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토요일에 출근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였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 됐다. 할 수 없지, 뭐. 월요일은 아침부터 바쁘겠다. 하려고 애썼지만 안되는 일에는 이제 그닥 마음 졸이지 않는다. 그래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점심을 먹고 신촌의 헌책방엘 갔다. <마쪼라의 이별> <백년보다 긴 하루> <김시습 산문집>을 골라들고 서가를 둘러보다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을 발견했다. 우앗, 하며 좋아라했는데, 이런, 상권 밖에 없다. 물으니 애초에 상권만 들어왔단다. 누구냐, 책을 팔려면 짝을 맞춰 내 놓아야지, 어떡하라고. 이것도 할 수 없지. 나중에 하권을 구해보는 수 밖에. 김유택의 <보라색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로드무비님이 바람구두님에게 추천하신 책. 잠깐 앉아 훑어보니 괜찮다. 어째 외국 작가의 냄새가 난다. 오늘 건진 다섯 권에 또 흐뭇해진다.

친구집에 들렀다가 영화를 보러 갔다. 예매를 하려고 친구에게 <21그램> 볼래, <강호> 볼래 물었더니 친구가 <강호>라고 대답했었다. 영화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장학우를 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좀 심하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킥킥거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급기야 푸하하 웃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 미안해. 내가 OOO 보자고 그랬지? 이 영화 수입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 배우들 이름만 보고 수입을 결정한거냐. 유덕화, 장학우, 여문락, 진관희라는, 나름대로의 호화 캐스팅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다니. 감독이 대단한건지. 비디오로 빌려보는 것조차 말리겠다. <무간도 3>를 보고도 실망했지만, 최소한 그만큼만 만들었어도 이런 소리 안하겠다.

아구찜으로 맛있는 저녁 먹고, 옆구리 살 삐져나와 큰일이라고 떠들며 아이스크림 먹고, 친구집에서 놀다가 이제 돌아왔다. 피곤하다. 내일은 늦게까지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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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23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갔다 왔나요? ^^
토요일인데, 출근을 했군요. [김시습 산문집] 탐나는데...오늘 같이 갔더라면, 그것 가지고
둘이서 실랑이를 좀 하지 않았을까..ㅋㅋ
생각해보니 아쉽네요. 모처럼 데이트할 기회를 놓치다니...ㅜ.ㅜ
다음주는 좀 그렇고, 그 다음 주말에 헌책방 데이트 어때요?
엠씨몽한테 물어보면, 다른 분들의 생각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번개가 될 듯도 한데...
몽한테 물어봐야쥐..

저는 하루 종일 잠에 취해 비몽사몽 밥을 먹은 건지, 잠을 먹은 건지...
좀 아까는 자는 것도 지겨워서 남산 공원으로 산책하고 왔답니다.
근데, 뜨악!! 보도에 어미쥐와 새끼쥐가 죽어있는 거예요.
잠시 살펴보니, 외상은 없는 것 같던데...아무래도 뭔가를 잘 못 먹은 듯...
이상하게도 올해는 매달 이런 경험을 하게 되네요.
개와 고양이가 끔찍하게 죽어있는 거 본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으...
배고프네요. 마저 명동백작 보고, 뭘 좀 먹어야겠어요. 그러곤 [1789년의 대공포]라는 책도
마저 읽어야겠어요. ^^ Gute Nacht.(good night) 러시아어로 뭐라고 그러죠?

urblue 2004-10-24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 데이트 좋죠. ^^
다음주엔 아마 집에 다녀올 것 같고, 다다음주는 아직 계획 없으니 OK.

나한테 러시아어 물어보면 안된다구요. 안 들여다 본지가 벌써 몇년인데. 다 잊었지.
이젠 어디가서 러시아어 했다고 말도 못한다니까요. 창피해.
Спокойной ночи! (스빠꼬이너이 노취)

마냐 2004-10-2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강호 보고싶었어요. 사실. '친구'와 '인정사정 볼것 없다'에 대한 오마쥬도 궁금했구...근데 다들 평이 별로였구...블루님이 도장 쾅 찍어주시는군요...
고맙슴다. 근데..블루님...러시아어 아직 녹 안 슬은거 같아요. 스빠꼬이노이 노취~(이 말도 몇년만에 내뱉어 보는지, 원...^^)
 

 

현실의 인식, 그 지긋지긋한 꿈도
떨쳐내리라, 그리워하며 사랑하며.
─ 솔로비요프 ─

너를 예감한다. 세월은 스쳐 지나가는데 ─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의 너를 예감한다.

지평선 전체가 불타고 있다 ─ 견딜 수 없이 밝다
나는 말없이 기다린다 ─ 그리워하며 사랑하며.

지평선 전체가 불타고 있다, 이제 나타날 날이 가까이 왔다
그러나 난 두렵다: 네가 모습을 바꾸었을까봐,

결국 익숙한 자태들이 자취없어
뻔뻔스러운 의심을 불러일으킬까봐.

오, 나 슬프게도 ─ 밑으로 추락하려는가,
죽음같은 꿈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평선은 얼마나 밝은가! 빛나는 아침노을이 가까이 왔다.
허나 나는 두렵다: 네가 모습을 바꾸었을까봐.

