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수, <칸트와 아렌트> 요약과 재구성, 추기. 


 


 


아렌트에게 철학은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이며, 우리는 사적 영역인 가계oikos로부터 벗어나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정치적 동물이다(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번역된 바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녀는 이데아를 향한 관조적 삶을 추구한 플라톤을 비판하며, 정치 속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사유하고 판단하는 철학으로부터 등을 돌린 마르크스도 비판한다. 아렌트는 또한 정치가 예술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의 조건이 복수성과 현상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각자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출연할 공연의 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의 장은 진리episteme를 강요하는 곳이 아니라, 의견doxa를 통해 다수의 인간들이 함께하는 장이어야 한다. 인간은 행위와 발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를 현시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에 출현한다. 그녀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지phronesis와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종합하는 한편, 공동체감에 입각한 보편성을 추구한다. 전통 철학에서 철학과 죽음은 연계되지만, 아렌트는 탄생성natality를 강조한다. 아렌트의 박사 논문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개념Der Liebebegriff bei Augustin 역시 현상의 세계를 고통과 눈물의 골짜기로 규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비판한다. 현상의 부정은 세계소외를 창출하고, 이는 무세계를 초래한다. 이 세상에서 탄생하여 행위하고 사유하는 인간, 아렌트는 현상성appearing과 복수성plurality를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 자리매김한다. 모든 존재는 드러냄, 현상에 의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이데거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던 아렌트는 불멸의 피안, 목적의 나라, 예지계, 영원한 존재 같은 개념을 기각한다. 사람은 오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근대 이후 생명의 유지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의 압도적인 우위와 마르크스에게서도 여전했던 생산 중심의 패러다임은 세계소외를 야기해왔다.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는 근대 초기까지 불안정이라는 부정적 함의를 늘 지녀왔지만, 아렌트는 독자성을 가진 다양한 인간들men을 획일적인 인간이나 인류로 귀속시키려는 제작poiesis의 정치를 거부하고, 복수성과 현상성에 기반하여 상호주관성을 인정하는 실천praxis의 정치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활동적 삶vita activa은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되며,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은 사유, 의지, 판단으로 구분된다.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은 행위(act는 어원적으로 archein, prattein, agere, agerere에서 유래하며, 이들은 모두 함께함이라는 뜻을 지닌다)로 수렴되어야 하며, 사유와 의지는 판단으로 수렴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행위와 판단의 조화를 주장한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 1950년대에 아렌트는 전자의 삶을 강조했다면, 1970년대에는 후자의 삶을 강조했다.

아렌트의 독특함은 하버마스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렌트가 차지하는 이러한 이론적 지형은 곧 니체와 칸트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이론적 입지점으로 소급한다. 가령 인간은 공간적으로는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 존재한다. 이 이야기로서의 판단이 전개되는 틈새는 진리가 강제되는 장이 아니라 서로 자기를 드러내는 의견의 장이다. 또한 현상, 특수성, 복수성을 중시하고, 진리를 비판하고 가상과 외관, 경연agon을 중시한다는 점은 분명히 아렌트가 니체와 접근하는 부분이다. 니체가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공적 영역인 현상 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냄은 긍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렌트는 니체가 행위를 힘에의 의지의 표현으로 환원함으로써 칸트의 공통감을 약화시키고 니체적인 미학은 심의적deliberative인 관점을 배제시킬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경우는 어떠한가?

칸트의 판단력은 한 주체의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매개하기위해, 법칙이 자연에 적용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칸트는 이미 특수적인 것을 보편적인 법칙 아래 포섭하는 규정적 판단력과, 특수적인 것들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능력으로서 반성적 판단력을 구분한 바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의 합목적성에 관계하며, 특히 대상의 형식과 인식 능력의 일치로 느껴지는 주관적 합목적성에 관계한다. 이는 이론적, 실천적 관심을 벗어나 느낌의 보편타당성을 추구하는 미감적 판단력, 확장된 사유방식, 공통감에 근거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합목적성은 이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인데, 칸트에게 판단력은 또한 사회적 차원의 도덕적 관심으로 향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홀로 있을 때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성과 상상력 간의 부조화가 중시되는 숭고미에서 이러한 도덕적 차원은 더욱 잘 드러난다. 숭고는 감성적 형식을 넘어서 이성의 이념들에 관계하고, 예지적 존재들, 영혼, 신 등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에 숭고 감정은 이미 도덕으로 향한다. 칸트의 미적 판단력은 목적 판단력을 거쳐 예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판단력은 사유와 존재를 등치시켜온 형이상학의 역사를 해체하고 근대적 합리성을 비판하는 철학적 사유들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해왔다. 미감적 판단력, 숭고 등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가 바로 그들이며, 아렌트 역시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특히 아렌트는 기존의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사이의 부조리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판단 개념에 집중한다. 칸트의 취미 판단은 인간의 현상성과 복수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판단의 형태로 분석되는데, 이 판단력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매개하며, 아렌트는 이러한 판단력을 통해 서로 의견을 말하면서(아렌트는 사유가 동반되는 말하기인 speaking과 그냥 내뱉는 말하기 talking을 구분한다) 행위하는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감을 마련하고자 한다. 행위act가 판단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이루어지면 독단적인 behavior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독선을 막기 위해 아렌트는 칸트의 무관심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 등의 개념을 적극 수용하며, 아집을 벗어난 심성의 확장, ‘넓혀가는 마음’을 수용한다. 판단이 없는 사회를 바보스러운 사회라고 보는 아렌트는 타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가까이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시한다. 판단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해지는 것으로, 칸트가 규정한 바, 인간이라는 호칭을 요구하는 자에게 언제나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으로서의 공통감과 관계한다. 판단을 통해 인간은 타인들과 소통하고, 호소하고 간청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견 나눔을 거쳐 동료의 입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넓혀감으로써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통감,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모두에게 대표성을 지닌 범례적 타당성은 아렌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물론 칸트의 경우 미적 판단력은 목적 판단력을 향해 있고, 취미는 숭고를 거쳐 도덕으로 향한다는 점, 미감적 보편성이 선험적인 공통 감각에 기반을 둔다는 점, 원초적 계약이라는 이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아렌트에 의해 비판된다. 그녀는 칸트의 선험성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천지를 통해 실제적인 대화 속에 터전잡아야 한다고 보며, 칸트의 선험적 공통 감각을 공동체적 공통 감각community sense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이는 선험성과 후험성을 동시에 지니며, 이러한 판단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의견 교류를 통해 교정된다는 점에서 칸트적 판단과 구별된다.

앞서 니체와 아렌트의 차이, 칸트와 아렌트의 차이만큼이나, 하버마스와 아렌트의 차이도 특기할 만하다. 공론장에서의 자유로운 토론과 의사 형성, 상호주관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아렌트는 가까워지지만, 아렌트의 경우 이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아닌 공통 감각에 근거를 두면서, 반드시 합의나 동의를 목표로 하지 않고 특수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갈라진다. 또한 아렌트의 의견은, 인지적 명제나 과학적 타당성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동의와 간청, 호소를 통한 공감과 정서적 동의를 구하기 때문에, 그 현실적 실효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가령 하버마스는 아렌트가 현실 공동체 안의 욕망 투쟁의 현장, 경제의 영역을 합리성 담론을 통해 탐구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한다. 권력에는 아렌트와 하버마스가 공히 강조하는의사소통적인 영역 외에도 수단적 권력, 행정권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에 대한 지나친 부정의식은 자칫 비인지주의, 주관주의나 미학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아렌트의 공론장은 콘서트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녀는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 시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들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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