치한다. 우리는 실재적인 것réel, 현실적인 것vécu, actual, 구체적인 것을 그것이 가변성 자체임을 보고서 식별reconnaît하는 반면, 요소l'élément의 식별은 그것이 불변적임을 봄으로써 이루어진다. 요소는 불변적이며, 도식이자 단순화를 통해 재구성된 것이며, 상징symbole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요소란 흘러가는 실재에 대해 취해진 관점vue이다.(202, 217) 하지만 도식을 통해 실재적인 것을 재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류인데, 직관에서 분석으로 옮겨갈 수는 있어도, 분석에서 직관으로 옮겨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질성에 가장 가까운 변화성, 즉 공간 내에서의 운동을 생각해보자. 이 운동의 전체 연장에 대해 우리는 가능적인 정지arrêts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위치가 무수히 많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통해서 운동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운동의 부분이 아니라, 운동으로부터 취해진 그만큼의 관점이나 투사, 한갓 정지라고 가정된 것들이다. 정지와는 달리 통과는 곧 운동으로서, 부동성으로서의 정지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이는 우리 정신에 뿌리깊은 환상인데, “무한히 점에 점을 더해가는 사유의 운동을 통해서, 헛되이 운동체의 실재적이고 불가분적인 운동을 흉내내려 하는 것이다.”(204, 219) 이는 시詩의 의미를 그 시를 이루는 글자들의 형태 속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지에서 운동으로 나아가는 구성은 불가능하다. 운동하는 것의 위치는 운동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동체의 위치는 운동의 기초로 여겨지는 공간의 점들일 뿐인데, 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텅 비어 있으며 생각할 수는 있지만, 지각되지는 않는 공간은 상징의 가치 밖에 지니지 못한다. 상징을 조작해서 실재를 만들 수는 없으며, 실용적인 면을 위해 마련하기 위한 이러한 습관은 단지 실재적인 운동의 어설픈 모방품을 줄 뿐이다. 우리의 정신은 자신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관념이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경향을 지닌다. 왜 이러한 착각이 생겨나는가? 바로 우리 사유의 고질적인 습관 때문인데, 정신에게 부동성은 운동성보다 더 명확하고, 정지는 운동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고대 초기 시대 이래 운동의 문제가 야기시킨 난점들이 발생한다.1)이 난점의 발생 원인은 공간에서 운동으로, 궤도에서 비행으로, 움직이지 않는 위치에서 운동성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하는 일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운동이야말로 부동성에 선행하며, 위치와 변위déplacement 사이에는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205, 220) 움직이지 않는 점이 움직이는 것의 운동에 대해 갖는 관계는 여러 성질의 개념들이 한 대상의 질적인 변화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물론 실재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분석과 개념으로의 진행은 정당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사유의 작업에 자연적으로 나 있는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 그 사물 안으로 정신의 팽창dilatation을 통해서 들어가려는 노력이다. 즉 “형이상학은 제 개념에서 실재로 나아가는 노력이 아니라, 실재에서 제 개념에로 나아가는 노력”(206, 221)이다. 형이상학은 직관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며, 직관은 지속의 운동성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직관은 단일한 행위acte unique가 아니라 무한한 일련의 행위série indéfini d'actes이며, 이 행위들은 동일한 유genre에 속하지만 그 각각의 행위는 매우 특정한 종éspece에 속하며, 이 행위의 다양성은 존재의 정도degrés에 대응한다.(207, 222)
우리가 지속을 기성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려고 할 때, 지속일반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 즉 계기적인 의식 상태의 다수성multiplicité, 그 상태들을 연결하는 단일성unité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지속은 이 단일성과 다양성의 종합이 될 것이다. 이는 신비한 작용이다. 그러나 이 관점들의 조합을 통해서는 정도의 다양성diversité이나 형태의 잡다성variété가 드러나지 않으며, 지속에서 뉘앙스나 정도가 허용되는지 알 수 없다. 반대로 지속을 분석하려고 하는 대신, 직관의 노력을 통해 지속 안에 위치해본다면, 우리는 뚜렷이 확정된 어떤 긴장tension을 느끼게 된다. 