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telos.egloos.com/1470836에서 펌.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Does democracy mean something?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ere



 나는 데리다에게 바쳐진 연속강연에의 나의 개입에 대한 예비적 언명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데리다의 제자였거나 그의 사상의 전문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나의 교사였던 때-아주 옛날의 일이다-부터, 나에게는 그와 철학적인 문제를 논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표현할 경의는 그의 저작에 대한 주석이 아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에 점점 그의 사고의 전경을 점하게 된 개념과 문제-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의미되고 있는가-를 다루는 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우애의 정치학The politics of friendship>>에서, 페리클레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플라톤의 <<메넥세노스>>에서 부연되어 있는 잘 알려진 명제-'아테나이 인의 통치는, 이름은 민주주의이지만, 현실에서는 귀족제, 즉 다수자의 찬성을 얻은 최고로 뛰어난 자의 통치이다'(*주1)-에 주석을 다는 것에 의해, 이 쟁점을 전개한다. 데리다는 이 언명의 기묘함을 지적한다.(*주2) '민주주의적' 통치라는 수사 그 자체가, 이 형태의 통치에 두 개의 대립하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리지만, 그러나 사실상 귀족제이다. 이 '그러나'를, 이름과 사물 사이의 이 이접離接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그것을 수사修辭 상의, 또는 통치를 위한 허위라고 보거나, 이름과 '사물' 사이의 차이에 의해,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것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형태의 통치와도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내적인 차이가 가리켜지고 있다고 상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 물음은, 데리다에 의한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 구조의 탐구와, 내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탐구에 공통의 근거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는 것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이름과 현실을 다루는 현대의 두 가지 논쟁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논쟁은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관한 중요한 불일치를 품고 있다. 이라크의 선거와 레바논에서 일어난 반 시리아 저항운동 직후, <<이코노미스트>> 지의 표지에 '중동에서 민주주의가 시작'이라는 말이 춤을 췄다. 민주주의의 시작에 대한 자기-만족은, 이름과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두 갈래의 논증구조-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또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에 따라 정식화된 것이다.
 '.....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는 어떤 이상주의자들의 논의였다-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통치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힘에 의해 다른 민족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실용주의적인pragmatic 견해를 취하여,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이라고 하는 유토피아적인 견해를 치워 버린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된다'라고. 두 번째 논의는,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법의 지배, 자유로운 선거 등을 가져다 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혼란을, 민주주의적 생활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사담이 실각한 후 일어난 약탈에 관해 말한 것처럼-우리들은 이라크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며, 자유라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을 행할 가능성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도 론과 그러나 론은 요컨대 일관된 논리인 셈이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의 목가 등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혼란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초대국의 병기에 의해 외부에서 야기되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아마도 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국super power(=초권력)'은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진 나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의한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논의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에 대한, 지금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훨씬 오래된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런 논의는 30년 정도 전 삼극위원회(*일역주1)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두 개의 주요한 논의를 끊임 없이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극위원회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몽상가들이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통치와 동일시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이런 몽상가들은 삼극위원회에서 비난된 '가치지향의 지식인'과 같은 종류의 등장인물이다. '가치지향의 지식인'은 '정책지향의 지식인'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대립하는 '적대적문화'를 조장하고 지도자와 권위에 도전하는 과잉의 민주주의적 활동을 촉진하고 있다고 비난받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작되지만, 그러나 그것과 함께 혼란도 시작된다.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약탈에 대해 도날드 럼스펠드가 한 농담은 30년 전에 사무엘 헌팅턴이 행한 논의를 그대로 반복한 것처럼 들린다. 헌팅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권위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개인이나 집단을 자기-지배와 연결된 규율과 희생의 필요성에 저항하게 하는, 그런 요구의 증대에 다다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로운 영토로 넓히기 위한 군사작전이, 현재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 이해되고 있는 패러독스를 전경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적 통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정책을 위협하는 과잉을 통제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이 과잉은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써, 그 이름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주3) 에 기술되어 있듯이 민주주의적 통치를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이 위협은 완전한 이중 구속double bind으로써 나타난다. 한편, 민주주의적 생활은 인민에 의한 '자기-통치'라는 이상주의적 관점의 실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좋은 정책의 원리와 절차, 권위, 과학적 전문지식, 실용적인pragmatic 경험을 침식하는 정치활동의 과잉을 동반한다. 그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과잉의 억제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치활동의 억제는 요망과 요구를 증대시켜, 정치권위와 시민으로서의 행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적생활' 또는 '행복의 추구'에의 권력부여에 다다른다. 그 결과로서, '좋은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적 생활의 본질에 내재한 정치에의 참가와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중의 과잉을 순치할 수 있는 통치형식을 의미한다. 현대의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즉,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생활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는 통치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며, 후자에 의해 억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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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Plato, Menexenus, 238c-238d

