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언젠가 케이블 티비에서 불량공주 모모코를 재밌게 보았는데
바로 그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말에 곧바로 보게 된 영화다. 근데 전작만큼 마냥 유쾌하진 않다.
중학교 교사였던 마츠코는 우연히 일어난 도난사건에 휘말려 교사직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그녀는 츄리닝을 허리까지 끌어올리는 버릇을 지닌 동료교사, 자신이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
이라고 믿는 작가지망생, 불륜남, 기둥서방, 자신의 제자였던 야쿠자 등 여러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마츠코에게 돌아오는 것은 폭력과 무시, 배신, 착취 뿐이다. 그 와중에 마츠코
역시 절도, 성매매, 살인, 옥살이 등을 경험하게 된다. 끝내 사랑을 멈추고 혼자서 살아가기로
한 마츠코. 언젠가 다자이 오사무가 남겼다는 말, 그리고 죽기 전 마츠코가 자기 집 앞 벽에 쓴 말은
바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순진무구한 존재가 어쩌다가 이렇게 죄의 나락으로 미끄러져
갔는가? 기실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아주 우연적인 사건들이다. 조그마한 실수 하나,
누군가의 거짓말, 충동적인 결정, 어린 소년들이 휘두른 방망이가 일생의 주된 국면들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츠코가 간절히 보고싶었던 아버지의 따뜻한 미소가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 미웠던, 그러나 사랑했던 병약한 동생도 있다.
삶의 근원이 언제나 구태의연한 가족드라마가 상연되는 극장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이 모든 이야기의 기원과 목적을 결정하는 제일원인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 역시 한 인생을 휘어잡는 강력한 우연의 실마리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원인'을 정당하고도 근원적인 '이유'로 삼도록 오래 배워오지 않았는가?
마츠코가 자기 인생에서 아버지를 제외한 남자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너무나
끔찍한 성의 폭력들인데, 그렇다고 그녀가 꼭 여남관계 속 희생자/피해자의 구도에 고정된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녀의 제자이자 야쿠자인 류가 감옥에서 던진 물음,
"어째서 신은 사랑입니까?"에 의해 그녀는 수난당하는 신, 미워하지 않고 언제나 사랑을 베푸는,
오히려 원수에게마저 사랑을 베푸는 신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성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으로 옮겨간다.
언제나 사랑없이 살아갈 수 없는 마츠코에게서 각자의 편린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동시에 사랑이란게 얼마나 쉽게 시작할 수 있는지, 그러나 아가페로 나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타인에게로 향하는 공격충동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나르시시즘의 구조 속에서 이웃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또한 아니다.
그토록 원하던 고향의 아버지와 동생을 만난 마츠코의 미소는 행복을 의미할까?
아마 그녀의 일대기는 그녀가 방망이에 얻어맞아 죽은 시점에서 되돌릴 수 없이 끝나버렸을테니
이런 물음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지만... 나의 혐오스런 일생은 또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조금은 진지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