1901. 7. 4

 

И тяжкий сон житейског сознанья
Ты отряхнёшь, тоскуя и любя.
─ Вл Соловьёв ─


Предчувствую Тебя. Года проходят мимо─
Всё в облике одном предчувствую Тебя.

Весь горизонт в огне ─ и ясен нестерпимо,
И молча жду, ─ тоскуя и любя.

Весь горизонт в огне, и близко появление,
Но страшно мне: изменишь облик Ты,

И дерзкое возбудишь подозренье,
Сменив в конце привычные черты.

О, как поду ─ и горестно, и низко,
Не одолев смертельныя мечты!

Как ясен горизонт! И лучезарность близко.
Но страшно мне: изменишь облик Ты.

 

***           ***           ***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 영원하게 하고
사물에게 ─ 모두 생명을 주고
실현되지 못한 것을 ─ 실현하고 싶다!

삶의 무거운 꿈이 나를 가위누르고
이 꿈 속에서 나 헐떡거린다 해도 ─
미래에 쾌활한 젊은이가 있어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하리니:

우울을 용서합시다 ─ 이것이 바로
그를 움직인 숨겨진 힘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 온통 선과 빛의 아이였어요
그는 ─ 온통 자유의 승리였어요!

1914. 2. 5

 

О, я хочу безумно жить:
Всё сущее ─ увековечить,
Безличное ─ вочеловечить,
Несбывшееся ─ воплотить!

Пусть душит жизни сон тяжёлый,
Пусть задыхаюсь в этом сне, ─
Быть может, юноща весёлый
В грядущем скажет обо мне:

Простим угрюмство ─ разве это
Сокрытый двигатель его?
Он весь ─ дитя добра и света,
Он весь ─ свободы торжество!

 

 

알렉산드르 블록

상뜨뻬쩨르부르끄 출생. 1906년 상뜨뻬쩨르부르끄대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후기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솔로비요프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 정감과 ‘영원의 여성’의 이상상()에 대한 로맨틱한 희구()를 노래한 첫번째 시집 《아름다운 부인에 관한 시》(1904)로부터 출발하였다. 제1차 러시아혁명(1905) 때부터 자본주의 도시에서의 인간의 비극을 보고, 데카당 유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실주의’를 탐구하였으며, 조국의 운명과 문화에 대해 깊이 사색한 끝에 귀족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은 시집 《뜻밖의 환희》(1907) 《눈[]의 가면》(1907) 《눈속의 대지()》(1908) 《서정시극()》(1908) 《조국》(1907∼1916) 《러시아》(1908) 《보복》(1910∼1921) 등에 반영되어 있다. 10월혁명 직후에 구세계의 파멸과 신세계의 탄생을 노래한 장시 《열둘》(1918)을 발표함으로써 소비에트 시문학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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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2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 만에 꺼낸 러시아 시집. 예전에 내가 이런 걸 읽었구나.

마냐 2004-10-2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주셨슴다. '야 하추 쥐찌~(뭐, 말하자면 i want to live)'로 시작하는 블록의 저 시. 강렬한 옛사랑. 아 감정과잉 모드임다. 퍼감다.

urblue 2004-10-2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О, Я хочу безумно жить: 지금 보고 있네요. 러시아어랑 같이 있는 시집. ^^

마냐 2004-10-2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bezymno..엇, 블루님...러시아어 하셨어요? (지금 보니 또 틀렸네요. bezumno ^^;;;)

urblue 2004-10-2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말하기 부끄럽지만...지금은 전혀 기억 못합니다.

마냐 2004-10-2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친 쁘리야뜨너....말하기 부끄러운 것도 오친 쁘리야뜨너..네요. ^^ 블루님...러시아어도 같이 올려주심 안될까요? ^^;;;

urblue 2004-10-2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좀 걸릴텐데, 한 번 해 보죠. ^^

플레져 2004-10-23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어는 모르지만...미친듯 살고 싶다에는 올인~!

마냐 2004-10-23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블루님. 러타로 저리 쳐주시다니...정말..^^

urblue 2004-10-2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요. ^^
 
 전출처 : 로쟈 >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2)

(11)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1928-1940). 드디어 불가코프! 그의 작품집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또 희곡들은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되기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스탈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탄압 받고 금지됐던 작가였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생전에 발표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어쨌든 <불가코프 백과사전>까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사전과 같이 나올 정도의 지명도를 그는 갖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었지만(그는 <몰리에르의 생애>란 전기도 썼고, 몰리에르가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도 썼다), 그가 뒤늦게 누리는 영광은 몰리에르에 뒤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불가코프도 제법 적지 않다. 혁명을 풍자한 <개의 심장>, <운명의 알> 등의 중편들에서 <백위군> 같은 소설, 그리고 <극장>, <위선자들의 밀교> 같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투르빈가의 나날들> 같은 대표 희곡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출간예정이라는 소문은 있다), 여러 러시아 교수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거장과 마르가리타> 또한 현재로선 품절이다. 우리에게서 불가코프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걸로 봐서 우리의 불가코프 수용에는 어떤 장벽이 있는 듯하다.