이 긴장의 확정détermination 자체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지속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하는 개수만큼의 지속을 지각하게 된다. 이 지속들을 개념으로 환원할 경우, 즉 상반되는 두 관점에서 이를 외적으로 고찰할 경우, 언제나 다자와 일자의 불가해한indéfinissable 조합에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는 지속과 다르다. 가령 한편으로 지속을 순간들의 다수성이라고 할 경우, 순간들은 단일성을 통해 실에 꿰이듯 연결되게 된다. 이때의 지속은 아무리 짧더라도 그 순간들의 개수는 무한하게 되며, 이들 각각의 순간은 자체로 지속이 아니다. 수학적 점과 점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순간들을 모두 연결되는 단일성을 볼 때, 이것 역시 지속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가설에 의해 지속 안에 있는 변화하는 것과 참으로proprement 지속하는 것이 모두 순간의 다수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속이라는 주제에 대립하는 학파들의 견해를 보면, 그 견해란 다수성과 단일성이라는 개념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달려 있다. 다자의 관점에 집착하는 경우, 그들은 시간을 폭파시켜 얻은 뚜렷한 순간들을 구체적 실재로 내세우며, 다른 학파는 지속의 단일성을 구체적 실재로 내세우며, 영원한 것 안에 자리잡고 있다. 첫째 가설에 따르면 세계는 공중에 매달려서 매순간 끝나고 다시 시작해야 하며, 두 번째 가설에 의하면 추상적 영원성, 죽음의 영원성의 무한이 있게 된다. 양자는 모두 관점의 부동성이라는 성질을 띠는 사물chose이다.
직관의 노력은 지속의 구체적 흐름 안에 자리잡는데, 가령 주황색을 외적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과 내적으로 공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이 빨강색과 노랑색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며, 심지어 노랑색 밑에, 빨강색에서 노랑색까지의 연속성이 자연스레 뻗어가는 스펙트럼을 예감할 것이다. 우리 지속의 직관은 순수한 분석이 행하는 것처럼 우리를 진공에 매달아두지 않고, 지속의 연속성과 전적으로 접촉하게 해주며, 이렇게 점점 강렬해지는 노력을 통해 무한히 우리 자신을 확장dilater시키고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된다(210, 225). 지속의 연속성의 아래로 향하는 경우, 우리는 점점 분산되는éparpillée 지속으로 나아간다. 지속의 맥동palpitation은 우리의 맥동보다 빨라서 우리의 단순 감각을 분할하여 질을 양으로 희석시키는데, 이 극한에는 순수히 동질적인 것, 즉 우리가 물질성matérialité을 정의하는 순수한 반복이 있다. 지속의 연속성의 아래로 향하는 경우는 점점 더 긴장되고 좁혀지며 강도가 깊어지는 지속으로 나아가는데, 그 극한에는 영원성, 생명의 영원성이 자리하고 있다. “물질성이 지속의 분산이듯, 영속성은 전체 지속의 응결이다. 이 두 극단적인 극한 사이를 직관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운동이 바로 형이상학이다.”(210, 226)2)
실재와 운동성
1) 외적이면서도 우리 정신에 직접 주어진 실재donnée immédiatement가 있다.2) 이 실재는 운동성이다.3)“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물choses faites이 아닌, 오직 만들어지고 있는se font 사물만이 존재한다. 항상 같은 것으로 머무르는 상태가 아닌, 오직 변화하는 상태만이 존재한다. 휴지repos란 결코 외관 이상의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상대적이다.”(211, 226) 따라서 발생하고naissant 있는 상태의 변화를 경향이라고 부른다면, 모든 실재는 경향tendance이다.3) 견고한 받침점을 구하는 우리의 정신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주요기능으로서 상태및 사물을 상상해야만 한다. 때로 우리의 정신은 실재적인 것의 불가분적인 운동성에 대해 준-순간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감각과 관념을 취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연속에 대해 불연속, 운동성에 대해 안정성, 변화하는 경향에 대해 고정점을 대치시킨다. 이는 상식, 언어, 실생활, 실증과학에 대해서도 필수적이다. “우리의 지성은 그 자연적인 성향에 따라 한편으로는 응고된 지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된 개념을 통해 진행해간다.지성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출발하여, 운동을 부동성의 개념으로 생각할 뿐이며 또 그렇게 표현할 뿐이다.”(212, 227) 그것은 실재적인 것의 내적-형이상학적 인식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실재적인 것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4) 형이상학에 내재한 여러 난점의 주원인은 우리가 실용적 효용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과정을 실재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한désintéressée 인식에 적용한다는 사실에 있다. 부동적인 지각소여percept나 개념과 더불어, 경향이며 운동성인 실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 고정적인 개념을 통해 실재적인 것의 운동성을 재구성하려는 노력 때문에 형이상학이 난점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고정 개념들을 움직이는 실재로부터 사유를 추출할 수 있으나, 그 개념들의 고정성fixité으로는 실재적인 것의 운동성을 어떻게 해서도 재구성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213, 228) 그러나 체계의 건설자인 독단론은 언제나 이러한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이른바 의식의 상대성이라는 것
