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Miller, Philosophy of language, Mcgill-Queen's UP, 2007, p. 141~148
콰인은 번역 불확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 논제를 주장한다. 어떤 언어 L2를 언어 L1으로 번역할 때, 어떤 번역편람(translation manual, 번역 대상언어 L2의 각 문장을 번역하는 언어 L1의 각 문장과 1대 1 대응시킨 리스트를 제공해주는 편람)이 올바른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언어 L2를 언어 L1으로 번역할 때, 번역과 관련된 모든 가능한 증거들과 들어맞으면서도 서로 양립 불가능한 번역편람(translation manual) T1과 T2, T3 등을 구성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규약에 의해 수립되는데, 규약은 규약을 준수하거나 준수하지 않는 화자들의 행동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번역 불확정성 논제는 행동에 관한 가능한 사실들의 총체는 서로 전혀 다른, 양립불가능한 번역편람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동에 관한 사실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번역편람을 올바른지를 결정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이는 상충하는 번역편람 중 옳은 것을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주장이 아니라 그것을 결정해줄 수 있는 사실자체가 없다는 존재론적 주장이다.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는 같은 의미라는 개념, 의미 개념 자체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 없다는 점에서 의미회의주의를 함축하게 된다. 여기서 콰인은 일종의 행동주의적 전제에 호소하고 있다.(크립키는 행동주의적 전제에 근거하지 않은 의미회의주의를 보여준다)
예컨대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의 상황, 즉 언어학자가 이제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어느 부족의 언어를 번역하려고 하는 상황을 상정해보자. 이 언어학자가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그 부족 원주민의 행동(behavior, 의미론적, 지향적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기술되는 얇은thin 개념으로서의 행동)뿐이며 이때 번역 편람의 옳음 여부를 결정해주는 것은 화자들의 행동 밖에 없다. 원초적 번역자의 과제는 원주민 언어의 문장들의 자극의미(문장 S에 대해 동의 또는 반대를 촉구하는 감각자극)와 관련된 모든 사실들이 주어졌을 때, 이 문장들에 대해서 원초적 번역자의 언어로의 적절한 번역을 제공해주는 번역 편람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번역의 첫째 단계는 원주민 언어에서 동의나 반대를 나타내는 표현을 찾는 것이다.
"Gavagai"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라. 원주민이 자신의 근처에 토끼가 있을 때마다 "Yo, gavagai"라는 표현에 동의하고 토끼가 없으면 같은 표현에 대해 반대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원주민의 표현 "Yo, gavagai"와 우리말 "토끼가 있다"는 같은 자극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원주민 언어의 표현 "Yo, gavagai"에 대해 "토끼가 있다"라는 번역을 선택하지 않고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undetached rabbit part)이 있다"라는 번역을 선택하면 어떤가? 콰인은 토끼가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if and only if)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문장 (1)과 (2)는 정확히 같은 자극의미를 갖고 있다. 이때 번역의 올바름을 결정짓는 유일한 가능한 증거는 자극의미 뿐이므로, "Yo, gavagai"는 "토끼가 있다"로도,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1)과 (2)중 어느 문장이 원주민 언어 표현 "Yo, gavagai"의 올바른 번역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실은 없다. 동일한 방식으로 "Yo, gavagai"를 "4차원 토끼-전체의 시간 편린(time slice of a four dimensional rabbit-whole)이 있다."나 "토끼임의 예화(instantiation of rabbithood)가 있다."로 번역하는 것도 정당화된다는 결론이 귀결된다. 이 중 어느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는 유용성, 단순함, 자연스러움과 같은 순전히 실용주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며, 어떤 사실에 근거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Yo, gavagai" 이외에 원주민 언어의 다른 표현들을 고려한다면 자극의미에만 근거해서도 위 번역 중 어느 것이 옳은 번역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예컨대 원주민 근처에 있는 토끼의 꼬리와 코를 각각 가리키면서 "Si hit gavagai emas sa hat gavagai?" ("이 gavagai가 저 gavagai와 같은가?")라고 질문하는 경우, 만일 원주민이 동의한다면, "gavagai"는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으로 번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역시 콰인의 재반박이 가능한데, 위의 반론은 원주민 언어 표현 "emas"를 "같은 토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emas"를 "같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으로 번역한다고 하자. 그러면 "gavagai"를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으로 번역할 때, 문장 "Si hit gavagai emas sa hat gavagai?"는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이 부분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저 부분과 같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인가?"로 번역된다. 이렇게 번역될 경우는 원주민이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gavagai"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는 과학철학에서는 이론 미결정성(Underdeterminantion of theory) 논제로 이어진다. 물리 이론은 가능한 모든 관찰 증거에 의해서도 미결정적이다. 다시 말해서, 가능한 모든 관찰 증거들과 들어맞으면서도 서로 양립불가능한 물리 이론 T1과 T2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