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이분법으로 동료 학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진보평론>가을호 알튀세르·들뢰즈 국내 수용 비판 논문을 읽고
 
 2008년 10월 13일 (월) 15:06:19 진태원 고려대·철학  editor@kyosu.net 
 
 
<진보평론> 2008년 가을호에 발표된 홍준기 서울시립대 교수(철학)의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 윤리적 독해의 시도:라깡/들뢰즈, 헤겔/스피노자 논쟁 구도의 맥락에서」는 국내의 알튀세르· 들뢰즈 수용에 이의를 제기한 논쟁적인 글이다. 홍 교수의 논문에 대해 진태원 고려대 교수(철학)가 반박문과 함께 홍 교수의 논문을 간략히 요약했다.

    
  진태원 고려대·철학  
 

홍준기 교수가 이 글에서 보여주려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자기비판의 요소들』(1974) 이후에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헤겔주의자가 됐으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과 『일맥상통』(<진보평론> 37호, 288쪽―앞으로 이 글에서 인용할 경우 쪽수만 기입하겠다)하게 주체 개념을 재도입한다. 둘째는 알튀세르에 비해 들뢰즈는 “‘하나의 존재의 모습’, 즉 빈 공간 없는 ‘충만한’ 세계만을 허용하는 세계관을 기준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291쪽)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홍 교수의 알튀세르 논의에 관해 몇 가지만 검토해보겠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알튀세르가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278쪽)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홍 교수가 의거하는 텍스트 상의 논거는 두 가지뿐이며, 설득력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준 것, 곧 모순이 항상 결여돼 있다”(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PUF, 1998, p. 188)고 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나는 『신학정치론』에서 ‘세 번째 유형의 인식’, 즉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대상을 파악하게 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인식에 대한 가장 명백한, 그러나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석의 예를 발견했다(나도 인정해야 했듯이 그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이었다).”(홍 교수의 글 279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 논거의 경우 홍 교수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포기하고 헤겔의 입장을 대신 택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1) 알튀세르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스피노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기원도 종말도 없는 이 사상보다 더 유물론적인 것은 없다. 나는 훗날 바로 이 사상에서, 역사와 진리를 목적도 없고 (……) 주체도 없는 (……) 과정이라고 한 나의 명제를 끌어내게 됐다. 왜냐하면 목적을 근원적 원인으로(근원과 목적이 거울에 의해 반사되는 것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유물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47쪽)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가 엄밀한 의미의 유물론적 사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2) 어떤 유물론일까? 알튀세르는 홍 교수가 준거하는 『자기비판의 요소들』 다음 해에 발표된 「철학에서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사실 맑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헤겔]는 (……) “변증법을 신비화했다.” 그런데 사실 헤겔의 신비화는 그 자체 에피쿠로스 이후 또는 아마도 그 이전부터 항상 나타났던 유물론(존재가 됐든 주체 또는 의미가 됐든 간에 일체의 기원의 철학과 거리를 둠으로써만 정립될 수 있는) 과 변증법 간의 항상적인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아미엥에서의 주장』, 147쪽―번역은 수정) 알튀세르에게 유물론은 기원(과 목적)의 철학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만 정립되며, 이것이 바로 그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른바 유고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유고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이른바 ‘우발적 유물론’ 또는 ‘마주침의 유물론’에 관한 사고다. 그리고 알튀세르에게 이러한 유물론은 “주체(……)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없는 목적이 없이 자기 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 없는) 과정의 유물론”(『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1996, 40쪽)이다. 심지어 그는 한 대목에서는 마르크스의 최종 심급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변증법과 우발성을 대립시키고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형태들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가 여부를 검토하면서, “경우에 따라 다르다 a d e、-pend”고 썼어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우발적인 말이지 변증법적인 말이 아닙니다.”(같은 책, 45쪽―번역은 수정) 따라서 「유물론의 유일한 전통」(1993)이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두 사람에게 절반씩 할애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홍 교수는 어떤 근거로 알튀세르가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논거의 경우에 대해서는 여유가 없으므로 한 마디만 지적해두자. 제 3종의 인식의 문제에서 알튀세르가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범주를 가지고 사고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헤겔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줄곧 강조해왔던 것처럼 인식의 문제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은 데카르트와 칸트의 초월론적 문제설정에 맞서 공통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는 사례일 뿐이다. 


논증의 빈곤함도 문제이긴 하지만 이 글의 더 큰 문제점은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와 자의적인 재단이 다수 엿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홍 교수는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251쪽) 자신과 다른 입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했던 오류를 범했던 것”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291쪽)을 위해서는 선/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좀 더 공정하고 관대한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홍 교수는 관대하고 공정한 학자가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바로 다음 대목에서 홍 교수는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알튀세르 이론을 ‘정치편의주의’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와 같은 기품 있는 철학자를 ‘정치꾼’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253쪽)다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요컨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학문보다는 정치편의주의에 몰두하는 정치꾼과 다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의 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관대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을까. 홍 교수는 그 당사자로 필자를 지목하면서 각주에서 필자의 논문 368쪽을 참조하라고 해놓았다. 문제의 페이지를 참조해보면 독자들은 이러한 전가가 얼마나 엉뚱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홍 교수가 제시한 「라캉과 알튀세르」(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비평, 2002)라는 글에서 필자의 논점 중 하나는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관계를 일방적인 적용이나 차용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되며 “알튀세르의 이니셔티브”를 존중해야 하고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론작업의 맥락 내에서 평가돼야”(앞의 책, 358쪽)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surd’etermination)’ 개념은 프로이트의 ‘다중결정(Uberdeterminierung)’을 “직접 적용한 것이 아니라, 이 개념[다중결정]에 새로운 개념 규정들을 보태서 이 개념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같은 책, 370쪽)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또한 “알튀세르는 상상적 왜곡의 측면에서 라캉의 문제설정, 라캉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활용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역시 스피노자-마르크스적인 문제설정”(같은 책, 385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이는 알튀세르가 라캉과 무관하다거나 정신분석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마슈레와 들뢰즈에 대해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헤겔 철학의 대안으로서 특히 초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알튀세르에 의해 영향 받은 알튀세르의 제자들(특히 마슈레) 그리고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257쪽)고 일갈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같은 곳) 필자로서는 이런 식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무조건 좋은” 스피노자와 “무조건 나쁜” 헤겔을 구별하려는 책으로 읽을 수는 없다. 제목에서 쓰이는 “또는”이라는 단어(불어로는 ou 영어로 하면 or)는 마슈레 자신이 설명하듯이 일차적으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동일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와 헤겔은 특히 인식에 대한 법적ㆍ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비판하는 데서 공통적이며, 유한과 무한 사이의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 및 상이한 입장은 이러한 공통성 위에서 비로소 식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단순한 양자택일을 좋아하는 홍 교수의 눈에는 이것이 “무조건 좋은” 스피노자와 “무조건 나쁜” 헤겔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니 도대체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혀 동료 학자들을 정치꾼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진태원 고려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등이 있다. 
 


 

 


알튀세르 맑시즘에 관한 새로운 정치․윤리적 독해의 시도:

라깡/들뢰즈, 헤겔/스피노자 논쟁 구도의 맥락에서


홍준기 (한국정신분석상담연구소)




