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먼저 모더니티에 대한 전형적인 보편주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맑스주의, 베버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도구적 이성과 과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봉건주의 및 전통 귀족주의에 대한 초기 부르주아 투쟁과 관련해서 태어났다. 형이상학, 종교, 미신 등은 이데올로기적 형태라고 공격당했으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한 반테제로서 이데올로기와 투쟁한다. 즉 이성의 담지자는 진보라는 것이다. 가령 맑스에게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 재생산에 기여하는 왜곡된 의식이다. 맑스에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종교이다. 종교는 하나의 전도inversion이다.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은 신이 되고, 신의 관념을 만들어낸 인간 존재는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의 헤겔 비판에도 전도라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관여되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에서도 생산의 내적 관계들의 영역과 현상으로서 시장의 영역을 구별한다. 세계에 대한 전도된 의식은 억압과 모순을 은폐하고 재생산한다. 따라서 생산 과정과 잉여가치의 착취는 자유, 평등, 공정한 임금 등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의 근원지인 시장의 기능에 의해 은폐된다.(32)
그런데 역사와 이론은 어떻게 연관을 맺는가? 가령 헤겔이 프랑스혁명을 관념화시킨 입장이라면 낭만적 역사주의의 반동, 비합리주의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것이다. 루카치는 비합리주의가 주요한 사회 위기들과 관계있는 국제적 현상이라는 테제를 유지했다(이성의 파괴). 라라인은 도구적 이성이 근대에 보급되었으며, 발전에 대한 보편주의적 주장에 대한 비합리적 반동이 심각한 국제적인 자본주의 위기의 순간에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39~40) 비합리주의는 위기 자체를 모더니티와 이성 일반에 대한 비난으로 대체해버리며, 자본주의의 보다 특수한 모순을 은폐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들은 차이와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 속에서 타자 속의 인간다움의 요소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정당화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라라인은 인종주의를 예로 들어, 세이, 맬서스, 제임스 밀, 리카도 등의 식민주의와 헤겔, 맑스, 엥겔스 등 이른바 보편주의자들이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에 대해 갖고 있던 유럽중심주의적 편견을 분석한다. 반면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흄, 로크의 경험주의와 인종주의 간의 밀접한 연관도 흥미롭다(오리엔탈리즘). 주관적 이성에 대한 강조는 인종주의와 노예제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구성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이처럼 도구적 이성에 대한 공격은 역사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관점, 각 문화의 차이와 특수성을 강조하는 관점과 밀접하게 관련한다. 역사주의의 차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역설적으로 타자를 위협적인 것으로 구성할 수 있는데, 이는 게르만 문화를 옹호한 헤르더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셸링의 철학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비합리주의 중 하나로서, 앎이 근본적으로 이성적 개념이 아닌 지적 직관, 특히 예술을 통해 획득된다고 보는데, 그 역시도 동일한 인종주의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요지는 총체적 동일성이나 총체적 차이 모두 동등한 타자의 구성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합리주의 이론이 자민족중심주의, 총체주의, 보편주의, 초역사주의의 위험이 있다면, 역사주의 이론은 인종적 특수주의, 본질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의 위험을 갖는다(72).