 

(12)이반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길>(1937-1945). 러시아에서는 얼마전에 이반 부닌의 새 전기가 출간됐는데(아직 구경하진 못했다),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부닌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능한 시인/작가의 한 사람이다. 부닌은 그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양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부닌은 지극히 동양적이다(특히 불교적이다). 러시아나 서구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문학이 우리에겐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나의 도식적인 이해에 의하면, 부닌은 체홉, 고리키와 함께 거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문학적 계승자의 한 사람인데, 체홉이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그리고 고리키가 민중성을 이어받았다면 부닌은 그의 종교성을 계승하고 있다.

 

내 기억에 <어두운 가로수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으며(<비밀의 나무>란 제목으로 나왔던가), 기타 그의 단편들(<사랑의 문법>으로 번역돼 있다) <마을> 같은 중편들도 번역돼 있다(그의 단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이며, <일사병>이란 단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견주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아르세니예프의 삶> 같은 자전적 대표작은 번역되지 않았다. 더불어 지적하자면, 나보코프도 그랬지만 부닌도 문학적 출발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도 번역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가능할는지  

 

(13)A. 트바르도프스키의 <바실리 테르킨>(1941-1945). 드디어 내가 처음 듣는 작품이 나왔다. 사실 트바르도프스키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962년에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을 수 있도록 한 편집장 트바르도프스키로서이다(또 다른 트바르도프스키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가 솔제니친에 맞먹을 만한 작가였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제목으로 봐선 바실리 테르킨의 일대기를 다룬 듯싶은 장편소설인데, 아마도 그가 혁명과 내전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수히흐 교수는 죽음과 전쟁, 운명, 조국에 대하여란 장제목을 달았다.

 

(14)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45-1955).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1956년에 이 작품을 해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서 1958년에 (다소간 정치적인 선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다소간 은둔적인 성격에 걸맞지 않은 문학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걸 포기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1960년에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이 작품 때문에 그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재촉한 것이다. 지바고 때문에!(지바고는 러시아어 의 고어(古語) 형용사형이다)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사실 소설로 씌어진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그런 의미에서 푸슈킨의 시로 씌어진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과 마주보고 있다), 지바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유고시 25편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참조물이 아니라 핵심이다(이걸 빼놓은 번역서들도 있었는데, 좀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말은 소설미학적인 기준에서 이 작품을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이 작품에는 어이없는 우연들이 남발되고 있다). 푸슈킨이 특이한 소설을 썼다는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특이한 시를 쓴 것이며, 러시아 소설의 전통은 그렇게 열리고 닫힌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망명작가에 의해서.

 

<닥터 지바고> 1988년쯤에야 해금되며(그 이전에는 그의 초기 시들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그맘때쯤 저명한 러시아 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편집하에 간행된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에는 빠져 있다(나는 이 전집과 <닥터 지바고>를 따로따로 샀다). 굳이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포함된 전집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생계를 위해서 옮긴 번역작품들(그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을 주로 번역했다)은 요즘 따로 출간돼 있다. 우리말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외에, <나의 누이, 나의 삶>이란 번역시집(그의 시들은 상당히 난해하지만, 좀 이해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옮겨진 그의 자전적 기록 정도(마야코프스키와의 교우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라라의 모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의 회고록 정도.

 

(15)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58-1968). <수용소군도>가 출간된 건 1972년 겨울 파리에서였고, 이 때문에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비에트로부터 망명을 강요받게 된다(그에겐 강제출국 당하거나 망명하거나의 선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 분위기를 타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출간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는 이미 (해빙은 물 건너 간) 브레즈네프의 시대였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라고 고발하는 작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수용소군도>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책이 출간된 프랑스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는데, 과거 소련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 결정타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해야 했다(상당수는 스탈린주의의 수용소 대신에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선택하며, 한편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비판하는 신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에서도 기술되어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솔제니친이 망명지로 안착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의 시골마을이었으며, 거기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연설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곧 여론의 관심밖에 놓이게 된다(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이다. 다만 그의 공산주의는 종교적 공산주의일 따름. 현대인은 신을 잊었다!는 게 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한때의 신화였던 작가였지만(한 문학작품이 한 시대의 표정이 되고, 한 시대의 좌표를 바꾼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그는 너무 뒤늦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좀 무례한 말이지만) 너무 오래 살고 있다. 몇 번 추진되던 한국방문이 무산될 정도로 건강이 썩 좋은 건 아니면서도 나름대로 장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신화와의 작별>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분량의 평전까지 출간됐는데,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화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드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망명문학으로서의) 러시아문학이 푸슈킨에서 시작해서 파스테르나크에서 끝난다고 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의) 소비에트 문학은 고리키에서 시작해서 솔제니친에서 끝난다. ,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수용소에서 끝난다. 솔제니친 이후의 소비에트 문학은 잠시 농촌문학(발렌친 라스푸친)과 일상문학(유리 트리포토프)에 의해 채워지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종말을 맞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군도>(5권이던가?)를 비롯하여 아주 많다. <암병동> <1>, <붉은 수레바퀴>(이 대작도 나오다 만 것 같다)까지가 그의 주요 장편들이라고 한다면, <마트료나의 집> 등과 같은 초기 단편들도 여럿 번역돼 있고,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라게리수용소란 뜻이다) 같은 희곡작품도 번역돼 있다(오늘 헌책코너에서 산 그의 희곡집에는 안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그는 희곡작품도 꽤 여럿 쓴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집까지. 