5) 그러나 독단론은 실패한다. 독단론을 비판하는 회의론, 관념론, 그리고 비판론자들의 학설이 지적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무능력이며, 이들은 모두 우리 정신이 절대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이 행한 의식의 상대성에 대한 증명은 원초적인 악에 물들어 있는데, 이들 역시 독단론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식은 정지된 윤곽을 지닌 개념에서 출발하여 흐르는 실재를 파악해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다.6) 그러나 정신은 움직이는 실재 안에 위치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방향을 따라 결국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은 비상한 노력을 통해 습관적 사유와 범주들을 뒤집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신은 유동적인 개념concepts fluides4)에 이르게 되며, 이 개념은 실재의 모든 굴곡을 따라가면서 사물의 내적 생명의 운동 자체를 획득할 수 있다.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용의 습관적 방향을 역전시킨다는 것이다.”(214, 229)
7) 정신이 사용하는 방법 중 가장 강력한 탐구방법인 무한소 분석/미적분l'analyse infinitésimal도 이러한 역전에서 태어난다. 근대수학은 바로 이미 만들어진 것을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대치시키려는 노력, 사물의 윤곽dessin의 동적인 연속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다. 수학이란 크기grandeur의 과학이므로 윤곽을 다룸에 그치며, 또한 수학은 부호symbole의 발명을 통해서만 그 응용이 될 뿐이지만, 형이상학은 응용을 목표로 하지 않으므로, 직관을 부호로 전도시키지 않을 수 있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실용성과 무관한 형이상학은 자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과학에 대해 효용성과 엄밀함rigueur, occurrence에서 뒤지는 것을 형이상학은 시야와 범위에서 만회한다(214, 230)5). 양은 언제나 발생하고 있는 상태가 지닌 질로서 양이란 질의 극한의 경우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수학이 발생시킨 관념을 자기 것으로 해서 모든 질에게로 뻗어나가려고 하며, 실재 일반으로 확장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결코 근대 철학의 망상인 보편수학으로 나가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상징으로 번역될 수 없는 실재의 연속성, 운동성과 접촉contact함으로써 시작되며, 그것이 목표하는 바의 하나는 “질적인 미분법différenciation 및 적분법intégration을 행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우리는 이 목표를 사라지게 하고, 과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기원에 대해서 과학 자체를 속일 수 있었다. 일단 획득된 직관은 반드시 우리 사유 습관에 순응하는 표현양식 및 적용양식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장 및 논리적 완성 작업이 수세기에 걸쳐 존속하는 반면, 방법을 발생시키는 행위는 일순간밖에 지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망각에 기인하여 철학자들, 심지어 과학자들까지도 과학적 지식의 상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렇게도 자주 과학의 논리적 도구를 과학 자체로 오인하고, 직관6)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발생할 수 있음을 잊고 있다.기존의 개념을 통한 상징적 인식은 고정된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나아가는 바 상대적이지만, 움직이는 것 안에 자리잡고 사물의 생명 자체를 자기 것으로 하는 직관적 인식은 그렇지 않다.이 직관은 절대absolu를 획득한다. 따라서 과학과 형이상학은 직관 안에서 결합되며, 직관적인 철학은 형이상학과 과학 간의 통일을 실현해준다. 그것은 실증과학 안에 형이상학을 건립하는 동시에, 실증 과학으로 하여금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참된 시야를 의식하고 그것이 그들이 가정하는 것보다 훨씬 우수함을 알게 해준다. 즉 직관적 철학은 형이상학에 더 많은 과학을, 과학 안에 더 많은 형이상학을 불어넣는다(216, 232).
