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는 스캔들



진태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원 연구교수)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1940~)를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구별시켜주는 특징 중 하나는 그의 반골 기질이다. 좌파 지식인치고 고분고분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랑시에르는 유독 비타협적인 태도가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자본을 읽자󰡕(1965)의 공저자이기도 한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독자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뒤에도 푸코, 부르디외, 뤼시엥 페브르, 리오타르, 하버마스 같은 동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펼치면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를 단순히 튀기 좋아하는 시비꾼 정도로 간주한다면, 그건 철학자 랑시에르의 이론적 위력과 중요성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오늘날 그가 서구 사상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양의 철학 고전에 대한 면밀한 해석과 다양한 분야의 문헌들에 대한 끈기 있는 천착,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정세에 대한 민감한 탐색 등이 한데 어우러져 독창적인 하나의 철학적 입장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철학, 특히 정치에 관한 그의 사유의 핵심은 놀라울 만큼 간명하다. 그것은 정치는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고, 민주주의는 평등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간명한, 심지어 허술해 보이는 주장이 그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우선 그의 주장이 서양 사상의 근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롯해 근현대 사상가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쳐 숙성되어 나온 주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불화La mésentente󰡕(1995)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Aux bords du politique󰡕(1998)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정치철학 저작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랑시에르 저작의 또 다른 호소력은 그것이 현실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가령 󰡔불화󰡕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유민주주의(“합의”의 정치)를 비판하고 새로운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며, 이 책 역시 최근 프랑스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제기한 비난들에 맞서 다시 한 번 민주주의, 곧 정치 자체의 가능성을 옹호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은 그다지 신통한 발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민주주의보다 더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정치 제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정치적 원리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사정이 뚜렷이 드러나거니와 또한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그것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굳이 한 권의 책을 쓰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옹호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민주주의가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마르크스가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은폐하기 위한 허울 좋은 도구라고 비판한 바 있으며, 그 밖의 다른 지식인들도 민주주의의 한계와 난점들을 고발해왔다. 민주주의는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한다면,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처칠류의 통속적인 정치적 지혜가 꽤 널리 운위되는 것 역시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세간의 평가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그것이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가장 덜 나쁜 제도이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의 정치적 원리로 수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고발도 생각해봄직한데, 장-클로드 밀네와 베니 레비 또는 도미니크 쉬나페 같은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표출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랑시에르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각각 상이한 분과학문의 전문가들이고 각자가 취하는 입장도 서로 다르지만, 현대 민주주의에서 문명의 위기를 발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과잉(자유와 권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리들의 방종)과 무제한적인 소비(재화, 향락 등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라는 이중의 과잉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곧 문명의 중심에 내재하는 “어떤 원죄, 어떤 도착(倒錯)”을 나타낸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이런저런 특수한 악의 명칭이 아니라, 우리를 타락시키는 악에 대한 유일한 명칭이라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증오, 이러한 고발은 그것이 매우 근본적이고 강렬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증오의 역사적 뿌리를 더듬어보게 되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왜 처음부터 하나의 스캔들이었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단호한 이념인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이중적인 결함 내지 악덕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사실은 단 하나의 공포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평등한 무리인 인민에 대한 공포이며, 그들이 구현하는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에 대한 공포다. 플라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공리 중 하나는 대중 또는 인민에게는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政體), 자칫 참주정으로, 또는 현대의 용어로 하면 전체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채택되고 있는 민주주의는 인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위험스러운 인민의 자기 통치를 가능한 한 억제하고 그것이 낳을지도 모르는 파국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를 갖춘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다. 유일하게 좋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문명의 파국을 억제하는 민주주의”(19쪽/p. 10)인 셈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사실은 “과두제적인 통치에 대한 본성적 충동”, 곧 “인민을 몰아내고, 인민과 더불어 정치를 몰아내려는 충동”(152쪽/p. 89)의 발현이며, “인민 없는 통치” 곧 “정치 없는 통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정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인가? 이 질문에 대해 랑시에르는 단호히 그렇다고 답변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전혀 다른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테제 중 하나에서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민주주의는 통치해야 할 사회도 아니고 사회에 대한 통치도 아니며, 정확히 말하면 모든 통치가 궁극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통치 불가능한 것 자체다.”(97쪽/p. 57) 민주주의가 위험하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의 원리나 토대란 없다는 사실, 곧 통치자와 피통치자를 선별할 수 있는 고유한 기준이나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통치의 원리의 부재에 기초를 둔 통치, 이러저러한 자격이나 특권을 갖지 않은 이들의 통치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추첨제를 가장 민주주의적인 제도로 옹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이미 플라톤이 비판한 것처럼, 결국 통치를 무능력한 이들에게 내맡기는 결과를 낳지 않겠는가? 랑시에르는 답변한다. 민주주의 또는 추첨제 자체는 “결코 유능한 이들보다 무능한 이들을 더 선호하지 않았다.”(84-85쪽/p. 49) 추첨제의 진정한 의미는 궁극적인 판단을 인민에게, 개인들에게 맡겨둔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나 그것의 제도적 구현으로서 추첨이 지식과 교양, 전문적인 능력을 배척한다고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랑시에르의 사상은 현실에서 실행 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은 랑시에르가 이 책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인 정치제도로 옹호한 추첨제를 정책 속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야유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이미 얼마나 과두제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지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사실 랑시에르의 저서를 읽노라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철저한 과두제 사회인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정작 그 속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이 책이 갖는 최소의 의의는, 이런저런 철학자ㆍ이론가들이 미리 불가능하다고 단정한 직접 민주주의가 왜 정치의 가능성 자체와 연결되어 있는지 사고할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을 하나의 심각한 문젯거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화두를 통해서만 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민의 정치적 참여가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있는지, 또 그러한 배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마도 처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업적이라고 할 수 없다.

서평자로서 늘 꿈꾸는 소망 하나는 서평을 역자와 출판사에 대한 감사의 말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서평을 매듭짓는 평자의 마음은 감사는커녕 착잡함을 넘어 참담하기까지 하다.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번역본은 오역을 찾는 것보다는 제대로 번역된 문장을 골라내는 것이 훨씬 빠를 정도로 수많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아마도 역자는 자신이 무슨 오역을 범했는지 모를 수도 있겠다). 이런 번역본을 접하게 되면, 도대체 번역은 왜 하는가라는 가장 초보적인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오역과 관련된 소란에 휘말린 적이 있는 곳인 만큼 더더욱 이런 질문이 불가피해진다. 이런 터무니없는 오역본을 출간하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치열한 고투 끝에 마침내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의 길을 개척한 철학자에 대한 예의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난해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이 책을 산 독자들에 대한 윤리적인 배반일뿐더러, 역자 및 출판사의 존재론적 근거에 대한 자기 부정이 아닐 수 없다.

역자나 출판사에게 권하건대, 오역에 대한 문제제기들이 성가시고 모욕적으로 느껴진다면, 제대로 책을 번역하고 만들든가 아니면 아예 다른 일에 종사하시라. 어려운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길 말고 성공과 처세에 관한 출판에 매진하는 쪽이 적어도 서로를 덜 비참하게 해줄 것이다.




출전: 󰡔황해문화󰡕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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