I. 문제 상황: 정신분석과 들뢰즈, 그리고 알튀세르


   필자는 들뢰즈의 글 혹은 들뢰즈에 관한 특히 국내 저자들의 글을 읽을 때 종종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엄청난 매력과 혁명성, 다수성에 대한 열정적 옹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그의 이론은 선/악이라는 이중적 구도를 전술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배자 담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선/악 구도에 입각한 들뢰즈 이론은 ‘혁명적 외관’을 띠고 있지만 자신과 다른 존재론적 입장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의 동지들을 과도하게 폄하 혹은 비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결국은 사실상 그러한 동지들을 ‘주적’으로 만들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과거에 사회주의가 융성하던 시절에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자신의 존재론적, 철학적 입장과 다른 이론 혹은 실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했던 오류를 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반론을 즉각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설득력 있는 들뢰즈 비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알랭 바디우의 『질 들뢰즈―존재의 함성』 정도의 깊이와 통찰력을 가진 논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 철학과 같은 방대한 철학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렇듯 폭넓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할 여유가 없으며, 이러한 작업은 이 글의 직접적 목표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필자는 이 글의 주제인 정신분석과 맑시즘, 알튀세르의 정신분석 이해, 그리고 스피노자와 헤겔 이해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하며, 이러한 논의를 진행해 나가면서 위에 언급된 문제들에 대해 부수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철저하게 비판하고자 했던 정신분석은 사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임상 실천이라는 좁은 틀을 넘어, 다양한 진보적인 이론과 결합해 사회변혁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로 자신의 학문적 의의를 입증해왔다. 정신분석을 자신의 중요한 학문적 기초로 수용해 맑시즘을 혁신하는 데에 일생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알튀세르가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외의 맑스주의자 혹은 스피노자주의자 중 상당수는 여전히 알튀세르 철학은 라깡 이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들이 결국 라깡 이론을 배제한 채 맑스주의 혹은 철학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굳이 이러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쨌듯 알튀세르와 라깡의 결합을 부인하고자 하는 논자들은 알튀세르가 라깡을 원용하고자 했던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는 내적인 본질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오직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결론을 내린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국내에서 80년대 때부터 제시되던 전형적인 입장이다.1) 하지만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알튀세르 이론을 ‘정치편의주의’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와 같은 기품있는 철학자를 ‘정치꾼’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알튀세르 철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2) 필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알튀세르에 대한 ‘비정신분석적’ 해석은 물론 방금 언급했듯이 정신분석을 보수주의적인 이론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들뢰즈의 욕망이론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왜 들뢰즈는 민주주의의 동지일 수 있는 인접 이론들을 굳이 ‘주적’ 중의 하나로 간주해야 하는가? 들뢰즈가 특히『반오이디푸스』, 『천개의 고원』등 에서 정신분석 비판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3)  들뢰즈는 정신분석을 자본주의적 영토화의 ‘결정적인’ 매개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과연 타당한가? 왜 들뢰즈는 마치 정신분석이 인간의 욕망과 자유, 해방을 가로막는 ‘진정한 주적’이라는 듯이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것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는가? 잘 알려져 있듯이 들뢰즈에 따르면 라깡 이론은 ‘결여’와 ‘환상’을 먹고 사는 패배적이고 보수적인 이론이며, 오이디푸스라는 가족 삼각형에 모든 것을 가두어 놓는 폐쇄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분석의 라깡적 버전에서 정신분석은 곧 사회, 정치이론이며, 라깡에 따르면 오이디푸스의 너머, 즉 분석의 끝, 혹은 ‘오이디푸스 너머’라는 개념이 확고하고 분명한 형태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4) 왜 들뢰즈 및 들뢰즈 수용자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는가? 왜 들뢰즈 연구자들은 라깡의 욕망과 향유 이론, 환상 이론, 사회이론을 ‘선의’를 갖고 연구하지 않은 채 정신분석의 ‘해악성’에 대해 그토록 강하게 비판하는가? 예컨대 우리는 들뢰즈가 집중적으로 비판한 바 있는 라깡의 개념인 ‘결여’라는 개념이 들뢰즈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결여’ 속에서 만족하며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여란 라깡에게 다양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라깡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컨대 억압이란 타자가 주체에게 ‘자유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너무 많은 향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면 망상증적 정신병자는 타자와의 이자관계 속에 머물러 있는 주체이며, 이러한 병리적 이자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체와 타자 사이에 결여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튀세르의 유고인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5)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필자의 이 글 역시 알튀세르의 이 유고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관계, 그리고 들뢰즈, 스피노자, 헤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에 있다. 이 유고에서의 알튀세르의 은유적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라깡이 말하는 결여란 ‘자유의 빈공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주체는 오히려 이 결여―자유의 빈공간―속에서 ‘기쁜’ 마음(스피노자)으로 삶과 자유를 향유(라깡)할 수 있다. 이렇듯 라깡에게 결여란 흔히들 비판하듯이 단순히 만족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에, 그리고 주체 속에 주체를 억압하는 타자로부터 거리를 제공하는, 주체의 자유의 공간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빈곳’이라는 은유를 이데올로기와의 ‘단절’, 인식론적 ‘단절’과 같은 개념과 결부시켜 활용한 바 있다. 반면 ‘충만함’이란 은유는 경우에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라는 연속적 공간(즉 ‘상상적’ 충만함)을 의미한다. 물론 “충만한 말(parole pleine)”이라는 라깡의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충만함’이라는 단어가 알튀세르에게 무조건 ‘나쁜’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 역시 라깡의 ‘충만한 말’이라는 용어를 이데올로기적인 “공허한 말(parole vide)”와 대비시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 사용한 바 있다.6) 

   반면 들뢰즈는 『반오이디푸스』에서 결여와 충만함을 대립시키며 후자를 지지하는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신분석을 비판한다. 들뢰즈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의 존재론, 예컨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는 ‘빈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을 절대화해, 이제 ‘빈곳’을 말하는 모든 이론은 결여 속에서 만족하고자 하는 패배적 이론이라는 논지로 ‘확대 해석’하는 듯한 논의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은 들뢰즈는 어떤 ‘특정한 존재론’을 절대화시켜 다른 존재론적 입장을 무조건 잘못된 이론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필자는 존재론 혹은 자연철학 혹은 형이상학적 담론을 ‘직접적으로’ 정치, 사회철학에 적용하는 이론은 ‘특정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성급한 정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라깡은 ‘특정한’ 세계관을 특권화하는 이론이야말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알튀세르에 대해 언급하자. 알튀세르는 유고에서 철학에 ‘공백’, 즉 빈공간‘을 도입한 사람들을 “철학에서의 진정한 유물론 전통”7)을 도입한 사람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유물론을 도입한 사상가들을 다수 인용한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마키아벨리, 홉스, 파스칼, 클라우제브츠, 칸트, 스피노자, 헤겔, 맑스, 레닌, 그람시, 데리다, 들뢰즈,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프로이트 등. 알튀세르는 유고의 여기저기에서 이들 모두를 유물론의 사상가로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언급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이들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상가로 간주하지 않는가? 어떻게 들뢰즈가 빈공간을 말하는 철학자일 수 있으며, 헤겔과 들뢰즈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논의 방식이 그의 철학적 무능력 혹은 혼합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관념론자이든 유물론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자유”라는 “빈공간, 장애가 없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의 코나투스의 전개”를, 그리고 “극단에서, 한계적 상황에서” 운[우연]과 공백을, “운의 공백 자체”를 “사고한 인물”8)은 알튀세르에게 모두 유물론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정치적 윤리학’이, ‘하나의 존재의 모습’, 즉 빈공간 없는 ‘충만한‘ 세계만을 허용하는 세계관을 기준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들뢰즈 철학과 달리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정신분석(혹은 헤겔 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의 입장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과 관련해 일종의 분수령을 이룬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헤겔 철학(혹은 정신분석) 사이에서 동요한 바 있다. 이러한 동요는 알튀세르가 맑스주의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동요로서, 과연 맑스 철학이 스피노자를 경유해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라깡(혹은 헤겔)을 통해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라는 질문에서 정점에 달한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 읽기』등에서는 헤겔 철학이 단 하나의 모순만을 허용하는 목적론적 철학이므로 헤겔 철학의 관점에서는 ‘복잡한 전체’를 사고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은『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변하기 시작하며 이와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또한 『레닌과 철학』에서 알튀세르는 헤겔 논리학 서두에서 존재가 무로 이행하는 것에서 ‘기원이 스스로를 무화하는’ 비목적론적 철학을 읽어내며 이로써 헤겔 철학을 ’비목적론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관점에서는 “모순”을 사유할 수 없으므로 “모순”을 사유할 수 있는 헤겔 철학은 맑스주의의 혁신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철학임을 주장한다. 더 나아가 유고에서 알튀세르는 ’유물론적 전통‘ 속에 헤겔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창조적 재구성을 위해서 과거에 자신이 원용했던 정신분석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들뢰즈의) 스피노자로부터 거리를 둔다.9)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다시 한번 총결산하는 ‘유고’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란 소비에트 더하기 전력화 더하기 정신분석이다’라고 한 우리 친구 자크 마르탱의 날카로운 말과 곧바로 만난다.”10)

   맑스주의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모순 범주가 필요하다는 알튀세르의 언급은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헤겔 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재해석은 내용적으로 그다지 풍부하지 않으므로 과연 헤겔이 말하는 모순이 무엇이며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갖는지 별개의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작업은 현실에 대한 철학적 개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헤겔 철학의 대안으로서 특히 초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알튀세르에 의해 영향받은 알튀세르의 제자들(특히 마슈레) 그리고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특히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내재적 연구 없이 헤겔은 목적론을 주창한 형이상학자다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아마도 프랑스에 헤겔 연구자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도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들이 말하듯이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 하지만 알튀세르가 문제를 제기했듯이 스피노자의 철학은 ‘모순’을 사유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스피노자 철학에 따르면 ‘모순’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반면 헤겔은 ‘모순’ 혹은 ‘부정성’을 본질적 범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튀세르는 ‘모순’ 범주에 우선성을 부여함으로써 다시 헤겔을 복원하려고 시도한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게 헤겔 철학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스피노자 철학과 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알튀세르에게 헤겔과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본 논문은 알튀세르 맑시즘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철학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더나아가 모순 개념이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왜 중요한 쟁점이 되는지를 밝히고자 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이 알튀세르에서 갖는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단순한 정치철학으로서 알튀세르 맑시즘이 아니라 정치윤리학으로서의 알튀세르 철학의 의의를 재조명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다.