 

(16)B. 샬라모프의 <콜르임 이야기>(1954-1973). 샬라모프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이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지는 몰랐다. 콜르임은 수용소가 있었던 지명이고(그러니까 아마도 시베리아 어디일 것이다), 콜르임 이야기는 콜르임을 배경으로 한 연작이다. 웬만한 작품집에 들어가 있는 <콜르임 이야기>가 다 발췌인 걸로 봐서 이 연작으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사실, 샬라모프 자신이 15년간(1937-1951) 거기에서 유형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그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꼬박 20년이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되새김질하는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예의상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라모프에 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번역본들도 곧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안드레이 비토프의 <푸슈킨의 집>(1964-1971, 1978) 최근에 비토프의 2권짜리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물론 장편 <푸슈킨의 집>은 제외한 것이다(원제인 푸슈킨스키 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학연구소로 보통 푸슈킨연구소라고 부른다. 거기엔 푸슈킨의 데드마스크가 많은 육필 원고와 함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푸슈킨의 집>은 작가가 계속 버전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연도를 아직 표시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나마 작년인가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된 것인데, 현재까지는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프의 이 소설 역시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다(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이다). 그건 각종의 텍스트들이 교직되어 새로운 텍스트를 축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나보코프의 소설에서와는 달리, 진정한 문학적 유희, 텍스트의 즐거움(바르트의 용어)이 실현되고 있는 것. 물론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그것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은 푸슈킨의 집이다. 푸슈킨의 문학적 유산으로서의 러시아문학 전체가 이 소설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이거나 잠재적 인자들이다. 실제로 비토프는 나름대로의 푸슈킨 연구자이기도 하며, 푸슈킨에 관한 두 권의 책, 1825년의 푸슈킨, 1836년의 푸슈킨을 편집하기도 했다(1825년은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난 해이며, 1836년은 푸슈킨의 생애 마지막해이다. 그는 1837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물론 내가 아는 한, 비토프의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바 없다(어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수년 전에 한국 펜클럽 초청으로 방한할 뻔했으나 역시 무산됐다(그러니까 그는 아직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고 있지 않다). <푸슈킨의 집>에 대한 연구서들은 이미 러시아와 미국 등지에서 나오고 있으며, 국내에도 연구논문들이 있다. 작품도 번역돼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다.  

 

(18)바실리 슉쉰의 <성격들>(1973). 짐작에 <성격들>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슉쉰의 문학을 총괄하는 작품집인 듯하다. 또 그래야 말이 된다. 그의 문학은 그의 삶 전체로 웅변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농부 같은 (한 성격 할 것 같은) 인상의 슉쉰은 70년대 초반 소비에트 문화계의 간판이었다(우리 작가로는 딱 황석영 같은 타입이다. 황석영이 영화감독도 겸했다면).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감독으로도 유명하다), 1973년에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맡은 영화 <칼리나 크라스나야>(사전적 의미로는 빨간 까마귀밥나무란 뜻이다)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수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대학원 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 줄 몰랐다). 그건 그만큼 슉쉰이 러시아 나로드(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수히흐 교수의 장제목은 한 영혼이 아프다. 작가-예언자란 평까지 듣는 슉쉰은 러시아의 영혼이면서 한 시대의 영혼이었던 것.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얼마 전 그의 사망 30주년을 맞는 특집기사들을 보고 새삼 작품집과 영화CD 등을 사두었고, 엊그제 헌책코너에서 우연히 그의 전기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러니 알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인 것. 한국에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몇 편의 단편이 소개돼 있는 게 전부이다. 스첸카 라진의 농민반란을 소설화한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러 왔노라> 같은 대표적 장편소설은 한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을 듯하므로, 한번 기다려봄 직하다(이 작품의 번역은 오래 전에 한번 추진되었다가 무산됐던 걸로 안다. 분량 때문에). 참고로, 슉쉰을 추모하는 기고문에서 한 작가는 러시아문학에서 다섯 명의 위대한 작가를 꼽았는데,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슉쉰이 그 다섯 명이다.    

 

(19)발렌친 라스푸친의 <마쪼라의 이별>(1976)(20)유리 트리포토프의 <노인>(1978)은 한꺼번에 언급하기로 한다(막간이 너무 긴 것 같으므로).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은 농촌문학 (도시의) 일상문학이었는데, 라스푸친과 트리포노프는 각각 이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지명도에 있어서는 라스푸친이 한 수 위인데(제정 말기의 괴승 라스푸친과 성이 같지만 무관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중학교(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들이 다수 수록돼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라스푸친>이란 책도 나올 정도이다. <마쪼라의 이별>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소련동구문학전집>), 댐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농촌마을 사람들의 얘기이다.