9) 과학은 형이상학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은 고대철학자들의 의견이었는데, 이 생각의 오류는 변화된 것은 불변성을 표현한다는 믿음에 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행위는 약화된 관조contemplation이며, 지속은 영원성의 기만적이고 동적인 상像image이며, 영혼은 이데아의 타락이라는 생각이 등장했다. 플라톤에서 플로티누스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은, 불변하는 것에는 움직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고, 안정적인 것에서 어떤 감소를 통해 불안정적인 것으로 나아간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반면 근대 과학의 기원은 운동성을 독립적인 실재로 수립한 것에 있는데, 실로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은 순수 지속 안에서 주어진 측심추들sonde이 있었다. 그러나 바다의 심연에 내려진 추가 건져내는 유동의 실재는 지성entendement의 태양 아래서 고정되고 부동적인 개념으로 수축되고 만다. 사물의 살아있는 운동성 속에 지성은 실재적이거나 잠재적인 정거장을 표시하고, 출발하는 것과 도착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자연적으로 행해지는 인간의 사유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적 제약을 초월dépasser하기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 학자들이 직관에 직접 주어진 것과 직관 주위에서 지성이 추구하는 분석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은 학문의 부호적 특징을 믿게 되어버렸다.
형이상학과 근대 과학
형이상학과 동시에 과학의 개척자였던 근대 과학의 거장들은 왜 구체적 지속durée concrète을 알 수 없었는가? 플라톤주의로부터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이데아는일종의용이한 가지성의 보장assurance de facile intelligibilité이며, 영혼은 일종의 생명의 불안inquiétude de vie이다. 그러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조류가 근대철학자로 하여금 영혼을 이데아 위에 올려놓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219, 234). 이렇게 하여 근대철학은 근대 과학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고대 사유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해가는 경향을 지녔다. 그러나 근대 과학과 마찬가지로 근대 철학은 심오한 생명의 둘레에 기호를 늘어놓았고, 과학이 그 전개에 있어서 부호를 필요로 한다면 형이상학의 주된 존재 이유는 그 부호와의 단절rupture이라는 사실은 망각되었다. 지성은 여전히 고정화와 분할, 재구성 등의 작업을 수행했다. 지성은 그 역할이 안정적인 요소 위에 작용하는 것인데, 안정성을 관계안에서 또는 사물안에서 찾으려 한다. 관계의 개념 위에서 작용할 때 지성의 귀착점은 과학적 부호주의symbolisme이고, 사물의 개념 위에서 작용할 때 지성의 귀착점은 형이상학적부호주의이다. 어느 경우에나 배열이 지성으로부터 나타난다. 지성은 자신이 독립적이라 생각하여 자신이 실재의 심오한 직관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자들은 실재 밑에 깊은 굴을 파놓았고, 과학자들은 실재 위에 멋진 다리를 설치했지만, 사물의 흘러가는 운동은 이 두 예술작품을 어느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나쳐간다”(220, 235)
칸트의 비판 역시 형이상학과 과학을 부호주의의 한계로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지적 직관에 대한 과학과 형이상학 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칸트는 과학이 상대적이고, 형이상학이 인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성의 독립성을 격화시키고 형이상학과 과학에 내적 무게를 부여해준 지적 직관을 제거했다. 과학은 관계를 다루면서 형상forme의 표피만을, 형이상학은 사물을 다루면서 질료matière의 표피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과학이 보여주는 것은 그림틀에 끼워진 그림틀cadre에 불과하며, 형이상학이 보여주는 것은 환영fantôme을 뒤따르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칸트의 비판 이후 우리는 과학은 극히 상대적인 인식이고 형이상학은 공허한 사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칸트의 비판은 고대철학, 그리고 근대인이 빌려다 쓴 고대적 형태의 철학, 이미 만들어져 있는 유일한사물의 체계를 제공한다고 자처하는 형이상학, 그리고 제 관계의 유일한체계에 불과한 과학, 요컨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지니는, 그리스 신전이 보여주는 건축적 단순성을 띠는 과학 및 형이상학에 타당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이전부터 우리가 소유해오던 개념들로 구성되었다고 해보자. 