주2) Jacques Derrida, Polittics of Friendship (London: Verso, 1997), p93-113


일역주1) 삼극위원회: 1973년 10월에 미국, 일본, 유럽 세 지역의 민간조직으로서 발족.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이해관계의 조정에 기울기 쉬운 정부간 관계를 보완하고, 더 넓은 시야에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75년에 도쿄와 교토에서 열린 연차총회에서는 중동평화 등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었다. 본문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의 통치능력>>은 그 때 제출된 문서이며, 사무엘 헌팅턴, 미셸 크로졔, 죠지 와타누키 삼인이 각각 미국, 유럽, 일본의 민주주의 상황(정권담당자가 피치자의 요구에 얼마나 응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피치자에게 얼만큼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보고했다.


주3) Michel Crozier, Samuel P. Huntington, Joji Watanuki, The Crisis of Democracy - Trilateral Commission Task Force Report n. 8(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통치의 형식인가 사회 생활의 형식인가
 

 우리들이 이 패러독스의 이해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면, 내가 앞서 언급했던 두 번째 논쟁을 일별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것은 더 작은 불일치이지만, 우리들이 주요한 논쟁에 내기로 걸린 것과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병사들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중동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굉장히 색다른 견지에서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좋은' 민주주의와 '나쁜' 민주주의의 동명성(同名性)을 해체하는 짧은 저작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쟝 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의 <<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주1). 저자는 많은 이유에서 알려져 있었지만, 주로, 이른바 '공화주의' 정치 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알려져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민성citizenship은 전적으로 법의 보편성, 교육, 지식의 권위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온갖 형식의 다문화주의 또는 적극적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에 반대하고, 사회적 또는 문화적 차이가 권위와 보편성을 침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밀네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중동에서 평화를 추진하는 것, 즉 이스라엘-팔레스티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는 것에 있다. 밀네르는 이 유럽적 평화는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의 파괴만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라고 논한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팔레스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방식의 평화를 제안했다. 유럽의 민주주의적 평화는 홀로코스트의 결과였다. 민주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유럽, 과거의 유럽의 청산은 1945년 이후에 가능했다. 유럽은 그 시점에서, 나치가 행한 대량학살에 의해, 자신들의 꿈의 방해물이었던 사람들, 즉 유대인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밀네르가 논하 듯이 '민주주의적 유럽'이란 실제로는, 정치-그 원리는 한정된 전체성에 의한 지배이다-를, 사회-그 원리는 반대로 비한정성非限定性이다-속으로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민주주의란 이 비한정성의 법적 성취를 말하는 것이며, 이 비한정성의 법은 기술에 의해 상징됨과 더불어 그것에 의해 달성되며, 오늘날, 성별과 혈통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 프로젝트에서 정점에 달한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는 적절한 기술의 발명에 의해, 혈통과 전승을 원리로 하는 사람들을 절멸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논증은 편집광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증은, 민주주의의 치세는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행하고, 개별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행위성agency의 제諸 형식과 공동체 감각 그 자체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나르시시스틱한 '대중 개인주의'의 치세라고, 이 20년간 주장해 온 사조 전체와 획을 같이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밀네르는, 좋은 정책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사회 생활에서 생겨난 필요needs, 요망, 요구의 비한정성에 대해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새로움은, 이 대립을 근본화하고radicalize, 그것을 논리적인 대립으로써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가 기술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의 이론과 계산 방법은 온갖 형식의 좋은 통치와 대립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과잉을 통제할 수 있을 좋은 통치는, 밀네르에 의해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신중하면서도 인상적인 방식으로, 사목司牧통치라고 불린다. 