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엔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문대학 진학을 보장하는 '특별한' 학교의 배제성이다. 즉 그런 학교의 존재 자체보다, 누구에게나 입학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영어면접과 에세이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청심국제중학교 학생들은 부모의 직업부터 남다르다. 우리 사회의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의사의 비율은 약 0.7% 가량인데 비해, 청심국제중학교 학생의 학부모 가운데 의사의 비율은 15%에 가깝다. 민족사관고를 비롯한 자립형사립고의 경우엔 학부모 중 의사의 비율은 10%로, 평균적으로 봐도 이 특별한 학교 학생들은 보통 이상의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입생 아버지의 직업분포를 조사한 결과, 관리·전문직의 비율이 50%에 육박하여, 우리 사회 전체 관리·전문직 비율의 3배에 가깝다. 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조사결과를 놓고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댔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누구나 쉬쉬하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버렸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나름의 위기감의 발로였던지, 지난 한 해 정부 개혁정책의 모토는 '양극화 해소'였다. 그 실체조차 불분명한 양극화를 잡겠다고 빈곤대중들에겐 독 묻은 사탕을, 고소득층에겐 각종 혜택을 베풀던 꼴사나운 모양을 보아왔던 마당에, 대선을 앞두고 있는 올해 역시 양극화가 인기 있는 이슈로 각광받을 생각을 하니 심사가 여간 뒤틀리는 게 아니다. 양극화가 통상 중간층의 해체와 빈곤층의 확대를 의미한다면, 중간층 기대심리를 활용한 표심(票心) 잡기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 불안요소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대선주자로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게다. 그 양극화 호들갑이 교육분야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는 바, 지난 한 해 몇몇 언론들이 교육양극화 현상을 다루면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학계에서 교육양극화나 불평등의 실태를 보여주는 실증적 연구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덕분에 항간에 나돌던 '개천의 용'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야 이것도 능력이라면 할 말 없지만 성공한 인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부모의 학력이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거주 지역 내에서 질 좋은 교육정보망과 인맥을 가꾸며 아이들과 상시적으로 상담과 대화를 하며, 아이들로 하여금 높은 포부수준을 꿈꾸게 할 때 '명문대'에 들어갈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대중들은 '능력에 따른 기회의 평등'이란 교과서적인 문구를 이제 더 이상 믿고 따르지 않는다. 못난 부모 탓을 하며 그토록 혐오해왔던 (육체)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잘난 부모 덕에 남들보다 앞서 출발하여 먼저 결승점에 다다르는 아이들도 있다. 왕자가 왕자가 되고 거지가 거지가 되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를 비롯한 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왕자와 거지>는 이미 19세기에 풍자하고 있다. 중세시대를 지탱해온 순수 혈통 이데올로기가 치기 어린 소년들의 장난 앞에서 깡그리 무너져 버리지만 역설적으로 타고난 핏줄이란 관념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의미심장한 통찰을 던져준다. 한번 상상해보라. 만일 왕자와 거지가 서로 역할을 뒤바꾸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부모 탓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왕자가 왕자가 되고 거지가 거지가 되던 당시에는 가족과 교회가 그랬겠지만, 근대 이후 개인을 사회적 존재로 호명하는 역할을 담당한 기구는 단연 학교다. 누구나 신분, 인종, 성(性)에 관계없이 교육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에 맞게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믿음은 적어도 100년 동안은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왔다. 하지만 그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지금은 분명히 이데올로기 국가기구가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불안과 더불어 국가기구의 위기는 대중들을 상당한 불안과 고통으로 내몰지만, 이는 오로지 사적(私的)인 문제로 환원되어 대중들이 더욱 격한 경쟁에 뛰어들게 만든다. 분노의 화살은 교사와 학교의 실패로 돌려지며, 모순의 폭발은 봉합·지연된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야 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를 최대한 지연시키며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아예 기폭장치를 해체하고 싶을 터. 저쪽에서 폭발을 최소화하거나 무장해제하기를 기다릴지,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폭파 스위치를 누르게 될지, 문제는 이미 던져진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