그때 형이상학은 순수지성의 모든 산물처럼 인위적이 될 것이다. 또한 과학이란 분석 또는 개념적 표상의 전체 작업이며, 경험은 반드시 명석한 관념을 검증하는 데만 소용되어야 한다고 해보자. 즉 미리 준비된 그물 속에 실재적인 것 전체를 가두는 유일한 관계 체계임을 자처한다고 해보자. 그때 과학은 인간 지성에 순수하게 상대적인 인식이 될 것이다. 칸트에게서는 플라톤주의의 유물인 보편수학이 과학으로 나타나며, 플라톤주의가 형이상학으로 나타난다. 칸트의 입론은 우리의 지성이 자연을 구성하며, 마치 거울에서처럼 우리가 그 자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과학의 가능성과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순수이성비판> 전체는 만일 이데아가 사물이라면 플라톤주의는 불법적이지만 만일 이데아가 관계라면 합법적이 된다는 것, 이데아가 천상에서 지상에서 내려오면 사유와 자연의 공통 기반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순수이성비판>은 우리의 사유가 플라톤주의적 사유 이외의 것을 하지 못한다는 요청postulat에 근거한다. 이 플라톤주의적 사유란 모든 가능한 경험을 기존의 주형moulds 속에 부어넣는 것이다.(223, 238) 여기에 모든 문제가 걸려있는데, 만약 과학적 인식이 칸트가 바라던 바 그대로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믿었던 것과 같은 미리 형성되어 있는 단순한 과학이 있게 된다. 사물에 내재한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위대한 발견은 단지 미리 그어져 있는 직선을 한 점 한 점 비추어줄 뿐이다. 또 만일 형이상학적 인식이 칸트가 바라던 바 그대로라면, 그것은 정신의 상대적인 두 태도의 동등한 가능성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옛날부터 잠재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두 해결 안에서 임의적이고 언제나 표면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나타나며, 이율배반에 죽어간다. 그러나 근대과학은 이렇게 단선적인unilinear 단순성을 보여주지 않으며, 근대의 형이상학도 이렇게 환원불가능한 대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근대과학은 단일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으며, 명석한 관념들에 기초한다. 개념의 명료성이란 개념을 유리하게 조작할 수 있다는 일단 획득된 보장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과학은 서로 정밀하게 맞아들어가도록 미리 짜여진 개념들을 규칙적으로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다. 반면 심오하고 다산적인 관념은 한 점에 수렴하지 않는 실재의 흐름courant de réalité들과 만나는 접촉점들이다. “철학한다는 것은 직관의 노력을 통해 구체적 실재의 내부에 자리잡는 것인데, [칸트의] 비판은 이 실재에 대하여 그 외부에서 정립과 반정립이라는 두가지 상반되는 관점을 취했던 것이다.”(224, 239) 직관의 기초를 지닌 학설은 정확히 그것이 직관적인 정도에 따라 칸트의 비판을 모면한다. 형이상학이란 정립thèses 속에서 응결되어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내부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 학설들이 바로 형이상학 전체이다. 분석을 운동 안에 자리잡게 하고 자신은 분석 뒤로 숨어버리는 단순한 행위l'acte simple는 분석 기능과는 전혀 다른 기능, 직관으로부터 발산된다. 이 능력faculté에는 전혀 신비스러운 것이 없다. 가령 문학상의 작품 구성을 생각해보면, 직관은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서 주제의 핵심에 일시에 자리잡는 노력, 그런 다음 스스로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충동impulsion을 가능한 한 깊숙이 추구하려는, 때때로 어렵기까지 한 노력이다.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운동에의 압박incitation이며, 이는 무한히 확장가능하지만 단순성 그 자체에 머무른다. 형이상학적 직관이란 이런 종류의 것이다. 이 경우에 문학적 구성의 각주 및 자료와 짝을 이루는 것은 실증과학에 의해서 특히 정신l'esprit에 대한 정신의 반성에 의해서 수집된 관찰 밑 경험의 총체이다. 요컨대 직관은 실재의 보다 내부적인 것과의 공감이다. 