 

라스푸친은 농촌문학에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 걸로 평가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유사한 지킴 신앙 등이 다뤄지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게 읽힌다. 라스푸친의 작품으로는 <마쪼라의 이별> 외에도, <마리아를 위하여>(원제는 마리아를 위한 돈), <마지막 기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트리포노프의 작품으론 <긴 이별>, <또 다른 삶> 등이 번역돼 있다(<소련동구문학전집>에 실려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페테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문학, 혹은 포스트-소비에트의 문학은 선정에서 빠져 있다. 그건 걸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음 세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20명의 작가와 작품 목록에 (국내에서 다소 과대평가된) 친기스 아이트마토프(<하얀배>, <백년보다 긴 하루>, <처형대> 등이 번역돼 있다)가 빠진 것이 반갑고, 블라지미르 보이노비치(<병사 이반 촌킨의 모험>, <2040> 등이 대표작이다)가 빠진 것이 아쉽다. 또 하지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선정이 편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04. 10. 20.

 

P.S.1. 대략 본문에서 나열한 목록을 볼 때, 시의 경우가 제외되긴 했지만,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결코 다른 나라에 뒤질 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19세기와 비교해 보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인데(이건 1910-20년대 시인들의 목록이 추가돼야 카바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문학사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19세기를 금세기라고 하고 20세기를 은세기라고 한다. 그런 논리에 따르자면, 21세기는 동세기가 된다. 아직은 거의 출발선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세기라고 해서 (경쟁이) 널널한 건 아니다. 무릇 작가라면 상당한 재능과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무장하고 목숨을 걸고 써야 동세기 문학사에라도 이름을 걸 수 있을까 말까이다(물론 내 생애에는 그 문학사의 종결을 보지 못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근대문학 100년을 갓 넘긴 한국의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축복 받은 편이다. 적어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상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보코프나 불가코프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일까?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적당한 재능과 적당한 문제의식으로 무장하고 팔릴 만한 것에만, 혹은 사소한 것에만 목숨 걸며 써대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한국문학의 황금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언제? 언제였단 말인가?..

 

P.S.2. 지난 통신문 (46), (47)에도 이런저런 오류/오타들이 있었는데, 중요한 내용상의 오류들만 교정한다. 먼저, (46)에서 푸슈킨 동상에 새겨진 <기념비>의 시구가 1연과 3연이라고 했는데, 3연과 4연이다. 3연은 확실했고 나머지는 미심쩍었는데(그래서 내 기억이 맞다면이란 단서를 달았었다) 지난주에 근처에 간 김에 확인해봤다. 동상의 받침대 왼편에 새겨진 것이 3, 나의 명성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 가리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리라,/ 자랑스러운 슬라브족의 자손과 핀족, 지금은 야만적인/ 퉁구스족, 그리고 초원의 친구인 칼미크족까지.이고, 오른편에 새겨진 게 4,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내가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우고,/ 이 가혹한 시대에 자유를 찬양하고,/ 쓰러진 자들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므로.이다  

그리고 통신문 (47)에서 노벨문학상 후보가 될 만한 동시대 러시아 작가들을 거명하면서, 드미트리 피로고프, 레프 루빈슈타인 등의 개념주의 시인/작가들이라고 했는데, 피로고프가 아니라 프리고프이다. 피로고프는 고골의 <넵스키> 거리에 나오는 속물 장교로 그 이름의 어원은 피로기(고기만두란 뜻)이다. 가장 저명한 개념주의 시인을 고기만두로 만들 뻔했는데, (음성학적으로) 두 이름이 헷갈릴 만하지만 그건 실례라고 해야겠다. 참고로, 프리고프는 수년 전에 방한해서 문학강연을 한바 있는데, 마치 무슨 주술사처럼 신들린 듯한 시낭송을 겸했었다(하지만, 무당은 아니고 상당히 똑똑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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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1)

몇 달 전 통신문에서 잠깐 언급한바 있는데, 막간을 이용해서(이래저래 무거운 머리도 비울 겸)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을 꼽아본다. 선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대학의 이고르 수히흐 교수가 한 것인다. 그는 체홉 전공자로서, <체홉 시학의 제문제>(1987, 박사학위논문)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시간, 장소, 운명>(1995)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학자이다(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 망명했던 작가 도블라토프는 이미 클래식 작가의 리스트에 올라 있고, 4권짜리 전집과 함께 대부분의 작품이 문고본으로 나와있다. 그 자신은 작가 체홉을 가장 닮고 싶어했다고).

 

러시아의 체홉 연구에 있어서는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히는 수히흐 교수는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출판사 아즈부카에서 나오는 문고본 클래식의 편찬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이 문고본의 체홉 등은 그가 편집하고 해설을 붙였다). 그는 올 초에 <20세기의 책 20>(544/ 5,000부 발행)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말 그대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 20권을 선정하고 각 작품에 대한 자신의 품평을 곁들인 에세이이다. 물론 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는 선정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듯하며, 따라서 우리가 외국문학으로서의 20세기 러시아문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하다(이와 다르게 참고할 만한 것은 이곳의 문학 교과서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로선 그의 목록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와 작품이 없지 않으며, 절반 정도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다소간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극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목록에 없는 작품들을 읽었다고 변명하는 수밖에). 20권의 목록을 차례로 나열하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국내 소개현황도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러시아문학사전>을 현재 안 갖고 있기 때문에 작가들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달지 못하며, 그저 떠오르는 몇 가지 인상만을 적는 식이 되겠지만).  

