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으로부터 우리는 20년의 시간적 간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 간격에 놓인 번다한 역사적 사태를 어떻게 정의하고 분별할 것인가를 두고 분주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입장은 대개 이렇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먼저 우리는 한편에서 “근대화의 완성”으로서 “민주화 이후”를 정의하고 또한 세례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것이 민주화 이후를 규정하는 자유주의적 담론이라 생각한다. 이런 주장은 “민주화 이후”를 어떻게 규정하고 판별할 것인가를 둘러한 담론 투쟁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
less.. 우리는 적어도 “성공적인, 압축적인, 기적적인, 토건국가적인, 개발지상주의적인” 등등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에 조응하는 민주주의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87년 이후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하였고, 그것은 불완전한 근대화를 완성하였다. 경제적 근대화에 뒤지는 후진적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화를 통한 근대화의 보충과 완성. 따라서 우리는 충분하고 온전한 근대화에 도달하였다, 운운. 이런 논리는 나아가 “민주화”란 “정상화”이며 “성숙”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이것이 전후 냉전 체제에 형성된 “근대화” 담론을 되풀이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최신의 “동아시아 민주화 담론”을 쫓는 것이든, 아니면 “민주화 이후”를 이끌었던 “시민사회” 담론이 내걸었던 정치적 프로그램, 즉 “민주주의의 (재)민주화”, “민주주의 공고화”, “민주주의의 사회화” 등등에서 나타나는 것이든, 그 입장들 사이에 놓인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놀라운 일은 이른바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입장들이 바로 이 “근대화의 완성”으로서의 민주화 이후라는 담론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근 성업 중인 “뉴 라이트”이든 아니면 민중운동 이후 시민운동으로 변신한 “뉴 레프트”이든, 대개의 정치적 주장들은 민주화 이후를 민주주의의 성취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따라서 구태의 보수주의로는 변화된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할 수 없기에 변신을 꾀하여야 한다는 뉴 라이트나, 민주주의가 현실화된 이후 민주주의적 절차와 제도, 법률을 보다 확장하고 견고히 하기 위하여 시민의 협치(governance)를 제도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쫓아온 뉴 레프트나, 결국은 87년 이후의 역사적 현실을 민주주의의 현실화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물론 그것은 거의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주장처럼 들린다. 87년 이후를 민주화 이후라고 부른다는 것은 거의 흔들림 없는 자명한 결론 아닌가. 여기에서 민주화 이후를 둘러싼 두 번째 입장을 상기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그런 입장은 민주화 이후를 “신자유주의화”란 틀 속에 묶고 분석한다.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분단체제, 신경제 체제로의 이행과 더불어 현실화된 노동 없는 축적 체제의 등장, 이른바 신국제질서라는 이름의 세계체제로의 통합 등, 우리는 “민주화 이후” 민주화란 이름에 값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민주화는 기만이며 그것은 오직 신자유주의화라는 새로운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이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민주화 이후는 곧 신자유주의화의 다른 이름이며, 민주화는 절대 이루어진 바 없으며 여전히 중단 없이 추구되어야 하는 기획이다. 최근 이런 입장은 민주화 이후를 둘러싼 반성 속에서 사뭇 설득력을 얻어왔고 나는 그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때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와 정치의 거리그러나 나는 후자의 입장이 민주화 이후를 성찰하는 데 있어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데 있어 충분히 생각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그것의 사회적 내용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최악의 경우 사회적 불평등을 위장하는 기만적인 허울이거나 아니면 그것은 단순히 부가적이고 외재적인 형식이어서 그것의 실정적인 내용, 즉 그것이 “사회적” 삶의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분별하고 평가하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신자유주의화”로 민주화 이후를 평가하려는 주장은 안타깝게도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 자체를 질문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화라는 틀 속에서 민주화와 민주주의란 정치는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government) 혹은 행정관리(police)로 환원되고 만다. 그러나 정치는 통치와 구분되어야 옳다. 물론 사회적 삶의 관리와 규제로서의 정치, 흔히 통용되는 “민생정치”란 용어가 상기시켜주듯이, 국민 혹은 인구(population)의 삶을 돌보고 향상시키는 정치가 근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의 귀결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정치의 사회로의 흡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회를 규제하는 초월적인 항으로서의 정치를 거부하라는 주장이며 사회의 다양한 실제적인 삶, 즉 인민 혹은 시민의 실제적인 욕구와 이해, 삶의 질 혹은 안녕을 살피고 관리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좌파들이 이에 동의하였으며 이의 가장 세련된 형태는 이른바 “제3의 길” 혹은 “참여정부” 따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삶”과 “사회적 삶”(다시 푸코의 말을 빌자면 행복, 건강, 장수, 안전, 부를 추구하는 생물학적인 삶)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차이를 지운다는 것은 곧 사회적 삶의 문제를 규정하는 체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위가 있을 수 있음-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을 배제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어떤 체제에 살 것인가”를 규정하는 것, 즉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의 사회가 전부이다, 역사는 끝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효율과 계산뿐이다”가 아니라 “여기의 바깥이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회적 규칙은 보편적 섭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단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런 주장을 물질화하는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삶의 내용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행위란 점에서 비사회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 삶의 내용을 규정하는 좌표 전체를 바꿈으로서 사회적 삶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입장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실체화함으로써, 혹은 근대성의 규범적인 이상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제도와 절차로 축소하는 것(즉 착취의 사회적 삶을 고려하지 않는 실체화된 대상으로서의 정치)과 반면 민주주의를 사회적 삶의 내용을 은폐하는 외재적인 허울이나 사회적 삶 자체의 파생물로 축소하는 것(즉 착취를 정치의 본질로 환원하면서 정치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정치) 말이다. 