문제는 단순히 사실들을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미리 구상되고 미리 성숙한 관념들을 중화시켜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해서만 알려진 사실들이 지닌 물질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형이상학의 부분적 퇴조는 오늘날 너무나 분화된 과학과의 접촉에 있어 철학자들이 겪는 어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직관은 물질적 인식connaissances matérielles을 통해 획득될 수 있으나, 그런 인식의 요약이나 종합과는 전혀 다르다. 형이상학은 경험의 일반화와généralisation de l'expérience는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총괄적 경험l'expérience intégrale으로 정의될 수 있다.7)
1) 가령 베르그손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2부 및 기타 여러 저작들에서 자주 다룬 제논의 역설이 대표적이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 역설은 동적인 실재와 우리의 지성에서 성립하는 공간 표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trace과 운동 그 자체(운동의 운동성)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속을 공간 중의 신체가 갖는 운동 표상이나 감관 지각이 주는 외적 대상의 표상과 섞어버린다. 이와 같은 지속과 공간의 삼투 효과가 공간화된 시간과 동질적 시간을 낳는 것이다. 공간은 시간의 계기성이나 방향성이 제거된 상호외재적인 동시성에서 성립한다. 제논의 역설을 보면, 아킬레스의 걸음과 거북이의 걸음 각각은 불가분적인 하나의 행위act이며 공간처럼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베르그손은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상호외재적인 것이라고 보지만 운동은 나누어질 수 없는 것 자체이며 지속으로서의 시간이다. 아킬레스나 거북의 각 걸음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인 것으로 의식에 주어지며, 이러한 질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그 질을 본성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공간이 정지와 순간, 동시성과 동질성의 표상이라면 지속은 이질성을 계기로 갖는 운동 자체이다. 지속에서는 정지된 순간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공간 속에서 파악되는 것처럼 한 위치와 일치시킬 수 없다. 운동의 실재성은 우리의 살아있는 내적 의식 및 지속의 관련 하에서만 보아야 한다. 지성이 상정하는 부동적이고 동질적인 공간 표상에서는 결코 운동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실재 자체는 우리의 직관을 통해서 인식 가능한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공간은 제작적 삶이나 행위에 관심을 둔 지성의 산물이고 모순율에 기초해서 동적 실재를 고정화시킨 표상이다.
2) 가령 “정신의 본성은 기억이고 물질의 본성은 망각이다. 물질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질이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생명은 매 순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 지속의 형이상학에서 볼 때 정신과 물질은 긴장과 이완의 정도에 의해 연속적으로 변전하는 하나의 실체이고, 창조와 반복이라는 관점에 의해서는 질적 차이를 갖는 두 다른 실체로 나타난다.” 황수영, 『베르그손, 지속과 생명의 형이상학』, 이룸, 2003, p. 125.
3) 이 문장에 대한 주석에서 베르그손은 자신이 실체substance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여러 존재의 존속persistance을 긍정한다고 말한다.(212, 227) 즉 자신의 이론은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 즉 만물은 흐른다는 것, 존재는 곧 운동이라는 학설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러한 주장이 자기논박적이라면, 베르그손의 철학은 헤라클레이토스와 달리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곧 지속은 운동하면서도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4) 유동적인 개념이란 무엇인가? 직관도 어쨌든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개념을 경유해야만한다는 뜻인가? 직관 -> 유동적 개념 -> 실재 파악인가 아니면 직관 -> 실재 파악 -> 개념의 구성인가?
