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고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저녁이면 한 자루 촛불의 불꽃 아래서 기도를 했다. 더이상 진심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시편을 낭송하는 것도 습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소망들은 베트남의 무기력 속에서 지워졌다. 온갖 고난과 미셸 수사의 죽음이 그들에겐 마음의 짐이었다. 일체의 종교적 감정이 그들에겐 멀게만 느껴졌고 그들과 상관없는 일만 같았다. 도미니크와 카트린느는 자기들이 모든 이들에게서 잊혀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용하다고 여겨졌다. 농부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들이 하는 성스러운 말들은 산의 메아리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면의 공허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외롭고 지쳐 있었다.

* * *

그렇지만 두 사람은 다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헐벗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군더더기 없는 핵심만이 남았다. 그들의 노동은 건전했다. 그들은 돼지며 깡마른 가금들을 사육했다. 카트린느는 코끼리를 타는 법을 배웠다. 코끼리는 좁은 골짜기에서 보습의 날을 끌었다. 그들은 코뿔소의 순결한 이빨을 지닌 호랑이들을 발견했었다. 저녁이면 그들은 불가에서 농부들과 함께 불과 물의 혼을 불렀다. 노랫소리는 날카롭고 짧았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었다. 두 선교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발견해갔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하여 배워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숲의 정령들을 상징하는 밝은 빛 나뭇조각들을 보여주었다.

* * *

도미니크는 그녀의 안에서 자신을 잊었다. 카트린느는 자신을 그토록 멀리 데려가고 있는 그의 몸 아래서 휘청했다. 땅은 경작하기 쉬웠다. 여자는 도미니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소리없이, 그러나 점점 더 빨리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어두운 두 눈은 생명의 저 깊은 곳에 비끄러매여 있었다. 그들은 상대의 존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들은 자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숨소리 대신 대지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은 반듯이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생각이 새어나가고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망각을 택했었고 그 속에서 무한히 존재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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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님이 수첩 얘기를 꺼내셔서, 옛날 수첩들을 꺼내보았다. 내가 수첩을 가진 건 고3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전부 5권이다.

고 3의 수첩은 수험생 용이라 앞의 절반은 입시와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학습 계획, 생활 계획표, 시험 범위, 국영수 요점 정리 등. 월별 및 주간 계획표, 라고 된 빈 칸엔 일기 비슷한 내용들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다. 당시엔 일기도 꾸준히 썼는데, 뭘 또 이렇게 많이 적었는지.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가장 많이 고민을 하고 가장 많이 생각을 한 건 아마 고 3 때였던 것 같다.

그런 글 사이사이, 시가 꽤 많이 눈에 띈다. 아마 국어책이나 문학책이나 그 밖에 참고서 등에서 베낀 걸거다. 그런데, 누구 시인지, 제목이 뭔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 나는 상당한 피로감을 느꼈던 듯 하고, 시에서 내 심정인 듯 느껴지는 구절을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상당히 센서티브 했잖아.

 

3월 27일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4월 14일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5월 9일

돌이어라. 나는 여기 절정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종일을 침잠하는 돌이어라. 밀어 올려다 밀어 올려다 나만 혼자 이 꼭대기에 앉아 있게 하고 언제였을가. 바다는 저리 멀리 저리 멀리 달아나버려. 손 흔들어 손 흔들어 불러도 다시 안 올 푸른 물이기 다만 나는 귀 쭝겨 파도 소릴 아쉬워할 뿐. 눈으로만 먼 파도를 어루만진다. 오돌. 어느때나 푸른 새로 날아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 몸에 속속들이 스미면 어느때나 다시 뿜는 입김을 받아 푸른새로 파닥이려 날아오르랴.

6월 17일

하이얀 모색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속으로 파-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위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위에 솟아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9월 18일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송이 피어날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9월 28일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0월 17일

바닷가 햇빛 마른 바위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10월 24일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은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세대가 그뒤로 잠자코 흘러가도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12월 15일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도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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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08-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옛 다이어리들을 뒤적거리는데요, 가끔은 이렇게 유치하다니라고 생각했다가 가끔은 이런 일도 있었구나 추억에 빠지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것들이 모여 추억을 이루겠죠..
 
 전출처 : 바람구두 > 겹침과 스밈

 

 

 

 

 

 

 

 

 

 

 

 

 

 

 

중국, 절강에서...



BGM: Jia Peng Fang의 얼후(二胡) 연주로 "Deep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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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0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8-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자료실에 퍼다날랐어요.
얼후,라는 악기 소리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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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1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고야전시회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렸어요.
10년 전이었던가?
사무실이 그 부근에 있어 점심시간에 가끔 가고 그랬어요.
날것의 느낌이 있어 고야를 좋아해요.^^

urblue 2004-08-1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 전이면, 아마 제가 고야가 누군지도 모르던 시절이로군요.
다시 전시회를 할까나...

로드무비 2004-08-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젊다고 으시대긴...)

urblue 2004-08-2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그걸 또 그런 식으로 해석하시다니. 님은 해석의 여왕이시로군요.
 

水墨 정원 7

─우리는 늙으면

 

우리는 늙으면

저녁별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문턱에 앉아서 부는

바람도 느껴볼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매일

저녁별 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늙음 끝까지 신작로를

바라보고 창문 아래에

앉아서

저녁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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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0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04-08-2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쁘지 않은데요.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그리고 저 흑백의 얼굴이 코멘트에 떠 있으면 사진속의 입술이 달막달막 움직이는 착각에 빠집니다.인상적인 사진입니다.

비로그인 2004-09-06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묵정원 연작시 참 좋죠. 그 중에도 전 아홉 번째 <번짐>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걸 읽을 때마다 어느 소주 광고가 생각나더군요. 그 송혜교가 나오는 광고 말이죠. ^^

urblue 2004-09-0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번짐>을 젤로 좋아합니다. 반갑네요. ^^

2005-03-04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3-06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