2장 : 비합리주의는 이성에 대한 부르주아의 낙관적인 믿음과 진보 및 해방을 믿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는 의지의 우월성을 강조한 쇼펜하우어 철학, 힘에의 의지를 강조한 니체의 철학, 파레토의 사회학 등에서 나타난다. 니체는 의식, 이성, 과학, 진리에 대한 폭넓은 비판을 전개한다. 이성은 힘에의 의지의 하인일 뿐이며, 니체의 관점주의는 이후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으로 전해진다. 의식은 오류와 기만의 원천이며, 진리는 반박될 수 없는 오류이다(즐거운 지식 11, 265절). 현대 과학은 금욕적 이상과 필연적 동맹을 맺으며, 니체에게 예술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수단이다.(권력에의 의지 853절) 물론 니체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하지만(위의 책 351절), 니체의 이데올로기론은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의 비교에서 잘 드러나는데, 노예도덕에서 적은 악으로, 노예 자신의 허약성은 덕으로, 지배 본능은 악으로 위조된다. 노예의 상상적 복수, 양심의 가책 등은 니체가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주장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노예도덕이 강자의 승리를 지키는데 도움을 주는 한에서 또 이데올로기를 승인하는 것으로 본다. 즉 니체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자를 속이는 한에서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이며, 이데올로기가 피지배자를 속일 때는 그것을 인정한다(99). 라라인은 모든 철학이 오류인 것은 아니며, 니체는 오직 실용주의와 총체적 상대주의로 나갈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귀족적인 이데올로기 이론은 자기 논박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주인 도덕 등 니체가 옹호하는 것이 생물학적 요소(102)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귀족적 관념이며, 노예, 병약자, 이방인 등은 금발의 야수를 위한 먹이일 뿐이라고 본다.(도덕의 계보 1부 12절) 이러한 니체의 이성 비판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또한 영향을 미치며, 이후 하버마스는 기술적 합리성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와 지배로 환원하려는 이들의 기획을 비판하며, 모더니티의 합리적 내용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해석과 동화의 복잡한 과정을 무시하고, 문화 산업의 권력에 대한 과도평가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125).
3장 : 구조주의는 역사주의,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비판 이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알튀세르는 바슐라르와 스피노자의 입장, 진리는 자신의 척도라는 입장을 수용하면서, 과학의 타당성은 입증될 필요가 없고, 단지 과학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이성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의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알튀세르주의자와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이의 접점 중 하나이다(129). 알튀세르는 생산관계의 재생산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것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호명하고, 주체들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상상의 형태로 재현하도록 한다. 과학은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것이며(맑스를 위하여),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과학이라는 외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알튀세르는 여기서 레닌주의와 부정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조화시키는데, 여기서 중요한 이율배반이 발견된다. 첫째로 이데올로기를 사회를 포괄하는(comprehensive, 136쪽의 역자는 이를 ‘이해하는’으로 옮겼으나 부적절해 보인다) 심급으로 보는 동시에 과학의 적대자로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둘째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하며, 과학은 어디에서 벗어나는가? 그들은 어떻게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알튀세르는 곤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데, 사회를 과학을 소유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나누어야 하거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으로 지배한다는 이론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136~7). 1976년 강력한 비판 이후 그는 자기 비판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자기 비판의 에세이). 호명 개념은 유지되지만 이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개인을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적 주체로 호명하는 이데올로기가 가능하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은 사라지지만 알튀세르는 결국 레닌주의의 울타리로 돌아오며, 노동자의 자생적 의식과 과학 사이의 분리를 결합시키는 유기적 지식인를 논함으로써 그람시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의 이론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외부와 대면하게 하는 담론으로 이해되며, 결국 주체는 보조자일 뿐이게 된다(140). 그에게 역사는 주체없는 과정이며, 이러한 주체에 대한 공격과 담론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는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기본 전제가 된다. 사회적 총체의 통일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해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하나의 복합적 시도로서, 모호성이나 이율배반은 결국 그 자신의 이론의 해체를 불러오게 된다. 알튀세르의 광범위한 영향력, 특히 영미권에서의 수용은 주로 그의 초기 접근에 국한되지만, 하여튼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놀라운 지적인 힘을 증언해준다. 고들리에, 테레, 듀프레, 레이, 풀란차스, 라클라우, 무페, 홀, 마슈레, 이글턴, 섬너, 메팜, 힌데스, 허스트, 크리스테바, 보드리, 솔레르스, 코와드, 엘레스, 아들람, 페쇠 등등. 이들 수용은 1. 부정적 이데올로기 개념과 계급 중심성 같은 맑스주의의 기본 전제를 고수하는 경우(풀란차스, 고들리에, 메팜, 페쇠), 2. 그람시주의에 기원을 둔 중간적 경향과 호명으로서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라클라우, 무페, 홀), 3. 담론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삶의 구성원리로 확립하고 맑스주의 자체를 해체하려는 경우(코워드, 엘리스, 아드람, 허스트, 힌데스) 등으로 구분된다.