정치는 자율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언제나 계급적대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타율적이다. 나아가 이는 “민주화 이후”의 문화를 반성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정치에 대한 물음을 문화에 해당시키면 어떻게 될까. 굳이 줄여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의 문화는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민주화 이후”를 규정하는 문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일은 거의 희박한 것 같다. 90년대 이후 “문화의 시대”란 유행어가 범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류에 대한 캐리커처를 넘어서지 못한 듯 보인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문화를 반성하는 물음이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반성하는 물음과 언제나 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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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타자, 정치그러므로 고진이 <트랜스크리틱> 이후 생산의 입장,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벗어나 유통의 입장, 소비자/시민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개조하자고 주장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가장 유효한 입장이라 역설할 때, 우리가 그를 미심쩍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그는 유통의 입장에서 가능한 정치, 즉 경제의 입장에서 도출된 정치를 생각하자고 강변한다. 그런 입장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
가 오랜 동안 사용해 온 정당한 개념이 있다. 물론 그것은 경제주의이다. 나는 그의 주장과 달리 생산의 입장에 선 정치, 그러나 이번에는 경제로서의 생산이 아니라 경제와 정치를 단락시키는 계기로서의 생산이라는 입장에 선 정치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이란 물리적 행위로서의, 경제적 재생산의 계기로서의 생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생산이란 당연한 말이지만 생산-유통-생산의 순환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계기로서의 생산이 아니라 바로 그 순환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 자체를 생산하는 것으로서의 생산일 것이다. 전체 순환의 흐름 속(이를테면 생산-유통-생산의 사슬)에서는 그저 하나의 부분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엄밀하게 생각해보자면 그것의 실현을 위해 가능한 계기, 즉 생산 자체의 조건으로서의 생산이 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생산은 바로 그 생산의 조건 자체의 생산과 경제적 계기로서의 생산 자체와 동시적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착취의 조건을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만 생산이 가능하며,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정치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서의 핵심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문화와 예술에도 어김없이 연관된다. 문화와 예술이 진보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의미에서일 뿐일 것이다. 즉 그것은 예술이 정치화되는 것, 예술이 가용한 원천인 상상력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유행과 추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현존하는 감성의 생산과 분배를 유일한 질서로 수긍하며, 기호학적 저항, 전복적 재전유 혹은 수행적(performative) 반복 따위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에 만족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문화예술에 해당하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통치로서의 정치, 사회적 관리로서의 정치일 것이다. 반면 상상력 자체를 생산한다는 것이 그로부터 벗어난 정치, 본연의 정치와 대응할 것이다. 문화예술과 정치 사이에서 어떤 외재적 관계를 수립하고 둘 사이에서 재현과 반영의 규범을 외삽하여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실 상상력과 상관없다. 그것은 상상력 혹은 근대적인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감성 혁명 이전에 존재하던 것에 불과하다.
상상력이란 지성화된 감성이고 또한 감성화된 지성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에게 외적인 지성의 감독을 받으며 재현적 진실을 추궁 받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아마 랭보와 말라르메 그리고 러시아 혁명기의 예술가 등등을 지배했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결국 문화예술을 정치화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진보라는 이상과 결합하는 것은 새로운 상상력을 생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근대 문화예술의 진보를 규정하는 논리, 문화예술은 정치와 무관함 속에서 그것과 관계한다는 논리를 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예술과 정치가 각각 자율적인 실체로서 독립적으로 추구하지만 그런 비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관계하는 것, 문화예술은 지금 여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있는 부정성을, 정치는 지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있는 부정성을 상대한다. 결국 요점은 양자가 모두 부정성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예술의 정치화이고 또한 정치의 예술화일 것이며, 또한 문화예술의 진보에 상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부정성을 답파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날까.
정치라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회가 전부가 아니며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정치가 아니라는 것을 확언하고,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부정성을 조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 쪽에서도 그런 부정성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문화와 진보의 관계를 사유하는 길이자, 또한 지금 “민주화 이후”의 문화에서 민주주의와 문화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해석하는 논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물론이다.
- [문학과 사회] 2007년 여름호에 기고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