II.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와 헤겔


1.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의 의미


   특히 스피노자와 헤겔과 관련해 알튀세르의 맑시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974년에 출간된『자기비판의 요소들』의 논의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의 한 장인 「스피노자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과거의 오류를 스스로 지적하는 가운데 자신을 스피노자주의자였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11) 이러한 선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논자들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선언을 알튀세르의 정신분석학과 헤겔 철학으로의 단절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내외의 다수의 알튀세르주의자들은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알튀세르의 이 언급을 과도하게 배타적으로 확대해석해, 알튀세르 이론은 스피노자주의적으로 설명되어야지 결코 정신분석, 그리고 헤겔 철학의 관점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12) 뿐만 아니라 들뢰즈를 포함한 스피노자를 연구자들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우위를 주장하는 가운데 헤겔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을 보수적이고 무의미한 이론으로 ‘손쉽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튀세르를 오직 스피노자의 관점에 의존해 해석하기 전에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는 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은 『자본론 읽기』, 『맑스를 위하여』 등 초기의 저작들에서 자신이 범한 과도한 이론주의, 합리주의를 비판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진리/오류라는 대립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사실 합리주의적이다. 하지만 과학 자체(der Wissenschaft)와 이데올로기 자체(der Ideologie), 그리고 그것들의 차이에 관한 보편적 이론 속에서 받아들여진 진리/거부된 오류라는 대립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사변(Spekulation)이다.”13)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과거에 범했다고 고백하는 합리주의, 그리고 사변주의의 내용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식론적 단절(바슐라르)이라는 개념을 통해 과학적 맑스주의를 재구성하는 가운데 알튀세르가 범한 오류(더 정확히 말하면 편향)이다. 쉽게 말하면 맑스 철학의 ‘과학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과학과 이데올로기, 진리와 오류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맑스 철학을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합리주의적 편향을 범하던 시기에 알튀세르는 마치 맑스 철학은 ‘학문의 여왕’이며, 따라서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와 이데올로기로서의 부르주아 이론을 구분해주는 어떤 확고하고 영원한 준거점을 갖고 있다는 듯이 맑스주의 철학을 정의하는 편향을 범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이는, 그가 거부하고자 했던 부르조아적 관념론 혹은 경험론의 관점에서 맑스철학을 재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관점은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수정된다. 과거에 알튀세르는 철학, 즉 유물론적 변증법을 “이론적 실천들의 이론”14)으로 정의했으나 이제 알튀세르는 자신의 새로운 관점에 따라 맑스주의 철학을 “실천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15) 혹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16), 이론에서의 정치”으로 정의한다. 물론 여전히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이 스피노자에 철학에서 자신이 빌려온 내용 혹은 영감 받은 부분이 무엇인지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목적론의 거부17), 둘째, 주체 이데올로기 비판(스피노자의 반데카르트주의)18), 셋째, 진리의 기준 제시라는 거짓 문제의식의 거부19), 넷째, 유명론자(Nominalist)로서의 스피노자20). 다섯째, 헤겔에게 알려지지 않은 변증법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함.21)

   이 시기에 알튀세르가 헤겔에 대해 비판한 내용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자. 사실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은 그가 이전에 헤겔에 대해 비판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즉 당시의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은 사실 헤겔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프랑스나 혹은 현재 혹은 과거 헤겔 철학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의견(혹은 편견)과 일치하는 견해를 보여줄 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헤겔은 예컨대 목적론의 철학자이며, 헤겔 변증법은 “자기 자신의 질료를 생산하는 변증법”으로서 그것이 제시하는 논제는 “정확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상응하는 논제이다. 헤겔 변증법은 “자본은 (자본가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22)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헤겔 철학은 타자를 일자로 흡수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정말 헤겔 철학을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알튀세르에 따르면 반면 맑스주의의 변증법은 모든 것을 하나의 축으로 환원시키는 헤겔 변증법과 달리 “실재적 구분”을 가진 여러 영역들의 존재를 허용하며, 이를 사고하기 위해 토픽(Topik) 모델을 제시하는 반면 헤겔에게는 이러한 토픽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위의 토픽(심급)은 그것의 “진리”인 상위의 토픽(심급)으로 “지양”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혁신을 위해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내용들이 다름 아닌 헤겔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입장에 따라 헤겔 철학을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헤겔을 비판하는 알튀세르가 경제결정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독단적 관점에 빠진 것은 아닌지? 실제로 알튀세르는 경제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틀을 제공하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적 내용으로 간주했던 중층결정과 관련해 “최종 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23)고 선언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최종 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한다는 경제결정론적 논제24)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모순적 언급은 알튀세르의 이론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종 심급의 고독한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경제 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또한 최종 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각 심급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을 어떻게 근거지울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며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과성 개념은 라깡에 따르면 헤겔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제 이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자본론 읽기』에서의 알튀세르의 논의에 대해 언급해보자.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인과성에 대한 세 가지 모델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 모델은 “이행적 인과성(transitive causality)”이고 두 번째는 표현적 인과성(exprsseve causality), 세 번 째 모델은 “구조적 인과성(structural causality)”25)이다. 이행적 인과성 모델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이행적 인과성은 직선적 인과성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이는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영향을 미치듯이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직선적 혹은 이행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과성 개념을 의미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기계적 체계는 이렇듯 인과성을 이행적 효과에 국한시키므로 전체가 그것(전체)의 요소에 미치는 효과를 사유할 수 없다.26) 반면 표현적 인과성은 전체의 요소들에 미치는 전체의 효과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표현적 인과성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유래했으며 헤겔에 의해 차용되었고 헤겔 사유를 지배하는 사유체계이다. 표현적 인과성 개념은, 전체는 내적 본질로 환원되며, 부분의 요소들은 이 내적 본질의 현상적 형태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본질의 내적 원리는 전체의 각 지점(계기) 속에 현존한다. 즉 표현적 인과성 원리에 따르면 경제, 정치, 법, 문학, 종교 등 각 요소는 전체의 본질의 내적 원리와 동일하다. 전체는 전체의 부분으로서 각 요소들이 전체를 표현한다는 ‘정신적’ 특성을 갖는다. 요컨대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요소들 혹은 부분들에 대한 전체의 효과(영향)이라는 범주를 사용했지만 이는 이 전체가 구조가 아니라는 조건 하에서였다.”27)

   그러므로 알튀세르는 표현적 인과성이 가정하는 통일성과는 다른 유형의 통일성을 가진 전체, 즉 구조지어진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제시한다.  표현적 인과성 개념은 ‘구조에 의한 요소들의 결정’을 사유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스피노자를 원용해 맑스의 인과성 개념을 설명할 것을 제안한다. 구조적 인과성이란 “그것[구조]의 효과 속에 구조가 존재함”, 달리 말하면 “효과는 구조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구조는 효과들 속에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며 “구조의 전체적 존재는 그것의 효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조적 인과성과 표현적 인과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구조적 인과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표현적 인과성(그리고 이행적 인과성) 개념은 원인과 그것의 효과들이 서로 외재 적이라는 것을 함축하며, “현상과 본질 사이의 고전적 대립”에 근거하고 있다.28)

   하지만 스피노자로부터 원용한 구조적 인과성 개념으로써 알튀세르는 ‘각 심급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알튀세르는 단지 “구조는 경제적 현상 외부의 본질이 아니다”라는 말로써 경제적 심급에 대해서 언급할 뿐, ‘상대적 자율성’과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이라는 문제를 스피노자와 연관시켜 명확히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관련해 보다 명확히 언급한 곳은 「담론이론에 관한 세 메모」29)이다.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라캉이 단 하나의 보편이론(기표의 보편이론)만을 받아들이고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라캉을 환원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30) 그리고  알튀세르는 라캉과 반대로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이 기표의 보편이론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적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주장은 결코 기표의 보편이론을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으로 포섭, 혹은 흡수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 말한다.31)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원용한다. “다양한 속성들은 단지 하나의 같은 실체의 속성들이다”32)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근거해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적 대상의 국지이론은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이 기표의 보편이론으로 특수하게 접합된다는 것을 보편이론으로 갖는다는 사실 속에서, 기표라는 속성과 역사라는 속성 사이의 변별적 접합의 존재의 사례 중 하나를 우리는 확증한다”33)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알튀세르에 따르면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인 기표이론이라는 보편이론34)은 사적유물론이라는 보편이론에 접합(흡수)되는 것이 보편이론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물론 (경제결정론적 함의를 갖는) 사적 유물론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보편이론의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주장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경제환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5) 

   요컨대 우리는 여기에서 알튀세르가 말하는 기표라는 속성과 역사라는 속성 사이의 변별적 접합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의 속성들의 결합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속성들은 서로 대등하지만,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주의적 해석에서는 역사라는 속성이 기표라는 속성에 대해 우위를 갖는다. 알튀세르는 기표의 보편이론에로 사적 유물론의 보편이론이 특수하게 접합된다는 사실을 보편이론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역사라는 속성을 기표라는 속성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스피노자 존재론을 잘못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알튀세르는 한 특정한 속성을 다른 속성의 우위에 둠으로써, 속성들간의 비환원적인 변별적 접합을 말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환원주의적 맑스주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다.

   다시 『자본론 읽기』의 논의로 되돌아가자. 여기에서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주의적 맑스 해석은 인식대상과 실재대상의 구분 및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위이라는 논제로 등장한다.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해, 관념과 대상의 일치로서의 진리라는 “데카르트적 관념론의 독단적 경험론” 혹은 “헤겔의 혼동”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다양한 인식론적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문맥에서 중요한 점만을 언급하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을 ‘실재 혹은 대상의 질서에 대한 관념의 질서의 우위’라는 논제로 재해석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맑스의 대상은 실재적 대상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구성된 총체’라는 점에는 물론 필자도 동의하지만 문제는 알튀세르는 이렇게 구성된 관념들을 궁극적으로 맑스주의를 오류로부터 구분해주는 ‘진리의 기준’으로 작동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학적 지식―즉 대상에 관한 개념인, 적합한 관념들의 체계―은 그 자체의 기준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비과학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즉 부적합한 관념들)의 기준이기도 하다.”36)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이론을 상상적인 것과 진리를 구분해주는 ‘기준’이 되는 이론으로 받아들인다.37) 이렇게 본다면, 알튀세르가 비록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진리의 기준 제시라는 거짓 문제의식의 거부”라고 말했지만, 사실 ‘본의 아니게’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 철학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앞으로 다시 간략히 논의하겠지만 스피노자의 2종과 3종의 인식은 각각 이성과 직관을 통해 ‘필연적으로 진리인 지식’을 산출한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드러났듯이 초기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는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철학(혹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론을 근거지워주는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자신의 이러한 합리주의적 혹은 사변주의적 편향을 스스로 비판했던 것이다.