이 표현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세이며, 또한 일찍이 좌파 지식인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또 다른 책, 예전의 모택동주의 지도자 베니 레뷔Bernard-Henry Levy에 의해 쓰여진 <<사목의 살해>>(*주2)라는 책이다. 레뷔는 서양의 철학과 정치학의 전통이 억압했던 성서의 인물로서, 사목을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사목통치'는 무엇보다도 우선, 플라톤으로부터 차용된 관념이다. 레뷔는 플라톤이 <<정치가>>에서 검토한 목인牧人에 관한 그 자신의 사고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는 더 복잡하다. 한 편으로, 플라톤은 사목통치를 세계가 신의 목인의 손에 의해 직접 인도 되었던 신화적인 과거에 위치 짓는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사목의 패러다임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조탁彫琢했던 수호자 지배라는 견해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사목통치를 참조하는 것에 의해,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행하는 작전과 프랑스에 의한 민주주의의 범죄고발에 있어서, 민주주의에 대해 현재 행해지고 있는 논의의 이론적 중핵이 명시되고 있다. 실용적인pragmatic 정책과 대립하는 인민의 자기-통치의 유토피아로서든, 공통의 법의 규율과 대립하는 개인적 욕망의 무질서한 소란으로서든, 민주주의의 이중의 과잉에 대한 현대의 논의는, 플라톤의 민주주의의 초기설정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린다. 한 편으로,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는 변경될 수 없는 쓰여진 법의 강고한 체제이다. 이 형식의 민주주의는, 치료해야 할 병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의사라면 누구라도 딱 잘라 썼을 처방전(=명령, 지시)과 닮았다. 다른 한편으로, 문자의 엄격함은 인민의 완전한 자의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환언하면, 개인이 공통의 규율에 관심을 가지는 바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위하는 무제한의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 플라톤의 논의가 의미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정책의 원리가 아니라 좋은 정책에 저항하는 생활 양식way of life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혼돈에 다다른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것은 온갖 것들이 뒤집혀 버린 생활 양식이다. <<국가>> 제 8권은 온갖 자연적 관계가 전복된 국가를 묘사하고 있다. 민주제의 도시에서, 지배자는 지배하는 대신 피지배자에게 복종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종하고, 연장자는 젊은이를 모방한다. 여성과 노예는 남성과 주인과 똑같이 '자유'이다. 그리고, 길 위의 당나귀 조차, '최고의 자유와 존엄을 가지고 길을 양보하지 않고, 마주쳐도 옆으로 피하지 않는 온갖 사람들과 부딪혀 버린다(*주3)'는 것이다.
 사회적인 생활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민주주의적 개인주의의 위험에 대한 포스트 토크빌Tocqueville 적인 논의 전체는, 거만한 당나귀에 대한 오래된 플라톤의 농담을 반복하고 있다. 이 농담의 지속적인 성공에는 뭔가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우리들은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대국민국가, 세계시장, 강력한 기술과 같은 것들로 구성된 문맥context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여성, 노예, 외국인 배제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하는 고대의 소규모 남성 도시와는 이미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다. 그 결론은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고대의 민주주의적 촌락의 통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받아 들여질 수 있다면, 고대의 반-민주주의자에 의한 민주주의적 촌락의 논쟁적인 묘사가, 주식거래, 슈퍼 마켓, 온라인 경제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세계의 민주주의적 개인의 진짜 초상으로서 여전히 타당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패러독스가 시사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생활의 묘사가 민주주의의 개념화를 뒷받침하는 방식은 기만일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민주주의적인 당나귀가 일으키는 소란은 더 심각한 문제를 상징한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에 관한 표준적인 언명(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통치가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형식이다)는 훨씬 근본적인 패러독스, 즉 정치 그 자체의 패러독스의 지표이다.
