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님이 수첩 얘기를 꺼내셔서, 옛날 수첩들을 꺼내보았다. 내가 수첩을 가진 건 고3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전부 5권이다.
고 3의 수첩은 수험생 용이라 앞의 절반은 입시와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학습 계획, 생활 계획표, 시험 범위, 국영수 요점 정리 등. 월별 및 주간 계획표, 라고 된 빈 칸엔 일기 비슷한 내용들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다. 당시엔 일기도 꾸준히 썼는데, 뭘 또 이렇게 많이 적었는지.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가장 많이 고민을 하고 가장 많이 생각을 한 건 아마 고 3 때였던 것 같다.
그런 글 사이사이, 시가 꽤 많이 눈에 띈다. 아마 국어책이나 문학책이나 그 밖에 참고서 등에서 베낀 걸거다. 그런데, 누구 시인지, 제목이 뭔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 나는 상당한 피로감을 느꼈던 듯 하고, 시에서 내 심정인 듯 느껴지는 구절을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면, 상당히 센서티브 했잖아.
3월 27일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4월 14일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5월 9일
돌이어라. 나는 여기 절정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종일을 침잠하는 돌이어라. 밀어 올려다 밀어 올려다 나만 혼자 이 꼭대기에 앉아 있게 하고 언제였을가. 바다는 저리 멀리 저리 멀리 달아나버려. 손 흔들어 손 흔들어 불러도 다시 안 올 푸른 물이기 다만 나는 귀 쭝겨 파도 소릴 아쉬워할 뿐. 눈으로만 먼 파도를 어루만진다. 오돌. 어느때나 푸른 새로 날아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 몸에 속속들이 스미면 어느때나 다시 뿜는 입김을 받아 푸른새로 파닥이려 날아오르랴.
6월 17일
하이얀 모색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속으로 파-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위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위에 솟아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9월 18일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송이 피어날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9월 28일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0월 17일
바닷가 햇빛 마른 바위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10월 24일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은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세대가 그뒤로 잠자코 흘러가도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12월 15일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도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