2. 알튀세르의 새로운 헤겔과 스피노자


   이제 현대의 알튀세르 해석에서 논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새로운 모습의 헤겔’에 대해 살펴보자. 필자가 아는 한 유고에서 비로소 등장한 새로운 헤겔 해석은 알튀세르 맑시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해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천명했다. 이러한 천명이 갖는 변별적 의미를 너무 축소(혹은 확대)해석해 알튀세르가 스스로를 헤겔 철학 혹은 정신분석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피노자 철학에만 영향 받았다는 ‘고백’으로 이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우선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기존의 헤겔 비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을 다시 언급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스피노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역으로 그가 오랫동안 비판해왔던 헤겔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러한 방향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 다름 아닌 모순 범주이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맑스주의자는 물론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서는 스피노자를 통해 우회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험은 위험하고, (....)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맑스에게 전달해준 어떤 것, 즉 모순[개념]이 항상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38) 이러한 작은 차이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에게 헤겔이 사유하고자 했던 모순 범주는 ‘갈등의 학문’인 맑시즘의 재구성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는 모순 범주를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비판’ 이전에는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해 논의하지 못하고 과학(학문)/이데올로기라는 대립항으로 사유하는 이론주의의 오류(편향)을 범했다고 스스로 비판했던 것이다.39)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모순범주를 무시한 것이 ‘이데올로기 에서의 계급투쟁’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알튀세르는 말하는가? 모순이 아니라 ‘차이’ 혹은 ‘긍정’만을 말하는 철학, 혹은 모순범주를 배척하는 철학은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완전히 알고 있다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학문)은 과학이고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는 대립항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에 과학이 곧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모순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가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스스로를 진리를 보증하는 과학이라고 자처하는 맑스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이며, 진정한 맑스주의적 투쟁은 부르주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에서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자체의 (상상적) 이데올로기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 대한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 특히 들뢰즈 철학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여기에서 상세히 논의할 여유가 없으므로, 헤겔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현대 프랑스철학자의 논의 방식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문제만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들은 특히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내재적 연구 없이 헤겔은 목적론을 주창한 형이상학자다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아마도 프랑스에 헤겔 연구자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도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들이 말하듯이 과연 스피노자 철학은 ‘무조건 좋은’ 철학이고 헤겔 철학은 ‘무조건 나쁜’ 철학인가? 하지만 알튀세르가 문제를 제기했듯이 스피노자의 철학은 ‘모순’을 사유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 따르면 ‘모순’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반면 헤겔은 ‘모순’ 혹은 ‘부정성’을 본질적 범주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절대적) 실체의 본질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며, 헤겔 역시 절대자에 관한 변증법 철학이라는 점에서 모두 절대적 실체에 대한 철학적 설명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두 사상가의 입장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들뢰즈적) 스피노자의 철학은 ‘신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철학이며, 헤겔 철학은 비록 역시 절대적 실체에 관해 사고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동일하지만 헤겔은 절대적 실체를 ‘인간의 관점’에서 사유하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스피노자 혹은 들뢰즈에게 ‘모순’ 범주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신의 관점’, 즉 “영원의 관점”(스피노자)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이 보기에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양태나 개별적 존재 간의 관계는 연속적이거나 기껏해야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결코 모순일 수 없다. 신의 눈에 인간사의 대립이란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인간적 관점’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에게는 모순은 본질적 범주일 수밖에 없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모순이 아니라 ‘차이’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타자의 ‘다름’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입장은 집단 혹은 개체들간에 존재하는 진정한 (대립 혹은 억압의) 문제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혹은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다르다고만 말할 때 생기는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강자들에 의해 배척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 즉 사회적 강자와 대립 혹은 모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은폐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차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대립 범주, 그리고 더 나아가 모순 범주로 전개되는지를 서술한다. 단순히 차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헤겔에 따르면 모순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철학이라고 비판받는 헤겔 철학에서 맑스가 요청했듯이 ‘형이상학적 외관’을 벗기고 나면 진정으로 유물론적이며 인간적인 철학의 모습이 들어날 수 있으며, 외관상 유물론적으로 보이는 스피노자 철학이 사실은 가장 ‘신학적’ 혹은 ‘전체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40)


III. 알튀세르와 헤겔, 그리고 들뢰즈


   사실 헤겔에게 모순이란 유한자에게만 귀속되며, 절대자는 모순적이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절대적 실체에게 모순이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동어반복적인’, 당연한 말이다. 어떻게 신이 모순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철학은 입장을 같이 한다.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순 그 자체가 인간 혹은 신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부정적인’ 논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헤겔 철학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한 긍정의 상태, 즉 절대자의 상태에 도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헤겔 역시 소외된 상태에서 소외를 극복한 상태41)로 진전해야 하는 인간의 윤리적, 정신적 과제에 대해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완성에 도달한 실체가 곧 주체이다. 헤겔이 말하는 실체는 자신의 내부에 부정성(즉 부정성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부정성(모순, 대립)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인하고 ‘충만함’만을 강조하는 들뢰즈 철학의 실체와 달리 부정성과 더불어만 혹은 부정성을 ‘통과함으로써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실체이며, 이러한 존재론적 속성을 갖는 실체가 다름 아닌 주체라는 것이다.