 민주주의는 통치의 형식도 아니고, 사회생활의 형식도 아니다, 이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그와 같은 것으로서의 정치의 제도화이다. 민주주의는 패러독스로서의 정치의 제도화인 것이다. 그것이 패러독스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것은, 일견,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을 무엇이 근거짓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물음에 대답을 주지만, 그것은 놀랄만한 대답이다.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배권력의 근거 그 자체다, 라는 대답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플라톤이 <<법률>> 제3권 서두에서, 일순의 섬광 속에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구절은 내가 아는 한 민주주의에 관해 논의하는 데리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패러독스'의 핵심을 설명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은 지배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열거한다. 그는 우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자연적 차이에 기초하는 여섯 개의 자격을 열거한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권력, 연소자에 대한 연장자의, 노예에 대한 주인의, 천한 자에 대한 고귀한 자의, 더 약한 자에 대한 더 강한 자의,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교양 있는 사람들의 권력이다. 이런 자격은 사회적 위치의 명백한 배분을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더 강한'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가능하지만, 약함이 강함의 반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연장이라는 것이 권력행사를 위한 충분한 자격인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격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차이이며, 이미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 형식이다. 이런 자격은 지배를 위한 아르케arche로서 기능할 수 있다. 아르케는 시간적인 시작임과 동시에 이론적인 원리이다. 원리로서의 아르케는 사회적 위치와 능력의 명백한 배분을 의미하고, 이 배분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권력 배분의 근거가 된다. 시작으로서의 아르케는 지배의 사실이 지배를 위한 적성 속에서 예기預期되어 있으며, 역으로 이 적성의 명증성이 그 경험적인 작용 사실에 의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치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들이 지배자의 입장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피지배자의 입장에 있는가, 그 이유를 제공하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최초의 여섯 개의 지배 원리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원리가 있으며, 플라톤은 그것을 '제비뽑기'라고 부른다(*주4). 이것이 민주주의이며, 두개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역할의 선先-취取된 배분도, 권력 행사를 지배를 위한 적성에 속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제비뽑기'는, 온갖 아르케의 부재와 같은, '자격 없는 자격'과 같은 자격의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이 '자격 없는 자격'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귀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아르케도 아니라고 결론 짓고, 그것을 통치 원리의 리스트에서 제외할 수 있다. 플라톤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이것을 두고 그가 민주주의에 관대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 '주체', 즉 인민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아르케의 민주주의적 결여는, 적절한 아르케를 과시하는 '좋은' 자격과는 반대의 움직임을 한다. 확실히 위에 열거된 자격들은 좋은 자격들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무엇에게 좋은 것인가. 연장자가 연장이라는 것은, 확실히 통치를 근거지을 수가 있다. 그 정확한 이름은 장로제일 것이다. 교양있는 사람들의 지식은 통치를 근거지을 수 있으며, 그 이름은 에피스테모크라시epistemocracy 또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가 될 것이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 통치형식의 리스트에는 정치적인 통치가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통치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그 이상의 것, 즉, 연장, 부성, 지식, 강함 등에 의한 통치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형식은, 가족, 부족, 학교, 일터에 이미 존재하고, 인간의 공동체의 더 광범위하고 더 복잡한 형식에 유형을 제공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천공'에서 도래하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천공'에서 도래하는 통치는 둘 뿐이다. 첫 번째 것은 사목통치, 즉 신의 목인이 인간의 무리를 직접 지배하고 있던 신화적 시대의 통치이다. 두 번째 것은 운에 의한 통치, 즉 제비뽑기, 즉 민주주의이다.
 얼마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해 보자. 인간이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통치의 많은 유형이 있다. 출생, 부, 힘, 지식은 가장 공통적인common(=보통의) 것이다. 그러나 통치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에게 공통의 대리보충적인 자격을 의미한다. 이미 신의 목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면, 자격은 이미 한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되는 자격도 지배하는 자격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갖는 자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미이다. '데모스demos의 권력'이란, 어떠한 아르케에 의해서도 권력을 행사하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자의 권력을 말한다.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도 특정한 집단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제도, 그리고 어떠한 하나의 인민 집단의 권력을 정통화하기도 하고 그 정통성을 뺏기도 하는, 대리보충적인, 근거짓는 권력이다.