4장 :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너니즘의 저자들은 알튀세르가 보여준 반결정론적이고 반환원론적인 전망 및 정통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담론 중심성,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불신, 주체의 담론적 구성 등의 원리를 공유한다. 라라인은 포스트구조주의를 푸코, 힌데스, 허스트, 라클라우, 무페 등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 등에게 사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이데올로기 종말로 대체해버린다. 푸코는 구조주의와 맑스주의의 총체화하는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불연속과 분산, 차이를 강조한다. 이데올로기/과학, 지식/권력의 대립항을 넘어서는 권력이라는 문제틀이 제시되는 것이다. 권력은 곳곳에 편재하고 있으며, 이는 획득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 내부로부터 행사된다. 권력의 모세관적인 수준, 권력의 미시 관계들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사태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에 있어서 푸코는, 니체의 영향에 의해 권력과 지식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면서, 지식, 과학, 진리 같은 개념들을 비판한다. 그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거부하면서 담론의 인식론적 타당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과소평가한다(198). 그는 또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비판하면서, 권력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신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탐구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푸코 자신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반면 그 자신의 논의가 이미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203). 허스트와 힌데스의 경우도 알튀세르에서 출발했으나, 인식론 전반에 대한 공격에 착수한다. 특권화된 개념은 없으며, 결정이라는 개념도 부당한 것으로 거부되고, 정치적 실천에서는 어떠한 지식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론 비판은 상대주의와 독단주의로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담론들은 서로 공약불가능하게 되며, 이들은 어떠한 합리적 토론도 불가능해진다. 결국 허스트와 힌데스가 담론의 특권성을 부정할 때, 그들의 주장 역시 가능할 수 없는 자기 모순의 덫에 빠지게 된다(210). 라클라우는 최근 무페와 공동 작업하게 되면서, 이질성과 차이의 논리, 다원성과 비결정성을 그 슬로건으로 삼는다. 맑스주의는 과정과 주체라는 두 관점에서 볼 때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이와는 달리 급진적이고 다양한 사회운동은 민주주의적 혁명의 한 계기를 구성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급진 민주주의가 등치될 수는 없으며, 이들은 사회와 역사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포기하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 역시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비판을 거부하지만, 뒷문으로는 다시 이데올로기 비판을 도입한다(253). 이러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하버마스의 말처럼 총체화된 것이고 자기 소모적인 것, 자기 자신의 토대를 공격하는 것이다(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포스트 모더니즘은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와 아주 잘 공존하고 있다.