   헤겔의 모순 개념과 관련해 이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좀더 언급해보자. 헤겔은  ‘모순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비판한 올레르트(Ohlert)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자[올레르트]에게 세계, 자연, 그리고 행위와 충동(Treiben) 속에, 그리고 인간 사유 속에 아직 모순이 제시되지 않을 때, 자신 스스로와 모순되는 존재자들이 제시되지 않을 때 그는 행복하게도 칭송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순은 스스로를 지양한다고 옳게 말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오류와 마찬가지로 모든 범죄, 아니 모든 유한한 존재와 사유는 모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모순―하지만 스스로를 지양하는 모순―이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2)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모든 유한한 존재는 모순을 갖고 있으며, 이 모순은 모순이기 때문에 해소되고, 스스로를 지양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겔이 모순에 대해 말할 때 비합리적으로, ‘이것은 연필이며 연필이 아니다’라는 비합리적인 모순적 언표를 무조건 옳은 명제라고 주장하고자 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한에서 헤겔 역시 모순률을 인정하는 철학자이다. 하지만 형식논리학적 관점만을 취하는 철학자와 달리 헤겔은 모든 유한한 존재 혹은 범주는 그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형식논리학을 넘어선다. 헤겔이 오성적 사유라고 비판하는 형식 논리적 사유에 따르면 어떤 주어진 사태 혹은 범주 혹은 존재는 결코 모순적일 수 없다. 하지만 헤겔은 오성적 사유가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범주 혹은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존재자는 범주 자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그 반대의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예컨대 A=A라는 언표는 형식논리적으로 본다면 긍정 명제이지만, 사실 동어반복적 언표에 지나지 않으므로 A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A=-A이라는 부정적 명제를 내포하고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순수)존재는 어떤 규정성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순수)무라고 말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옳은 말이다. 헤겔이 『대논리학』의 서두에서 “순수존재순수무는 동일한 것이다”43)라고 말할 수 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헤겔의 모순 개념은 어떤 특정한, 미리 주어진 범주를 영원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혹은 어떤 주어진 범주의 의미가 처음부터 완전히 고정된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오성적 사유, 혹은 이데올로기적 사유를 비판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무한한 절대자에서는 모순이 해소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해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유한자는 어떤 모순적인 규정과 대립하고 이러한 모순적 규정을 견딜 수 없으므로 이를 배제하고자 한다. 하지만 헤겔이 말하듯이 어떤 규정은 그 반대의 것과 무조건적으로 일치하므로 사실 그 모순적인 규정은 유한한 존재 자신의 규정이기도 하다. 예컨대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 모순되는 규정이지만, 사실 인간은 동시에 비인간적인 존재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규정은 일치한다(같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자신 속의 비인간을 배제하고자 한다. 헤겔이 말하는 모순이란 이렇듯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한 양규정이 서로를 배제한다는 것, 혹은 역으로 모순되는 규정은 서로를 배제하지만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무한한 절대자는 ‘정의상’ 모든 것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다. 이 무한한 절대자는 모순과 배타성, 갈등으로 얼룩진 유한성을 극복해 자기완성에 도달한 실체이어야 하므로 이 절대자는 서로 모순적인 규정들이 빠져 있는 모순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함으로써 ‘화해’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서로 모순적인 규정들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무한한 실체, 즉 절대 이념 혹은 신은 자신과 대립 혹은 모순 관계에 놓여 있는 타자성을 자신이 스스로 산출해낸 타자로 인식함으로써 타자와 대립(모순) 없는 화해에 도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타자조차 자신이 산출한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유한한 주체는 절대적 주체, 즉 개념(Begriff)이 된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의 『대논리학』은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으로 구분된다. 대논리학의 마지막 부분인 개념은 다름 아닌 모순과 대립, 유한성을 극복한 존재, 절대적 실체(즉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완성은 더 이상 실체 자체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것, 다시 말해서 개념이며, 주관, 주체인 것이다.”44) 완성된 주체(실체로서의 주체)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타자(다른 주체 혹은 실체)를 스스로 산출한 것으로 인식하는 절대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실체가 서로를 자신 스스로가 산출한 타자로 인식할 때 모순이 극복되어 개념의 단계에 도달한다. 헤겔은 말한다. “그리하여 개념 속에서는 자유의 왕국이 열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개념이 곧 자유의 왕국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체의 필연성을 이루는 즉자대자적 동일성이 동시에 지양된 것이면서 또 피정립성, 피정립태로서 있는가하면 다시금 이 피정립성마저도 어느덧 자기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바로 이 동일성과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럼으로써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던 두 실체 상호간의 애매하고 복잡한 성격은 사라지게 되는 바, 왜냐하면 각기 독자적으로 존립해 있던 두 실체의 근원성은 이제 다같이 피정립태로 이행함으로써 그 불투명했던 근원성이 자기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주는 명료함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근원적 사상(事象)은 오직 이것이 다름아닌 자기자신의 원인, 자기원인이라는 점에서만 근원적 사상일 수가 있으니, 또한 이것이야말로가 스스로가 개념으로 해방된 실체이기도 한 것이다.”45)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대립하는 실체 각각이 자신을 단순히 무조건적 일자(동일성)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 동일성이 지양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자신을 피정립성―타자에 의해 정립되어 있음―으로 파악할 때 개념으로의 이행이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각 실체가 자신의 피정립성―타자에 의해 정립되어 있음―을 자기자신의 정립으로 파악할 때, 즉 “피정립성마저도 자기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을 파악할 때 각 실체는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동일성”을 다시 획득하고 자기원인으로서의 개념, 즉 절대적 실체가 됨으로써 자신을 긍정한다. 달리 말하면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할 때 각 실체가 자신의 타자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자신이 정립한 것으로 상호 승인함으로써 자신의 타자와 더 이상 대립하지 않을 때, 즉 이렇게 모순을 극복하고 ‘화해’함으로써 각 실체는 자신의 타자와 더불어 절대적 실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본질론」의 말미에서 논의된 바 있는 상호작용이라는 범주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상호작용하는 두 실체 각각이 서로의 원인이며 결과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는 상호작용이라는 범주는 두 실체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며 결과라는 관계성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개념은 일자와 타자와의 모순을 해소하고 타자를 자신의 산출물이며 동시에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한 실체이다. 달리 말하면 개별적 실체는 독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궁극적으로 각 개별적 실체들은 타자(다른 실체)와 절대적 관계성 속에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통해 개념, 즉 절대적 실체(주체)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헤겔에서 절대적 실체, 신이란 초월적으로 피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의한 바 있는 새로운 관계성에 도달하고 이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개별적 실체(주체)이며, 이러한 개별적 실체(주체)가 곧 절대적 실체(개념)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개별자는 곧 보편자라는 헤겔의 논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헤겔 철학은 개별자를 보편자로 흡수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논의했듯이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어떻게 개별적 실체가 보편자로서의 위치를 취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한한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의미, 혹은 보편적인 신이 개별적 인간을 자신에게로 흡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과 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식에서 유래하는, 아니 이러한 인식을 발생시키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통해 개별자는 보편자(신)가 된다는 의미에서 헤겔 철학은 개별자를 중시하는 철학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들뢰즈의 헤겔 비판이 정당하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들뢰즈는 헤겔 변증법은 두 개의 규정을 ‘배타적’ 관계로 파악하는 이접적 종합(disjuctive synthese)만을 알고 있다고 비판하지만46), 들뢰즈의 이러한 비판은 헤겔의 논의를 전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비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헤겔은 서로 동일하면서도 배타적인 두 규정이 배타적, 모순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상태인 개념으로 이행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 사용을 넘어서서 “포함적인‘ 관계로서의 이접적 종합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먼저 주장했던 사람은 들뢰즈가 아니라 헤겔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오히려 모순 범주를 부정하는 들뢰즈 철학의 한계가 드러난다. 모순 범주는 각 규정들이 동일하면서도 서로 배타적일 것을 요구하는데, 들뢰즈는 모순 범주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에게는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투쟁, 모순적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들뢰즈는 모순이 아니라 차이 범주만을 인정하므로 서로 대립하는 현실적 갈등 상황을 무시한 채 ’막연한 공존‘을 이야기하는 현실순응적, 관념론적 견해와 일맥상통할 수 있다. 반면 헤겔은 모순들이 존재하는 상황과 이것들이 극복된 상황을 모두 이야기한다. 헤겔은 모순과 대립이 존재하는 상황, 그리고 서로 대립할 수도 있는 규정들을 공존, 화해시키는 절대자 개념 양자 모두를 제시함으로써 들뢰즈 철학의 은폐된 관념론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앞에서 말했듯이 유한자에서 무한한 실체(주체), 즉 절대이념으로의 이행은 따라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한한 절대적 주체(실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타자를 독립된 주체이며 동시에 자기의 산출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 철학이 타자를 일자로 흡수하는 동일성의 철학이 아니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승인이 발생함으로써 개념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개념으로의 이행은 어떤 실정적인 내용을 덧붙여 절대적 지식을 소유한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자신의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획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자기원인으로서의 개념은 ‘독립적인’ 타자의 타자성을 능동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주체는 자신의 진정한 타자를 스스로 산출하는 무한한 자기운동성 그 자체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무한한 운동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타자 속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동일성이야 말로 유한성의 실제적 부정, 즉 무한성이다.”47) 또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으로서, 들뢰즈는 헤겔은 부정과 결여만을 알고 있는 부정 신학에 불과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헤겔은 부정만을 말하는 철학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유한자는 모순과 대립 때문에 자신은 물론 타자도 긍정하지 못하는 부정의 상태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대립과 모순을 극복한 무한자의 상태에서 실체(주체)는 자신과 타자를 긍정하는 긍정의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순은 유한자에게만 적용되고 따라서 모순 상태를 벗어난 무한자는 모순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규정들의 ‘상호배척’ 상태를 벗어나므로 절대자에게서는 각 규정들이 서로를 승인하는 긍정의 상태에 도달하며, 이를 통해 절대자 자신도 자신을 긍정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Etwas)의 타자로의 이행에서 그것[어떤 것]은 단지 자기 자신과 일치하며, 이행과 타자 속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진정한 무한성(wahrharfte Unendlichkeit)이다.”48) 진정한 무한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은 물론 자기 자신[어떤 것]과 일치한다(A=A). 그리고 그것[어떤 것]이 타자로 이행해도 자기 자신[어떤 것]과 관계한다(A=B. 하지만 A=B는 곧 A=A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가? 어떤 것이 진정한 무한자가 될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무한자는 외부를 갖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한 계기(어떤 것]이 타자가 되어도 그것은 곧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것이다. 어떤 것과 타자의 관계는 곧 진정한 무한자의 자기 관계이며, 이러한 자기 관계에 도달함으로써 절대자는 (그리고 절대자 내부의 각 계기는) 이제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무한자는 긍정적인 것이며, 단지 유한자만이 지양된 것이다.”49)

   다섯째. 그러나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 있다. 헤겔이 말하는 긍정은 들뢰즈가 말하는 긍정과 달리 결여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긍정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절대자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타자를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절대자의 상태이다. 헤겔 철학이 말하는 긍정의 상태는 차이, 즉 결여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헤겔이 부정성, 차이 혹은 결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헤겔 철학을 목적론적 철학, 부정신학의 변종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과연 헤겔 철학이 그런 철학에 불과한가? 소위 부정신학에서는 모든 존재가 지향하는 완벽한 실체(신)가 있고, 모든 불완전한(결여를 가진) 존재자는 이 완벽한 존재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또한 이 완벽한 존재자는 유한한 존재자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으므로 완벽한 존재자는 부정적으로만 정의된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자는 불완전하므로 결여를 가지고 있다. 결여를 가진 이 불완전한 존재는 완벽한,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정의된 이 완벽한 존재(신)을 추구한다. 따라서 부정신학에 따르면 신은 영원이 도달될 수 없으므로 인간의 결여는 영원히 만족될 수 없으며, 이러한 인간은 패배주의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부정신학에 대한 들뢰즈의 이러한 비판은 물론 타당한 것이고 이러한 비판은 비단 들뢰즈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문제는 헤겔 철학이 부정신학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우선 헤겔의 절대자는 유한자 외부에 있어 유한자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피안에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자를 헤겔은 악무한(惡無限, Schlechte Unendlichkeit)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헤겔은 유한자가 절대자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무한자를 진정한 무한자(진무한)로 간주한다. 이러한 헤겔의 논의는 이미 부정신학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절대적 실체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여, 즉 타자와의 차이긍정함으로써 자신긍정한다. 바로 이것이 헤겔 철학이 갖고 있는 장점이다. 절대적 실체는 차이, 부정성 없이 ‘모든 암소들이 검게 보이는 밤’이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 역시 차이를 말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과연 헤겔이 말하는 의미의 차이와 같은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문헌학적으로 모두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며, 이 맥락에서는 그러한 작업이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들뢰즈의 헤겔 비판 그리고 라깡 비판에서 그가 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증상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연속성 속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들뢰즈가 진정한 단절 혹은 차이를 도입하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실재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겠는가? 하지만 들뢰즈와 달리 진정한 단절, 차이를 강조하는 라깡에게 상징계는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범주이다. 이를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실체(즉 실재)는 자신의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서 내적 분화와 단절을 경유해야 한다(상징화). 실재(실체)는 이러한 내적 분화와 단절을 경유하고, 모순과 대립을 극복한 후 자신을 절대적 실체로 긍정하고 진정한 주체가 된다. 이렇듯 헤겔 철학은 실체의 주체화 과정에 대한 서술에 다름 아니다. “긍극적 진리는 실체로서뿐만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주체로 파악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와같이 표현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50) 이렇게 본다면 헤겔이 말하는 부정성, 혹은 결여는 주체가 불만족과 결핍의 상태에서 자족해야 한다는 보수적이거나 패배주의적 견해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초연’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튀세르는 이를 은유적으로 ‘자유의 빈 공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체를 진정한 주체로 만드는 결여를 병리적 주체의 결여와 구분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라깡에 따르면 불만족으로서의 결핍 자체를 향유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신경증자로서 우리는 이러한 결여는 분석의 끝에서 주체가 발견하는 결여(결여의 기표)51), 혹은 모순을 극복한 절대자가 포함하고 있는 차이(헤겔), 혹은 자유의 빈공간(알튀세르) 등과는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는 주체의 ‘자유의 빈 공간으로서의 결여’ 개념을 주체를 소외시키는 결여와 구분하지 않은 채 헤겔 철학 혹은 라깡 정신분석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IV.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그리고 스피노자