*주1 Jean-Claude Milner, Les Penchants criminels de l'Europe demomcratique (Paris: Editions verdier, 2003).

*주2 Bernard-Henry Levy, Le Meurtre du Parteur (Paris: Editions Verdier, 2004).

*주3 Plato, Republic, book VIII, 563c-d.

*주4 Plato, The Laws, Book III, 690c.

폴리스, 정치, 정치적인 것


이상이 거만한 당나귀가 불러 일으키는 불쾌의 이유이다. 좋은 정책에 방해가 되는 것은, 이른바 대중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유래하는 요구의 과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신의 근거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그것을 기초 지음과 동시에 그 기초를 철거하기도 하는, 대리보충적인 '인민의 권력'에 입각한다. 근거 짓는 권력과 파괴하는 권력 간의 이 합치는,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자기-면역auto immunity'이라는 데리다의 개념보다도 근본적인 것이다. 이 자기-면역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것은 우선,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제한 없는 자기-비판, 반-민주주의적인 프로파간다에도 권력을 줄 수 있는 수용력capacity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그것은 민주주의의 적이 민주주의와 싸우기 위해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이용할 때, 그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통치가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제한 또는 허공에 매달아 버릴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두 경우 모두에서 민주주의는 Autos 또는 자기의 검토될 수 없는 권력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타자성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도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데리다는 코라Chora(場)의 순수한 수동성으로부터 타자 또는 신참자-그들을 포함하는 것이 '도래할 민주주의'의 지평을 정한다-에게로 실을 연결하는 것으로, 자기의 원환圓環을 파괴하는 것에 착수하는 것이다.
 나의 이론異論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타자성은 외부에서 정치에게로 도래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 자신의 타자성을 가지며, 그 자신의 이질성 원리를 갖는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실로 이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의 권력이 아니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무언가 그와 같은 권력의 붕괴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arche의 원환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정치가 어찌됐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무질서의 원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리는 정치의 자기-근거 지음을 가로 막고, 정치를 분할의 대좌로 바꾼다. 나는 시험삼아, 폴리스police, 정치politics, 정치적인 것political이라는 세 개의 말의 이접離接관계에서 그 분할을 개념화했다.
  연장자, 더 현명한 자, 더 부유한 자 등이 있기 때문에-또는 더 정확히 하면, 그런 역할을 연기하기 때문에-타자를 지배하는 인간이 있다. 자격, 장소, 역량의 이런저런 배분에 근거하는 지배의 유형과 절차가 있다. 이것이 폴리스의 논리라고 내가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연장자의 권력은 장로제 이상의 것이어야만 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 또한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지한 사람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병사는 병기를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대신 지배자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만약 그렇다면, 지배자의 권력은 자기와 피지배자에게 공통의 대리보충적인 성질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은 정치적인 권력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폴리스의 논리는 다른 논리, 정치의 논리에 의해 횡단되어 있을 터이다. 정치는 자격 없는 자의 권력에 의해 모든 자격이 대리보충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자가 통치하는 이유는 한 인간이 타자를 지배할 어떤 충분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배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이유의 부재에 입각해 있다. '인민의 권력'은 그것을 정통화하면서 동시에 그 정통성을 뺏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데모스demos란 것은, 인구, 인구의 다수파, 정치체, 하위계급low class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자격을 갖지 않는 자-그것은 일거에 모든 사람, 누구라도 의미한다-로 이루어진 잉여의 공동체이다. '인민의 권력'은 어떠한 집단 또는 제도의 권력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그것은 이접의 형식에서만 존재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가의 제도와 지배의 실천을 정통화 하면서 그 정통성을 뻇기도 하는 내적인 차이이다. 그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민의 권력'은 제도의 과두제적 운영에 의해 지속적으로 횡단되고, 소멸하는 차이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에서, 인민의 권력은 역할(=할당), 장소 또는 역량의 폴리스적 배분에 도전하고, 정치적인 것의 무질서한 기초를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는 정치 주체의 행동에 의해 끊임없이 재再-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접은 아포리아가 아니라, 부동의dissensus이다.  아포리아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그 자신의 원리에 근거 지으려고 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기초는 찢겨진다. 민주주의는 지배의 실천이 끊임없이 덮는 균열을 계속 다시 여는 것, 부동의의 실천이다.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조금 전에 나는 말했다. 동일한 법률, 동일한 헌법이 반대의 방식으로 시행되는 일도 있으며, 그것은 법률이나 헌법이 그 내부에서 틀 지어지는 공통성 감각에 의해 결정된다. 법률이나 헌법은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획정劃定하고, 정치적 행위성을, 적절한 자격을 부여 받은 일정한 행위자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또 법률이나 헌법은 같은 텍스트에서 새로운 정치적 장소, 쟁점, 행위자를 발명하는 민주주의적인 해석과 실천에 길을 비켜 주기도 한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련의 제도가 아니라, 감성적인 것의 다른 배분, 다른 무대 설정, 말과 말이 가리키는 사물의 종류 사이의, 또는 말과 말이 권력을 부여하는 실천 사이의, 그것과는 다른 관계인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획정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 무대의 축소는 보통 정치적인 것의 순수함, 법의 보편성, 정치적 보편성과 사회적 개별성 사이의 구별 같은 이름 아래 실천된다. 그런 정치의 '순화'는 실제로는 그 방기放棄와 같다. 반대로 민주주의의 논리는 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애매하게 하고, 이동 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소멸하는 조건으로서의, 모든 사람의 평등을 재-제정하는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의 한계=경계limit를 이동시키는 것-이것이야 말로, 정치가 의미하는 것이다.