 

(1)안톤 체홉의 <벚꽃동산>(1903). 체홉 전공자답게 체홉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을 제일 처음으로 꼽았다. 그리고 <벚꽃동산> 20권 가운데 유일하게 드라마 작품이기도 하다. 나머지 19권의 작품들은 전부 장편소설이거나 단편소설집들이다(그러니까 이 20에 시는 빠져 있다). 사실, <벚꽃동산> 20세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다(정확하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다). 물론 <벚꽃동산>은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간혹 <벚나무동산>으로 번역/공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작의 제목이 벚꽃이나 벚나무 둘 다 의미하기 때문에 오역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벚꽃동산>이라고 옮겨야 한다. <벚나무동산>이라고 옮기는 건 미적 가치보다는 경제적/실용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로파힌으로 볼 경우에나 유력한 번역이다(그건 독창적인 해석이지만, 상식적이지는 않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라예프스카야(=귀족계급)의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그걸 고작 벚나무동산으로 간주하는 로파힌(=상인계급)에게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동산을 별장지로 개발하고자 하며, 4막의 배음(背音)으로 이 벚나무들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로, 작가 체홉은 객관적인 관찰자였지만 인간 체홉은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다.   

 

곁다리로 말하자면, 체홉의 (성공한) 첫 장막극인 <갈매기>는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음으로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어제 날짜 <문학신문>의 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데, <갈매기>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물론 체홉 원작의 <갈매기>가 있고, 이걸 비틀어서 트레플료프가 (체홉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에 실패하지만, 나중에 누군가에게 타살 당한 걸로 이야기를 다시 쓴 보리스 아쿠닌의 희곡 <갈매기>(2001)가 있다. 주로 탐정소설을 쓰는 아쿠닌은 드물게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동시대 작가이다(그의 작품들은 연극으로 공연될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오페레타 버전의 <갈매기>가 있으며, 이건 알렌산드르 주르빈의 작품이다. 그는 1990년부터 12년간 미국 뉴욕에서 살다가 왔으며(그러니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먼저 공연된 그의 <갈매기>는 이번 시즌에 러시아에서 초연된다. 이 세 <갈매기>를 나란히 무대에 올리는 곳은 극단 <슈꼴라 사브레멘노이 삐에스이>(동시대 희곡학교란 뜻)이며, 연출자는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스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하여간에 이번 시즌 안에). 안톤 팔르이치(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을 그렇게도 줄여 부른다)가 당신의 작품을 본다면, 이란 질문에 주르빈은 이렇게 말한다. 아주 만족할 겁니다!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1906-1907). 물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는 빠져나간 듯하지만,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평가 또한 예전에 못 미치지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란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란 뜻이어야 한다(때문에 <어머니> 1980년대 우리의 대학가에서 필독서였다. 대학가 축제 때면 <파업전야>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당시의 문화였고).

 

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품이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개인적으론, 어떤 작품에 들어맞는 시대/시점이 있는 것이지 시대를 넘어선 작품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닌 이상. 그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베스트로 꼽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당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너무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어머니>도식적이었던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며, 우리의 80년대는 도식적인 시대였다).

 

한 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정식으로 공포되는 것은 1934년이다)의 효시로도 평가되는 작품이지만, <어머니>에는 종교성도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수히흐 교수가 <어머니>에 대한 장의 제목을 마르크스와 성모 사이라고 붙인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새로운 시대의 복음서였다). 그와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 고리키의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이었다(그에게 인간은 언제나 대문자 인간이었는바, 그는 인간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의 최대치는 그가 쓴 드라마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밑바닥에서>(1902)에서 선언된다. 체홉의 섬세한 드라마들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리키의 이 드라마에는(특히 4) (유머 대신에) 박력과 (페이소스 대신에) 에너지가 넘친다. 해서, 나는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벚꽃동산이 아닌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고리키는 국내에 꽤 소개돼 있는 편이다. <어머니>만 해도 최소 2종의 번역서가 있다. <밑바닥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인가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번역/공연돼 온 걸로 안다(작품의 배경은 빈민굴이다). 고리키의 자전 3부작(<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부터 미완의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까지 어지간한 고리키의 작품들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물론 30여권에 이르는 그의 러시아어 전집에 비한다면 약소한 것이겠지만. 참고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고리키의 본명은 페슈코프이며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쓰라린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막심맥시멈이란 뜻이고. 해서 막심 고리키그토록 쓰라린이란 뜻이 된다. 젊은 시절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던 페슈코프의 삶이 바로 그토록 쓰라린 삶이었으며, 그는 권총자살까지 시도한바 있다(폐에 구멍이 뚫렸지만, 다행히 살아난다).  

 

고리키의 문학적 삶은 레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리키는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대표한다). 레닌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시대의 고리키는 사회주의 작가로서라기보다는 문학적 전통의 보호자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소련문학의 얼굴 마담 역과 작가들의 후견인 역이었다. 스탈린 시대 숙청 리스트에 올랐던 작가들 가운데 여럿이 그의 구명(救命) 운동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명은 연장할 수가 없었는데, 한편으로 그의 죽음(1936)에는 스탈린에 의한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었다.