5) 그런데 베르그손은 다른 곳에서 지금까지 철학에 결여되었던 것을 정확성précision이라고 하는데(사유와 운동, p. 9) 이는 과학에서의 엄밀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6) 이 문장에 대한 각주 7번에서 베르그손은 자신이 직관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오래 망설였다고 하면서, 이를 통해 사유의 형이상학적 기능을 계획했다고 밝힌다. 직관은 기본적으로 정신을 통한 정신의 내적 인식이며, 부차적으로는 정신을 통한 물질 내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다. 반면에 지성은 물질을 조작하고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지만 물질의 심층에 닿을 특별한 운명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서론 2에서 직관을 또 이렇게 정의하기도 한다. “직관이란 정신, 지속, 순수변화를 획득하는 그 무엇이다. 그 참된 영역은 정신이지만 직관은 사물들 속에서, 심지어는 물질적 사물들 속에서 그것들의 정신성에의 참여를 파악하려고 한다.”(37)
또한 베르그손은 이어지는 각주 8번에서 자신이 쓰는 과학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한한다. 즉 순수지성을 통한 불활성 물질의 인식을 특히 과학적이라고 부른다(물론 생명 및 정신의 인식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불활성 물질의 인식은 그 역사의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순수지속의 직관을 이용하는 정도에 따라 철학적이라 불릴 수 있다.
7) Frédéric Worms, Le vocabulaire de Bergson, Paris : Ellipses édition Marketing, 2000, pp. 44~45에서 metaphysique 항목은 형이상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 형이상학은 규정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실재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려는 인식이며, 그럼으로써 절대에 도달한다. 우리의 인식과 실재 사이의 간격이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조건에 기인한다. 모든 인식은 실재적 대상을 가정하고; 우리의 인식에 의한 그 대상의 변형은 우연적이며 정확한 기준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러한 변형을 극복할 수단과 실재의 전도된 기준을 갖는다. ‘직관’은 모든 인식이 가정하는 실재의 소여이다. 그것의 변형은 공간적 불연속에서 나타나며, 인간적 삶의 필요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의 초월은 직관의 노력에 의해서, 지속의 파악 속에 있는 기준의 잃어버린 통일성을 재확립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의 형이상학 이론은 그 자신이 상당부분 그 입장을 변경했던 연결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그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외연, 그리고 동시에 과학과의 관계. 1903년(형이상학 입문)에 형이상학은 권리적으로 모든 실재(매번 독특한 방식으로, 규정된 형이상학적 대상들에 대한)를 대상으로 하며, 과학은 직관의 노력에 의해 지속에 다다르기 위해서, 그 방법을 초월해야 한다. 1907년 이후 (창조적 진화, 특히 1903년의 텍스트를 교정하는 사유와 운동 서문의 각주에서) 지성은 공간과 함께 물질의 절대적 실재에 도달하며, ‘형이상학’은 권리적으로 둘로 나누어지는데, ‘유일한’ 형이상학은 사실 ‘정신’을 돌본다. 과학과 형이상학은 더 이상 ‘직관 안에서’ 결합되지 않고, ‘경험 안에서’ 결합된다. 역설적이지만 과학과 형이상학을 구별하면서도, 사람들은 과학에 형이상학적 범위(실재로의 접근)를 제공하고 형이상학에는 과학적 차원(규정된 대상)을 제공할 것이다.
일반적 형이상학은 없으며, 오직 독특한 실재에 기반하는 형이상학이 있을 뿐이다. 베르그손은 형이상학을 실증과학 안에서, 말하자면 “진보하고 무한하게 완성될 수 있는” 실증과학 안에서 구상했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그는 완벽하게 세계의 형이상학적 접근을 정의했다.” 형이상학은 실재의 한가운데, 인식의 두 층위 또는 실재에 대한 두 관계, 항상 회복했거나 회복해야 할 간격, 내재적 간격 안에 있다. 그것은 각각의 실재에 대한 관계 속에서, 또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회복해야 할 형이상학적 부분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