두 가지 정체성의 간극에서


 말할 것도 없이 이 실천은 도시나 국가의 통치가 단일하고 다의적일 수 없는 공동체 원리를 근거로 할 것을 원하는 자에게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민주주의의 이중 구속dobule bind, 이중성, 또는 허위에 대한 끝 없는 지탄, 플라톤에서 사무엘 헌팅턴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현실이 그 이름과 모순됨을 증명하려고 하는 지속적인 시도가 행해져 왔던 것이다. 이 지탄의 가장 잘 알려진 정식은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에서 보여진다. 이 대립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훨씬 오랜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쓰여진 법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인 생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플라톤의 구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도 있다. 플라톤의 모델에서는 민주주의자의 개인주의적 생활은 법의 엄격함에 겉보기로 참가commitment하는 것의 진짜 내용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면, 즉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생활'을 은폐하는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대립한다. 그러나 결론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논의의 구조는 동일하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립하는 평등의 외관이다. 이 '현실'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쾌고快苦의 계산에 종속되는 민주주의적 개인의 전적인 쾌락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은 사적소유와 사적이해의 현실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한 것처럼, 정치적인 나타남의 영역의 반짝임, 빛남, 을 '단순한 소여성의 어두운 배경'에 대치하는 것에 의해 그 관계를 역으로 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이상의 어느 경우에서든, 민주주의는 나타남(=외견)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라는 필터를 통해 접근된다. 이 대립을 통해 민주주의는 묘사되고, 위장 당하고, 궁극적으로는 밀쳐내진다. 겉보기에는 대립적인 해석이 등가라는 사실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혁명적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비판 속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그런 권리는 '인권'으로 발전했다. 우리들이 인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2세기 이상에 걸쳐, 버크, 마르크스, 아렌트 처럼 다양한 저자들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는 무언가 그릇된 것, 즉 이중성이 있음을 가리켜 왔기 때문이다. 독립한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며, 거기에는 무언가 착오가 숨어 들었을 것이다. 이런 논의가 이들 저자들에 의해 행해져 왔던 것이며, 최근에도 <<호모 사케르>>(주1) 속에서 죠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기술한 것처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실제로는 재산 소유자인 '인간'의 권리이다. 버크와 아렌트에 의하면 그런 권리는 우리들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그런 권리는, 시민의 권리이거나 인간의 권리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비정치적인 개인의 권리이다. 이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권리는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는 자의 권리인 것이 되며, 이것은 무와 같다. 또는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즉 시민이 기존의 입헌국가에 귀속하기 때문에 소유하는 권리이다. 그런 권리는 권리를 갖는 자의 권리이며,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이런 언설이 우리들에게 두개의 주체를 제시한다면, 그 하나는 위장용 껍데기일 것이다-이 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정치 주체는 하나이며 또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 중 어느 것이 '진짜' 주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신기루이던가, 정치 주체가 헌법의 텍스트가 정의하는 것과 같은 것이던가, 그 어느 것인가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정치 주체는 상이한 아이덴티티 사이, 특별히 인간과 시민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은, 인간의 권력도 시민의 권력도 고정하지 않고, 인간과 시민 사이의 결합과 분리의 형식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시민은 정치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되는 것이며, 이 이름의 법적인 기재가 정치적인 과정의 소산인 것이다. 인간과 시민은 또, 분쟁적인 이름, 그 외연과 내포가 경합적이며, 시험 또는 검증의 공간을 여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시민이라는 정치적인 이름은 민주주의의 투쟁에 있어서 사용되어 왔던 것이며, 사용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시민성citizenhip이란 인간으로서-즉, 소유주와 사회적 지배층의 권력에 종속하는 사적인 개인으로서-열등하거나 우수하거나 한 사람들 사이의 평등의 지배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인간'이란 누구라도 갖는 평등한 수용력의 긍정을 의미하고, 이것은 시민성의 제한, 즉 인민의 많은 범주를 시민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또는 다양한 문제를 시민의 범위 밖에 두는 제한과 대립한다. 