 

참고로, 올해 러시아에서 나온 고리키 연구서는 고리키연구소(=세계문학연구소)에서 출간한, 젊은 연구자의 <고리키: 새로운 시선>(264)과 지난 2002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개최됐던 국제학술회의의 발표논문들을 모은 <막심 고리키와 20세기 문학의 모색>(669)이 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볼가강변의 항구 도시인데(고리키 초기 단편들의 주된 배경이다), 고리키 사후에 고리키시로 개명되었던 곳이다. 한데, 사회주의 몰락 이후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듯이, 니즈니 노브고로드도 고리키란 이름을 벗겨냈다(그래도 학술대회는 거기서 하는 모양이다). 레닌과 고리키는 그런 사후의 운명까지도 나눠 갖고 있다.  

 

(3)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1-1913). 나보코프가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소설에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이어서 나보코프가 꼽는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산문작가로서 벨르이는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의 최대 작가이며, <페테르부르크>는 그의 대표작이다(더불어 그는 고골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를 갖고 있다).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문학적/문화적 신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거쳐서 완결되는 작품이 또한 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도록 하겠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물론 영역은 돼 있다), 조만간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시적이고 장식적인 그의 문체가 얼마만큼 우리말로 옮겨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벨르이의 소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건 <은빛 비둘기>(3문학사)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러시아문학에서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에 대해서는(이전에 나도 짤막한 기고문을 쓴 적이 있다) 블라지미르 토포로프 교수의 연구가 독보적이다(그의 소개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이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러시아문학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616)란 책이 페테르부르크 30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된바 있다(물론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도 다루어진다). 더불어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필독서는 솔로몬 볼코프가 쓴 <상트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이다. 원래 영어로 먼저 씌어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이 지난 여름에 출간됐다. 볼코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술가로 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과 함께 역시 지난 여름에 나온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본래 음악 전공자였다).

 

(4)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1920). 자먀찐(혹은 자먀틴)으로도 읽히는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흔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원조(元祖)가 되는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멋진 신세계>와 나란히 묶은 러시아어본도 있다). 내전의 와중이던 1920년에 이미 혁명의 불행한 종국을 예견하고 있는 이 작품은 29세기 단일제국이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유토피아, 즉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극단을 예시해 보인다. 같은 러시아문학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히는 작품(수정궁 비판과 2*2=4란 테마). 자먀친은 다른 단편들과 함께 에세이들도 남기고 있지만(단편 두어 편이 우리말로 더 번역돼 있다), 역시나 기억되는 건 <우리들>의 작가로서이다. 우리말로는 두 차례(중앙일보사, 열린책들) 출간된바 있지만, 지금은 모두 품절된 걸로 보인다. 몇 년 전에 개최되었던, 자먀친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보니까 한국에서의 자먀친이란 발표문도 실려 있었는데, 석사학위 논문까지 총동원됐지만 (당연하게도) 몇 건 되지 않았다.

 

(5)이삭 바벨의 <기병대>(1923-1925). 바벨은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오뎃사(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도시) 출신의 유태계 작가로서 <기병대>는 내전(1918-1920) 시기를 다룬 연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이 연작의 화자가 내전에 참전한 유태계 지식인이다). 우리말로는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으며, 조만간 그의 선집이 다시 나오는 걸로 안다.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베진초원>의 시나리오를 썼던가?),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테마와 문체를 갖고 있다. 다른 연작 <오뎃사 이야기>의 경우(오뎃사 마피아 이야기쯤 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나리오도 따로 썼던 것 같다. 그의 문학세계는 2권짜리 전집에 다 수록될 만큼 간명하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좀 두꺼운 한 권에 다 정리되는 자먀친, 그리고 같은 오뎃사 출신의 유리 올레샤가 있다). 우리말 선집이 출간된다면, 좀더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A. 파제예프의 <궤멸>(1925-1926). 역시 내전 시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바벨의 <기병대>처럼 좀 삐딱한 시각의 작품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자인 수히흐 교수가 아마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궤멸>을 꼽은 듯하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궤멸>(예문출판사)은 아주 오래 전, 내가 대학 2학년 때인가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지금은 당연히 품절된 책이다. 작가 파제예프는 역시나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바벨과는 달리 소위 메인 스트림에 속해 있던 작가이며, 작가동맹의 의장인가 부의장을 역임한 문학권력자였다.

 

(7)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1926-1929). 요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연출가 레프 도진의 레퍼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도 재발견된 작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다(그러니까 러시아에서도 소개/해금된 건 내가 알기에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작가로 미하일 불가코프와 비교되기도 하는 플라토노프이지만, <체벤구르> <거장과 마르가리타>만큼 폭넓게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출판되는 걸 보아도 그렇고, 공연되는 걸 보아도 그렇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역시 우리말로 번역중이라는 풍문은 있다), 이 작가의 몇몇 단편들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돼 있는바 참조해 볼 수 있다(책세상에서 단편집이 나와 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포투단강>이란 단편. 철도노동자 출신의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히려 소비에트 권력층에 부담을 주었던 작가였으며(스탈린이 싫어했다던가), 한편으론 작품의 매우 형이상학적인/유토피아적인 주제들 때문에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린다.       