   이제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에 대한 알튀세르의 해석을 살펴보자. 필자는 앞에서 알튀세르는 점차적으로 스피노자로부터 멀어지고 헤겔 철학에 다가서고 있다는 알튀세르 해석론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배제한 채 헤겔만을 중시했다는 의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사상을 계속 받아들이면서도 스피노자 철학에서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3종의 인식’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 헤겔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나는 『신학정치론』에서 ‘세 번째 유형의 인식, 즉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대상을 파악하게 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인식에 대한 가장 명백한, 그러나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해석의 예를 발견했다(나도 인정해야 했듯이 그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인 해석이었다).”52)

   스피노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공백”이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절대적 실체)에 대한 최고의 인식(3종의 인식)은 신에 대한 ‘충만한’, ‘완벽한’ 인식이 아니다. 신은 “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것 (....) 실존하면서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53)이다. 알튀세르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또는 전체(le Tout)에서 또는 유일독특한(unique) 실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전체와 아무것도 아닌 것(rien)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체 외부에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54)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최고의 인식에 대한 해석이 헤겔적 해석이라는 알튀세르의 언급이 적확한 표현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헤겔에서 (존재) 전체란 곧 무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가 없는 신은 헤겔의 진무한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알튀세르의 흥미로운 스피노자 해석은 계속된다. “우리는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유에 대하여 욕망에 의해 사유되지 않은 그 역능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신체에 대하여 그 모든 역능들을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언급을 통해 스피노자에 대한 ‘독단주의적 해석’, 즉 실체를 ‘완전하게’ 알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해석’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며, 오히려 ‘인식의 한계’에 관한 이론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자연[신]은 이제 더 이상 신에 대해 말할 일이 없도록 만들 뿐만 아니다.” 물론 이러한 알튀세르의 언급이 단순한 ‘회의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 태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 철학과 실체에서 ‘무’와 ‘공백’을 발견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를 보증하는 인식론 혹은 목적론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튀세르는 이 점에서 스피노자와 헤겔 철학을 연결시킨다. “스피노자에게는 ‘코기토’가 없고 (....) 헤겔에게는 선험적 주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있다(나는 그의 (내재적 목적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스피노자에게는 인식 이론(즉 진리와 그 과학적,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효과에 대한 선험적 보증)이 없었고, 헤겔에게도 인식 이론은 없었다. (...) 스피노자와 헤겔은 가능한 진리의 모든 지각 또는 모든 경험의 보증 또는 기반으로서의 초험적 또는 선험적 주체성이라는 환상의 정신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55)

   그렇다면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의미하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의 인식을 알튀세르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우선 스피노자가 말하는 1종의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을 통하여 손상되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지성에 나타나는“56) 상상, 즉 ”의견 또는 표상“이다. 알튀세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1종의 인식은 “1)(인간) 주체를 모든 지각과 행동, 목표, 그리고 의미의 중심과 기원에 두지만, 2)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실제 질서를 전도시킨다. (...) 즉 원인을 목적으로 전도시키는 하나의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의 세계는 원인들을 목적들로 전도시키는 장치 속에서 체험된 생활세계이다. 그것은 주체성의 환상의 원인들을 목적으로 전도시키는 장치이다.”57)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알튀세르는 혼란스러운 억견, 직접적으로 체험된 세계에 대한 인식(즉 상상)인 제1종의 인식에서 기원과 목적을 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개념인 주체 개념을 발견한다. 2종의 인식은 “사물의 성질에 대하여 공통 관념과 타당한 관념을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이성 그리고 제2종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58) “이 두 가지 종류의 인식 이외에 내가 다음에 제시하게 될 또 다른 세 번째의 것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직관지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신의 한두 가지 속성인 형상적 본질의 타당한 관념에서 사물의 본질의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간다.”59) 바로 이것이 제3종의 인식이다.

   이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통상적인 스피노자와 상이한, 헤겔주의적 해석을 제시한다. “‘3종의 인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새로운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제1종의 인식 이후 항상-이미 거기에 있는 대상의 영유관계의 새로운 형태”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60) 하지만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이 의미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분명하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제3종의 인식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신의 본질에 대한 타당한 관념에서 사물의 본질의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유한한 인간이 신의 본질에 대한 타당한 관념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인 것이다. 이러한 ‘독단주의적’ 혹은 ‘합리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이란 “보편적 개별성”61)에 대한 직관으로 이르는 이행으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해하기 힘든, 유명하지만 모호한 ‘제3종의 인식”, 이 직관적 인식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 예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2) 그러므로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을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직관, 즉 “상상이라는 생활세계 속에서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개체성”63)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해석은 상상이라는 생활세계, 즉 주체와 목적, 기원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총체성으로서의 상상계에 균열을 야기하는 상징계, 혹은 실재 개념(라깡)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알튀세르가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제3종의 인식이란 “상상이라는 생활세계 속에” 있는 진정한 존재자, 즉 상상계적 일관성에 균열을 가하는 보편적인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해석은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과 달라진다. 들뢰즈 역시 3종의 인식을 신에 대한 ‘총체적 인식’, ‘합리주의적’ 인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64) 그러므로 들뢰즈는 신에 대한 3종의 인식을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할 것을 촉구하지만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은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관점을 취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2종의 인식은 [공통 개념에 근거하므로] 특징적 관계들의 합성에까지 상승한다.” 하지만 “3종 인식만이 영원한 본질들에 관련된다. 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신 안에 존재하는 신에 의해 사고되는 특수한 본질에 대한 인식 (...) 말이다.”65) 3종 인식에 의존하는 “3종의 기쁨들은 우리 자신의 본질에 의해 설명되며, 언제나 그 본질에 대한 적실한 관념을 ‘수반한다’. 다른 모든 사물들의 본질과 신의 본질을 포함하여 3종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영원성의 형태로 사고한다는 사실로부터 이해한다.”66)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 대한 적실한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영원성의 형태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의 관점, 즉 신의 관점을 취하도록 이끌어간다. 유고에서의 알튀세르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스피노자 해석과 거리를 취하기 위해 헤겔을 다시 원용하는데, 알튀세르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해석은 라깡이 말하는 분석의 끝, 즉 대타자의 비존재, 또는 대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에 대한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제3종의 인식을 말했던 알튀세르가, “원인도 없고 호소할 수도 없는 상실들”67)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록 알튀세르는 이러한 표현을 말브랑슈를 읽을 때 생각해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라깡이 즐겨 사용하던 개념 아닌가?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나는 스피노자와 결별하지 않았다”68)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또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나는 내 환상을 거치고,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거쳐서 내 첫째가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프로이트와 맑스에게로 힘들게 나아갔다.”69)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오랜 학문적, 실천적 과제였음을 최종적으로 밝힌다. 스피노자와 헤겔, 혹은 스피노자와 정신분석을 대립시켜 사유하고자 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어떤 경향과는 철저히 다른 사유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70)   

   여기에서 언급할 만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는 제3종의 인식에 대해서 “‘3종의 인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새로운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제1종의 인식 이후 항상-이미 거기에 있는 대상의 영유관계의 새로운 형태”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언급 역시 신에 대한 지적 직관에 신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이데올로기적으로 파악되던 세계와 신에 대한 관점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란 정신분석치료의 핵심으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스피노자의 경우에 감정들의 제어는 감정들의 부정적 효능의 ‘지적’ 해방으로 해석될 수 없다. 반대로 감정들의 제어란 ‘슬픈 감정’으로부터 ‘즐거운 감정’으로의 내적인 전위를 통하여 감정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늘에 오르기라도 하는 것과 같은 좋은 감정으로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나중에 프로이트의 경우에 어떤 환상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지만 지배적 지위에서 종속적 지위로 전위되는 것―이것이 치료의 효과이다― 처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어떤 감정도 결코 사라지지는 않지만 ‘슬픈’ 지위에서 ‘즐거운’ 지위로 전위된다.”71)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라깡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끝에 대해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의 인식이 정신분석이 말하는 분석의 끝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튀세르가 긍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공산주의란 소비에트 더하기 전력화 더하기 정신분석인 것이다.’