인간과 시민은 함께 배제원리에 대한 포함원리의 역할, 개별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인 것의 역할을 연기한다. 민주주의가 이해의 개별성에 대한 법의 보편적인 권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폴리스의 논리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개인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것은 항상 상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것은 새롭게 분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시험 삼아, 프랑스 혁명기의 페미니즘의 저항운동의 형식에 주석을 다는 것을 통해 이를 지적했다(주2). 여성의 활동은 가정생활의 개별성에 귀속하지만 시민성은 보편성의 영역이다, 라는 이른바 공화제 원리에 따라, 여성들은 시민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개별적인 것의 영역에 있었던 결과, 여성은 보편적인 것에는 포함될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 자신의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 주체일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이 '자-명'한 언명에 대해, 올랭 드 구즈는 여성들은 단두대에 올라갈 자격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집회'의 연단에 올라갈 자격도 똑같이 부여 받은 것이다, 라는 잘 알려진 이론異論을 제기했다. 그녀의 논증은 이른바 벌거벗은(裸形) 생의 개별성에 수반되는 보편성을 제기하는 것에 의해, 영역의 분할을 애매하게 한 것이다. 여성들은 혁명의 적으로써 죽음을 선고당해 왔으니까, 여성의 벌거벗은 생은 정치적이었다. 단두대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했다. 죽음의 선고의 보편성은 정치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의 '자-명한' 구별을 던져 버렸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시민으로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에 의한 권리의 긍정은, 버크 또는 아렌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스스로가 갖는 권리를 갖지 않으며, 스스로가 갖지 않았던 권리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한편에서, 여성들은 모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에 귀속하는-권리(인권) 선언에 따르면- 권리를 빼앗겼었던 것이며, 그녀들에게 부정당했던 권리를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스스로의 항의 운동에 의해 그 정치 능력을 증명했다. 여성들은 스스로 그런 권리를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두 개의 아이덴티티 사이의 간극에서 주체화 형식을 창조하는 것,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이중의 관계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보편성의 사례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과정이 동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법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일 수만은 없는 것은, 법의 보편성은 통치행동의 논리에 의해 부단히 개인화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공적생활의 끊임없는 개인화에 저항하는 주체화의 형식과 검증의 사례에 의해 대리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화는 두 가지 형식을 갖는다. 그 명료한 형식은 성적, 사회적 또는 민족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인구의 어느 부분에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다. 그 암묵적 형식은, 일련의 일정한 제도, 문제, 행위자, 절차에 시민성의 영역을 제한한다. 전자가 서양에서는 시대 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반대로, 후자는 현대의 중요한 문제이다. 근대화라는 부드러운 이름 또는 신-보수주의 혁명이라는 솔직한 이름이, 30년 이상에 걸쳐 노동이나 건강이나 연금과 같은 '사적 생활'의 문제를 평등한 시민성과 관련한 공공의 관심사로 바꾸는 것을 통해 공공역역을 넓혀 온 민주주의의 과정을 역전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사회' 국가 또는 '복지' 국가 개혁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린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공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나 효용과 개인이 사적으로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균충均衝보다도 훨씬 큰 문제이다. 노동과 건강의 조정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성common'에 관한 이해이다. 시민성의 정치적 영역과 사적인 약속이 지배하는 사회적 영역을 나누는 선은, 누가 공적인 일에 참가할 수 있으며 누가 할 수 없는가를 결정한다.
 1995년 겨울 프랑스에서 공공운송기관의 노동자들이 행한 상당히 긴 파업 동안, 사적이고 재정적인 이해와, 공통선共通善의 정치적인 추구와 장래 세대를 배려하는 능력을 대비하는, 많은 아렌트적이고 슈트라우스적인 논의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업이 진행되는 사이에 점점 분명해진 것은, 파업의 주요한 목적은 특정한 인간집단과 제도가 공동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배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규범적인 구별은 실제로는 공통의 문제와 장래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자와, 사적이고 직접적인 관심사를 넘을 수 없다고 간주된 자 사이의 구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과정 전체는 이 경계선의 이동을 둘러싼 것이다.