5장 : 하버마스에게서는 1981년까지 이데올로기 개념이 보존되는데, 그러나 이후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발표하면서, 이성의 개념화 및 의식철학의 대체에서 의사소통을 끌어들이고,이데올로기 개념은 포기된다. 먼저 하버마스의 초기 입장을 보면, 그는 우선 모더니티에 의해 야기된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으로부터 수용하고, 또한 마르쿠제의 견해에 나타나는 과학기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용한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시장경제 및 단순 교환원리에 더 이상 기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적인 정치 쟁점들을 탈정치화하는 일종의 기술관료적 의식은 권력의 정당화 문제를 마치 전문가에게만 맡겨진 기술적 결정의 문제인 양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기술과 과학에서 유래하며, 기술과 과학은 융합되고 점점 조작되고 있다(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그러나 다른 한편 하버마스는 마르쿠제가 기술적 합리성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진보적 생산력과 적절히 조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도구적 관심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물론 하버마스는 과학과 기술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도구적 관심들이 후기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실천적이고 의사소통적인 관심들의 영역을 감소시켰다는 사실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인식과 관심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는 관심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경험과학과 상응하는 기술적 혹은 도구적 유형, 역사 과학에 상응하는 실천적 또는 의사소통적 유형, 비판이론과 관련된 해방의 유형이 그것이다. 그는 맑스주의가 도구적 관심과 소통적 관심 사이의 구별을 소홀히 했으며, 역사 진화의 설명에서 소통적 관심을 도구적 관심으로 환원시켰다고 비판한다. 비판이론의 부정적 이성 개념이나 맑스주의의 긍정적 이성 개념 모두 전통적인 주체철학에서 유래하는 환원주의의 형태이다. 이는 주체가 개인으로서 객관적 세계와 관계맺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집단적으로 관계맺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는 보편적 화용론의 관점(263쪽에서는 pragmatics를 실용학으로 번역했다)에서 의사소통을 분석하고자 하며, 담론의 보편타당성의 기초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담화 행위에는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이 은연 중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담화 행위는 이해 가능한 타당성 요구(264쪽에는 이행이라고 오기되어있다)에 대한 상호 간의 승인을 포함하기에, 비강제적인 합의의 열망을 자신의 목적으로 갖는다. 이렇게 실제 담화에서 우리는 이상적 담화 상황을 불가피하게 가정하게 된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이처럼 폭력, 검열, 억압 때문에 진정한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 상황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때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합리화에 관한 프로이트의 관점과 유사하다. 이데올로기의 원형은 신경증적 불안이며, 이데올로기 비판에 관한 하버마스의 모델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적인 것이다. 비판 이론가에게는 자기 반성을 통해 사이비 의사소통의 원인을 폭로하기 위한 사회적 수준이 필요하며, 정신분석가와 마찬가지로 반사실적인 이상적 상황과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267). 또한 이데올로기 비판의 규범적 토대는 바로 언어구조 속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루카치와 하버마스의 유사성은 분명한데, 인간이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가설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와 실제 존재하는 구조들에 대해 비교할 수 있다면, 루카치는 계급의식이 그 기준을 제공하고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 상황이 그것을 담당한다.
문제는 이때 이데올로기가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으로 귀속된 당위에서 비판된다는 점이다. 해방의 가능성을 드러내주는 언어적 구조라는 규제적 모델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인 판단의 기준을 제공할 수 없다. 맑스의 비판이 역사적 분석에서 도출된 구체적인 것이라면, 하버마스의 비판은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구조로부터 도출된다(271). 이데올로기 비판과 정신분석 비판 사이의 유사성 역시, 신경증이라는 개인적 수준으로부터 계급권력과 계급지배라는 사회적 수준으로의 이행이 갖는 어려움 때문에 곤란한 것으로 드러난다. 개인의 정신분석적 치료를 정치적 행위를 위한 모델로 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버마스가 이데올로기의 토대를 이루는 물질적 이해관계와 계급적대에 대해 어떤 명백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273).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이론 이후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포기한다. 이데올로기는 19세기의 총체화하는 체계들에 국한되어야 하며, 발전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기능적 등가물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능적 등가물은 총체화하는 의식 형태의 형성을 방해하고 일상의식을 파편화시킨다. 하버마스는 기존의 이성 비판이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만 일면적으로 파악해왔다고 본다. 니체,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관한 생각이다. 합목적적 행위, 성공 지향적 행위, 도구적 행위와는 달리 의사소통적 행위는 이해에 도달하려는 행위이다. 물론 이 구분은 의심스러운데, 이해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과 이기적 계산이 꼭 대립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정도의 문제이다(286). 그리고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이해 가능성, 명제적 진리, 진실성 등의 타당성 요구를 포함하는데, 과연 그러한 상호주관적 합의가 진리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벨머는 하버마스가 이성의 운명이 합리성의 근본적 척도가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이성은 합리성과 진리의 근본적 척도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