   또한 역시 상세히 논할 여유는 없지만 알튀세르는 정치적 지도자, 혹은 혁명가가 취해야 할 위치를 분석가의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군주’는 “자신으로부터의 거리, 자신의 욕망들과 욕동들과 충동들로부터의, 따라서 그 시대의 언어를 쓰자면, 감정들로부터의 거리72)를 취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지도자는 자신의 “역전이”73)를 잘 통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분석가가 취해야 할 태도 혹은 위치가 아닌가? 알튀세르가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논문”이라고 불렀던, 「전이와 역전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제3종의 인식이란 보편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며, 알튀세르는 이러한 해석을 헤겔에게서 발견한다고 말함으로써 헤겔 철학을 다시 복권시킨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 개별적인 보편성 혹은 보편적인 개별성은 헤겔 철학의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개념(Begriff),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 이념(Idee)이다. 이념이란 “객관적 세계 속에서 자기자신을 통하여 스스로에게 객관성을 부여함으로써 자기를 완수시키고자 하는 목적”74)이다. 헤겔에서 개념이란 피안에 존재하는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사물과 현실 자체 속에 내재하는 내재적 원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겔 『대논리학』의 방법론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대논리학』은 존재로부터 출발해 개념에 도달하는데, 이는 인식론적 관점에 따른 절차이다. 하지만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나중에 도출된 개념이 사실 존재와 현실의 질서를 구조짓는다는 점에서 개념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위성을 갖는다. 또한 개념이 자신을 완전히 실현한 것이 절대 이념, 혹은 신, 실체라는 점에서, 이러한 헤겔의 존재론적 관점은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스피노자 철학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이제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듯이 헤겔은 개별자를 보편자로 흡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헤겔은 보편자는 오직 개별자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개별자를 보편자로 흡수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추상은 (...) 개별성, 즉 개체성과 인격성의 원리를 떨쳐내 버림으로써 아무런 생명이나 정신도 없는, 그리고 색깔이나 내용도 없는 보편성에 다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의 통일은 도저히 불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이상과 같은 추상의 소산이 개별성을 배제해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오히려 개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75)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개별적 사물들로부터의 추상이라는 경험주의적, 상식적 보편성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헤겔이 말하는 개념(혹은 이념)이란 주어진 직관을 통일시키는 주관적 개념(칸트)이 아니라 객관성, 혹은 현실을 구조짓는 내적 원리이다. 칸트에 따르면 ‘객관이란 그의 개념 속에 어떤 주어진 직관의 다양한 것들이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헤겔은 이원론적 함정에 빠져 물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적 인식론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칸트의 견해를 극복한다. 개념은 사물 외부에서 사물에 형식을 부여하는 주관적 개념이 아니라 항상-이미 사물과 현실을 구조짓는 객관적 개념이므로 개념 속에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에 도달한다.76) 하지만 이러한 헤겔의 인식론이 독단적 합리주의가 아닌 까닭은 개념의 실현, 그리고 개념의 실현체인 사물은 필연적으로 개념의 형식을 벗어나는 우연성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우연성은 실체의 규정들의 필연적 인과관계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달리 말하면 필연성이 우연성을 정립했다77)는 점에서 우연성과 필연성은 일치한다.

   왜 개념은 필연적으로 우연적인 것을 포함하는가? 추상화된 보편성이 아닌 헤겔적 의미의 보편적 개념은 단순히 개념의 형식적 통일성이 아니라 ‘진리’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오성적 의미의 개념(칸트) 혹은 공허한 추상으로서의 개념은 형식적 동일성에 지나지 않지만 헤겔은 이러한 ‘주관적 개념’―개별자들로부터의 추상으로서의 보편적 개념―의 개념을 넘어서 주관과 객관의 통일, 혹은 개념과 객관성과의 통일로서의 개념78)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개념의 형식뿐만 아니라 개념의 내용도 논의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79) 예컨대 ‘나무’라는 개념의 실현(설명)을 위해서는 나무의 개념을 설명하는 혹은 나무의 개념이 전개되는 술어들(즉 다른 개념들)이 요구되며 따라서 ‘나무’라는 개념의 형식적 동일성은 나무라는 개념의 구체적 내용과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80) 이렇듯 개념의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하므로 개념이 그 운동원리를 이루는 현실 자체도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하며, 이로부터 개념의 실현인 사물에서 개념에 외재적인 우연성이 도출된다. 우연성과 필연성의 일치라는 헤겔의 논제는 따라서 개념은 우연성을 자신의 필연적 규정으로 갖는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개념은 자신의 내용의 완전한 실현 불가능을 자신의 실현조건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개념이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개념의 속성으로 갖는 까닭은 개념 스스로가 부정성을 경유함으로써만 자신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이제 자신의 객관성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 속에 결여를 가지며 따라서 자신을 더욱 이끌어 나가야 하는 충동을 갖고 있다.”81) 하지만 여기에서 헤겔이 결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것이 개별적 사물이 도달해야 할 어떤 초월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념은 구체적 개별자의 내적 원리라는 점에서 헤겔 철학에서 보편자는 개별자로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개별자가 추구해야 할 초월적 원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성된 개념은 이제 자신의 실현을 방해하는 우연적인 것들, 즉 자신에 대립되는 것들을 자신의 규정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함으로써―우연성이라는 타자성을 개념의 내적 규정으로 승인함으로써―개념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며 긍정한다. “실로 이념은 개념이 그 속에서 획득하는 자유로 인해서 그 자체내에 가장 극심한 대립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결국 평온한 상태에 다다른 이념이 참다운 의미의 안정과 확신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이념이 영원토록 그와같은 대립을 산출하면서 동시에 이를 영원히 극복해나가는 가운데 바로 그 대립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일체가 되는데서만 가능한 것이다.”82) 개념이란 “자기의 타재성 속에서 자기자신을 회복시킨 개념으로서의 존재”83)인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은 한갓 부정적, 소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는” “근본적 편견”84)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특히 3종의 인식과 관련해 이것은 보편적 개별성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헤겔적 해석이라는 알튀세르의 언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 수 있는지 추적해보았다. 이제 정신분석, 특히 라깡 정신분석과 관련해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논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알튀세르가 과거에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거부했던 주체 개념을 다시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알튀세르는 주체 범주를 재해석해 새롭게 도입한 라깡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새로운 주체 개념은 라깡이 말하듯이 탈중화된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주체는 정확히 어떤 주체인가? 그것은 필자가 다른 곳에서 제안한 바 있듯이 ‘과정으로서의 주체’이다.85)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개념으로서의 실체는 현실을 구조짓는 운동원리로서 주체에 다름 아니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3종의 인식처럼 흥미롭게도 헤겔은 바로 이러한 주체를 정확히 보편적 개별자로 규정한다. “나는 지금까지 전개된 개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며 동시에 그에 대한 이해를 좀더 용이하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만을 지적해두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말하자면 개념이 이제 그 자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실존의 상태에 까지 다다른 이상 오직 이것은 자아이거나 또는 순수한 자기의식 이외에 그 어떤 것일 수도 없다.”86)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자아는 곧 보편성”이며 동시에 “개별성87)이다. 헤겔이 말하는 자아, 즉 주체는 “개별성”이며, “개체적 인격성”88)이지만, 아직 절대적 주체가 되지 않은 한에서, 즉 자아(주체)란 유한한 정신인 한에서 “타자를 배척하는 절대적 피규정자이다.”89) 이러한 유한한 주체가 이제 절대적 주체(실체)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자신의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객관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한한 주체에서 절대적 주체로의 이행은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어떤 ‘새로운 인식’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다. 자신의 본질을 제한하는 자신의 타자 속에서, 타자의 타자성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발견하는 것, 즉 “모든 것 속에서 자기자신만을 발견하며 또 인식하고자 하는 이성의 가장 고귀하도도 유일한 충동”이야 말로 이성이 가진 “최고의 90)인 것이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주체는 자신을 대타자에 의존하는 소외된 주체에서 ‘자기원인’으로 전환된다. 정신분석의 끝과 관련한 논의에서 라깡은 타자인 대상 a를 주체와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정신분석적 행위로 간주한다. 라깡에 따르면 분석의 끝에서 주체는 “대상 a의 즉자성”으로 “환원된다.”91) 라깡의 분석의 끝을 ‘주체적 궁핍’으로 설명하지만, 분석의 끝으로서의 주체적 궁핍은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획득이다. 주체적 궁핍이란 상징계에 의한 소외 속에서 누리던 주체의 극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석의 끝에서 주체는 상징계 속에서 상실되었던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다시 획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적 궁핍은 탈존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존재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다.”92) 여기에서 우리의 논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헤겔 또한 라깡과 마찬가지로 이념의 완성을 인식과 행위의 융화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분석에 끝에 관한 라깡의 설명이 헤겔과 접목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마침내 이 이념을 자기의 절대적 진리로서 즉자대자적으로 있는 진리로서 인식하기에 이른다. 즉 이것은 ‘무한’의 이념으로서, 이 속에서는 인식과 ‘행위’가 융화를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이념이 자기자신의 절대지에 다다르게 된다.”93) 절대지란 자신의 타자와의 대립의 극복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헤겔의 절대지는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적 차원, 즉 “자유로운 실존으로의 고양”94)과 타자성의 긍정과 화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V. 맺음말


   만족과 결여의 변증법을 보지 못하고 만족만을 강조하는 들뢰즈의 존재론은 정신분열증, 망상증, 도착증, 신경증 등 인간 주체가 처할 수 있는 다양한 실존 방식 중에서 ‘오직’ 정신분열증만을 특권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실 라깡 정신분석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은 주체와 타자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 ‘결여 없는 만족’만이 존재하는 주체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라깡의 견해는 사실 들뢰즈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그리고 어떻게 들뢰즈는 이러한 병리적 정신분열증 상태를 ‘특권화’할 수 있었는가? 이제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들뢰즈는 자신이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란 임상적 의미에서의 정신분열증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열증자가 누리는 결여 없는 만족이란 사실 ‘치명적인 향유’이며, 따라서 들뢰즈가 이렇듯 파멸과 죽음의 불안을 체험하는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증자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델’로 간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말하는 해방된 분열증자는 임상적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분열증자이다. 바로 이러한 들뢰즈의 논의는 난점에 부딪치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한편으로는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를 소외로부터 벗어난 해방된 주체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인은 임상적 의미의 분열증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반오이디푸스』에서 슈레버를 정신분열증자로 해석하면서 그를 자신의 영웅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슈레버는 사실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증자95) 아닌가? 왜 한때의 영웅이 다시 소외된 인물로 폄하되어야 하는가? 사실 들뢰즈가 말하는 ‘비임상적’ 분열증자는 라깡이 철저히 탐구한 바 있는 오이디푸스의 너머에 도달한 사람, 즉 소외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 즉 분석의 끝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들뢰즈는 이러한 라깡적 결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라깡의 견해에 동조할 수도 있을 들뢰즈 이론이 외관상으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 정치적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을 특권화한 것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특정한 철학적 존재론을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독단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동지를 ‘주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적 오류는 물론 생산적인 학문적 토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기능할 수 있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그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할 때에만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과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알튀세르가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서 깨어난 후 맑스로 되돌아가는 설레이는 귀향길(Heimweg)에서, 정신분석과 헤겔을 경유하는 우회로(Umweg)을 거치며 다시 발견한 자신의 ‘새로운 맑시즘’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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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무관성’이라는 이러한 옛 입장을 다시 한번 반복한 예로서는 예컨대, 진태원, 2002, 특히 368면 참조.