주1 :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주2 : Cf. Jacques Rancie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103/2 South Atlantic Quarterly, spring/summer 2004

타자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결론을 이야기하고 싶다. 거기서의 물음은, 민주주의를 그 자신에 대립시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이해할까란 것이었다. 이름의 불확심함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계속해서 반복되는 언명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자기-차이에 대한 더 근본적인 해석으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자신만만한 자기-만족의 토대에 다시 균열을 여는 것을 목표로, 자유 민주주의의 역사적 성취에 대한 후쿠야마의 테제에 주석을 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의 이름으로 새로운 복음을 설파하려 하고 있을 때-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인간 역사의 이상으로서의 그 자신을 드디어 실현했다고 주장한다-,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 불평등, 배제, 기아, 따라서 경제적 압박이 세계사와 인류사 속에서 이 정도로 많은 인간 존재에 피해를 끼친 적은 없다고(주1).' 다시 균열을 열기 위해서, 데리다는 그 자신에 도달했던 또는 그 자기에 도달했던 민주주의에, 도래할 민주주의를 대립시킨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장래 도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상이한 시간 내부에서 구상된 민주주의이다. '도래할 민주주의'의 시간은, 결코 완수될 수 없지만-그리고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속의 시간인 것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도래할 것에의 무한한 열림-그리고 '타자' 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그 자신에 도달'하는 것, 그 자신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한 민주주의이다.
 데리다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시켜, 두 개의 시간성을 같은 시간 속에 놓고, 두 개의 공간을 같은 공간 속에 놓는다-나는 이 원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개의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것 속에 문제가 있다. 데리다는 한 편에는 통치형식으로서의 자유 민주주의를, 다른 편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또 온갖 기대를 벗어나는 사건에의 무한한 기대를 놓는다. 내가 보기에 제도와 초월론적 지평 사이의 이 대립 속에서 소멸하는 것은,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이 실천은 '타자' 또는 헤테론의 정치적 발명에 다다른다. '신참자'-누구의 것이든 평등한 권력을 제정하고, 소여所與의 공동세계 속에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구축하는 새로운 주체-를 계속해서 창조하는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이다. 헤테롤로지heterology(타자성, 이타적 논리)의 정치적인 권력을 무시하는 것은, 한 편에 '자유 민주주의'-이것은 실제로는, 자기의 법을 구현하는 과두제를 의미한다-, 다른 편에 '도래할 민주주의'-사건과 타자성에의 무조건적 열림의 시간과 공간이라 보여진다-라는 단순한 대립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의 방기와 타자성의 실체화 형식과 같다.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자기의 실체화의 거부가, 대칭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실체화-이것은 현대의 윤리적 풍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상징이다-에 이르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율과 대비되는, 사건과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의 참조는 현재의 윤리적 풍조에 있어서 빈번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참조는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굉장히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암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의 인권에 관한 강연(주2)에서 장=프랑소와 리오타르가 제시한 '타자'의 권리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리오타르에게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이란 인간존재가 그 인질 또는 노예가 되는 '타자'-프로이트적인 사물 또는 유대의 율법으로서의-의 권력에의 복종을 의미한다. 계몽과 해방의 꿈은, 타율의 법을 부정하려 하는 유해한 의지, 전체주의와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의지가 된다. 따라서, '타자'의 권리는, 궁극적으로는, 악의 축에 대한 군사작전의 정당화에 이른다. 윤리, 타자성,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은 일종의 '새로운 복음'이 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정통화한다.
 확실히 데리다는 레비나스적인 '타자'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으로부터, 윤리적 풍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리오타르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형태로 데리다는 윤리적인 명령을 해방의 지평과 결합시킨다. 그는 명백히 메시아적인 약속을 '법'에의 복종에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건, 타자 또는 무한자에 관한 어떠한 선-취적인 동정同定도 피하려 하는 시도 속에서 그는, 탈구축, 말소선抹消線, 아포파시스apophasis의 끝없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성에 관한 이 윤리적 과대언명은 두 가지 문제의 어느 해석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탈구축은 궁극적으로 신의 병사에 의한 군사작전을 지탱하는 근저적인 타율의 법을 주장하던가, '타자'의 모든 선-취적 동정同定을 말소하는 무한의 임무를 강조하던가, 그 어느 것인가이다.
 데리다에 의한 개념화는 민주주의에 충분한 것을 부여하지 않음과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는 국가에 의한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은, 민주주의는 '타자'에의 무한한 열림 이하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에의 한 가지 무한한 열림 같은 것은 없으며, 타자의 분할(=열할)parts을 기재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실천을 어떠한 분할도 갖지 않는 자-이것은 '배제된 자'가 아니라, 누군가 또는 누구라도를 의미한다-의 분할을 기재記載하는 것으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기재는 '신참자'인 주체에 의해, 즉, 새로운 객체가 나타나 공통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고,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나고 받아 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주체에 의해 행해진다. 이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타자성을 다루는 많은 방식의 하나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주체와 객체의 발명은 부서진 시간이자 해방의 단속적斷續的인 계수繼受인 특수한 시간을 창조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메시아적인 시간에 호소하는 대신, 이 부서진 시간 속에서 계속 사고하고 행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우리의 입장의 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데리다는 '파괴'의 본성 그 자체가 내기에 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이 싹 트는 시기에, 또 그런 시대를 위해 말하고 있다. 즉, 국민국가의 내부에서 오래도록 연기되어 온 데모스의 형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국민국가의 '소멸'은 논쟁의 대상일 수 있지만, 오늘 민주주의가 코스모폴리탄적 질서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의 대답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식은 분명하지 않다. 주요한 물음은, 그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이다. 그것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존중'은, '사건' 또는 메시아에의 무한한 기대라는 형식 대신에 타자성을 기재하는 다수의 형식, 변경 또는 부동의不同意의 형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외형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주(1)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New York: Routledge, 1994), p. 85
 

(주2) Jean-Francois Lyotard, 'The Other's Rights', in Stephen Shute and Susan Hurley (eds.), On Human Rights (New York: Basic Book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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