2)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을 포함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학에 관한 새로운 논의로는 홍준기, 2003, 121면 이하를 참조하라.


3) 여기에서 상세히 논의할 수는 없지만 정신분석 혹은 라깡에 대한 들뢰즈의 극단적인 비판적 입장은 『반오이디푸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저서 이전에는 라깡 이론이 들뢰즈 철학의 비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들뢰즈가 참조했던 결정적인 준거점 중의 하나였다. 반면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들뢰즈 철학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된다. 따라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시기별로 들뢰즈 입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나 이러한 상세한 검토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므로 여기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수 없었다.


4) 지면의 제약 때문에 이 글에서 필자는 정신분석의 끝에 관한 라깡의 논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홍준기, 2002, 26면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5) 루이 알튀세르, 1996, 25면 이하, 그리고 145면 이하 참조.


6)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문헌적 고찰로는 또한 F. Matheron, 1997, p. 23ff. 그리고 만족결여변증법을 중시하는 라깡 관점에서의 들뢰즈의 욕망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홍준기, 2005a, 20이하를 참조하라.


7) 알튀세르, 1996, 182면.


8) 같은 책, 182면. 강조는 원문.


9) 이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10) 알튀세르, 1996, 193면. 강조는 원문.


11) L. Althusser, 1975, 70면.


12) 예컨대 알튀세르의 제자였던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느 발리바르 등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저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쓰여진 스피노자 해설 중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EJB, 2001(진태원 번역) 등이 있다. 물론 마슈레는 헤겔을 스피노자에 이어서 부차적으로나마 필요한 철학자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부차적으로 모순 개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앞으로 살펴보겠듯이 주로 스피노자에 의존하는 마슈레 이론은 적어도 알튀세르 자신의 입장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가 중시하는 모순 범주를 진지하게 사유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13) L. Althusser, 1975, 61면, 각주 19. 강조는 원문.


14) L. Althusser, 1986, 169면 참조.


15) L. Althusser, 1993, 75면.


16) L. Althusser, 1975, 96면.


17) L. Althusser, 1975, 73면 이하 참조.


18) 같은 책, 76면.


19) 같은 책, 77면.


20) 같은 곳.


21) 같은 책 79면 이하.


22) 같은 책, 81면.


23) L. Althusser, 113면.


24) 예컨대, L. Althusser, 1975, 79면.


25) L. Althusser, 1970, 186면.


26) 같은 책, 180면 참조.


27) 같은 책, 181면.


28) 같은 책, 190면.


29) L. Althusser, 1993c, 111면 이하.


30) L. Althusser 1993, 149-150, 151면 참조.


31) 같은 글, 149면 참조. 하지만 알튀세르는 사실상 기표이론을 사적 유물론에 포섭, 흡수시키고 있다.


32) 같은 글, 150면. 강조는 원문.


33) 같은 곳.


34) 물론 기표이론이 라깡 이론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알튀세르가 라깡 이론을 기표의 보편이론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이미 오류이다.


35) 이에 대해 상세한 논의로는 홍준기, 2003, 133면 이하 참조.


36) 엘리어트, 1992, p. 149.


37) L. Althusser, 1970, 16-17면 참조.


38) L. Althusser, 1975, 82면. 강조는 원문.


39) 같은 책, 82-83면 참조.


40) 물론 필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진리와 오류를 구분해주는 근거를 제시하는 독단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헤겔 철학의 ‘신비적 외피’를 벗기고 나면 합리적인 변증법의 ‘핵’이 드러나듯이, 우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알튀세르가 요청했듯이 ‘사변주의적’, ‘형이상학적’ 방식 혹은 들뢰즈적 방식이 아니라 달리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41)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예속을 극복하고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즉 3종의 인식을 가져야 하듯이, 헤겔 철학에서 인간 자유의 실현이란 곧 절대적 이념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스피노자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단순히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었듯이 헤겔에게 절대적 이념의 문제역시 단순히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이다.


42) Hegel, 1818-1931, 472면(V. Hösle, 1988, 163면에서 재인용, 강조는 원문).


43) 헤겔, 1997a, 76면. 강조는 원문.


44) 헤겔, 1997b, 24면. 강조는 원문.


45) 같은 책, 27-28면.


46) 예컨대 G. Deleuze, 1977, 75면 이하 참조.


47) Hegel, 1969, 148면.


48) Hegel, 1970, ζ 95, 201면. 강조는 원문.


49) 같은 책, ζ 95, 202면.


50) 헤겔, 1983, 72면,


51) 물론 라깡이 분석의 끝을 결여로서만 정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라깡은 궁극적으로 헤겔과 마찬가지로 분석의 끝을 존재의 획득, 즉 긍정성의 획득으로 정의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서 다시 논하기로 한다.


52) 알튀세르,  1993a, 245면.


53) 알튀세르, 1996, 51면.


54) 같은 책, 50-51면. 강조는 원문.


55) 같은 책, 152-3면.


56) 스피노자, 1990, 특히 108면.


57) 같은 책, 155 면.


58) 같은 책, 108면. 강조는 원문.


59) 같은 책, 108-109면.


60) 같은 책, 109 면.


61) 알튀세르, 1996, 164면.


62) 스피노자, 앞의 책. 156 면 참조.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예를 『에티카』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예는 지극히 평범하므로 신에 대한 직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드는 예는 비례수의 예로서 1과 2, 그리고 3이라는 수가 주어졌을 때 제4의 비례수는 6이라는 것이다.


63) 알튀세르, 1996, 156 면. 강조는 원문.


64) 들뢰즈, 2003, 408면 참조.


65) 같은 책, 409면.


66) 같은 책, 401-2면.


67) Althusser, 1992, 210면.


68) 알튀세르, 1996, 163면.


69) 같은 책, 178면. 강조는 필자.


70) 보다 상세한 논의로는 홍준기, 2003, 특히148면 이하 참조.


71) 알튀세르, 1996,, 177면. 강조는 원문.


72) 같은 책, 174. 강조는 원문.


73) 같은 책, 176면.


74) 헤겔, 1997b, 393면. 강조는 원문. 물론 여기에서 목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해서 헤겔 철학을 단순히 목적론이라고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피노자 역시 형상적 원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스피노자를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에 매여 있는 철학자라고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75) 같은 책, 87면.


76) 같은 책, 31-32면 참조.


77) C. Taylor, 1975, 294면 참조.


78) Hegel, 1970, ζ 162.


79) 헤겔, 『대논리학 III』, 71면. “개념이 지니는 추상적 제규정은 다면 형식면에서만 영원한 진리일 뿐, 결코 그의 내용마저도 그러한 형식에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80) 이에 대한 예로서는 홍준기, 2002, p. 참조.


81) H. F. Fulda, 1989, p.  139. 강조는 원문.


82) 헤겔, 1997b, 306면.


83) 같은 책, 218면. 강조는 원문. 여기에서 개념의 ‘객관성’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


84) 같은 책, 423면.


85) 이에 대해서는 홍준기, 2003, 148면 이하 참조.


86) 헤겔, 1997b, 29-30면. 강조는 원문.


87) 헤겔, 1997b, 30면. 강조는 원문.


88) 같은 책, 30면.


89) 같은 곳.


90) 같은 책, 414면. 강조는 필자.


91) J. Lacan, 1984, 18면.


92) J. Lacan, 1970, 21면.


93) 헤겔, 1997b. 307면. 작은 따옴표에 의한 강조는 필자. 이글에서는 지면의 제약상 분석의 끝으로서의 ‘정신분석적 행위’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홍준기, 2004를 참조하기 바란다.


94) 헤겔, 1997b, 442면.


95) 프로이트와 라깡에 따르면 사실 슈레버는 분열증자가 아니라 망상증자이다. 여기에서 역시 자세히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슈레버의 자서전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슈레버는 다름 아닌 스피노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며, 바로 그 때문에 들뢰즈는 슈레버를 정신분열증자로 해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망상 속에서 스피노자의 세계관을 옹호했다고 해서 그가 정신분열증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상적으로’ 본다면 슈레버는 체계화된 망상을 발전시킨 망상증자였으며,  ‘망상적 은유’(라깡)을 통해 자신을 구원한 ‘해방된 망상증자’였다. 이 점에서도 필자는 분열증과 망상증을 대립해 후자를 폄하하는 들뢰즈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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