 

(8)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적인 이야기들>(1923-1930). 조셴코 혹은 조시첸코로 표기될 수 있는데,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단편모음집 이름이고, 장편소설(roman)을 쓰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굳이 어떤 한 작품을 거명하기는 어렵다. 플라토노프가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조셴코는 20세기의 고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말로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정식화하자면, <조셴코=고골+체홉>이다(이 세 작가를 사소한 것들의 시학으로 묶어서 다룬 연구서도 있다). 나는 단편 몇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되어도 좋은 작가이다. 거꾸로 말하면, 조셴코의 단편들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건 미스터리라 할 만하다.   

 

(9)블라지미르 나보코프의 <재능>(1937-1938). <재능> 혹은 <선물>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시절은 마감하는 장편소설이다(러시아어 다르Dar재능이란 뜻과 선물이란 뜻 모두를 갖고 있다. Gift란 영어 단어가 그렇듯이). 주인공이 시인으로서 성장해가는 자기발견적 이야기이면서 나보코프가 러시아문학의 전통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으로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시절을 마감하고 영어로 언어를 바꿔서 작품을 쓴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이다(원제는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이며,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전에 감상문을 쓴바 있다). 나보코프에 대해서는 작품을 읽지 않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선 간단히 줄이도록 한다.

 

우리에겐 <롤리타>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과 에드리안 라인에 의해 두 번 영화화됐다. 영어로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롤리타>를 비교하는 사전까지 나와있고), 그리고 간혹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계보에 속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그는 언어를 다루는 작가적 재능에 있어서 조이스 정도를 질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이스는 러시아어로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적어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작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텍스트의 유희/게임을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면 말이다. 나보코프의 문학세계는 진정으로 신적인 작가 나보코프에 의해서 자신을 작가로 착각하는 주인공들이 징벌받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대단히 유희적이지만, 포스트모던적 유희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까지 나온 나보코프의 전기로 가장 방대하며 탁월한 것은 브라이언 보이드의 영어본이다. 그는 나보코프의 삶과 문학을 러시아 시절미국 시절로 구분하여 두 권의 책으로 상술했는데, 얼마 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나왔다(여기서의 평가도 최고의 전기라는 것이다). 두툼한 양장본 2권의 가격이 4만원 안팎(나는 영어책을 복사했었다). 나보코프 애호가나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소설 가운데는 <마셴카>(<첫사랑>으로 번역됨), <루진의 방어>(단행본으론 나오지 않고 한 문예지에 소개됐었다) 등이 우리말로는 번역돼 있는데, <재능> 이외에도 <절망>, <단두대로의 초대> 등이 모두 번역될 만하다. 하지만, 저작권이 까다로운 작가이기 때문에(물론 번역도 까다롭다) 정말로 번역될지는 미심쩍다. 영어소설 가운데는 <롤리타> 외에도 <어둠 속의 웃음소리>(언젠가 오래 전에 TV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바 있다. <창밖엔 태양이 빛났다>란 제목이었던가. 기억에, 황인뢰 PD의 작품이었다), <투명한 물체들>, <, , >, <창백한 불꽃>, <아다> 등이 번역돼 있다. 전문가 수준이었던 그의 나비수집에 대한 얇은 책도 한 권 번역돼 나온바 있고. 물론 나보코프에 대한 학위논문들은 상당수에 이르며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도 있다.

 

러시아에는 물론 각종의 너무 많은 나보코프가 있다. 2개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돼 있다. 그 중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번역/주석(이 작품에 대한 주석으로는 러시아의 기호학자/문학연구자 유리 로트만의 것과 쌍벽을 이룬다)과 함께, 러시아어로는 3권으로 나온 문학강의가 기록해 둘 만하다(그는 <롤리타>의 인세 덕분에 팔자가 피기 전까지는 코넬대학 등지에서 문학선생 노릇을 했다. 미국 작가 토마스 핀천이 그의 강의를 들은바 있다). 3권은 각각 <러시아문학강의>, <서구문학강의>, <돈키호테에 대한 강의>이다. 나는 이 강의들도 우리말로 번역되길 바라지만, 가능할는지

 

(10)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1925-1940). 요즘은 대학에서의 러시아문학사 전공강의에서도 빠지는 수가 많지만(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교되기도 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당연히 영화화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 TV에서 시리즈로 나왔다). 나는 학부에서 20세기 문학사 강의를 들을 때 읽었는데, 우리말로는 7권으로 번역돼 나와 있었다(러시아어로는 보통 2). 지금은 품절이지만. 한 권짜리 만화로도 나와 있었고(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때 만화를 본 게 도움이 되었다). 수히흐 교수는 <고요한 돈강>을 다룬 장의 제목을 카자크 햄릿의 오딧세이라고 붙였는데,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 햄릿의 이름은 물론 주인공 그레고리이다.

 

숄로호프의 다른 작품으론 <인간의 운명>, <돈강 이야기> 등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 나는 읽지 않았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문학권력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요한 돈강>을 정말로 그가 썼는지에 대한 의혹들도 그래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반 부닌에 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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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에레혼 > 체 게바라의 사진 한 장

 

 

 

 

 

 

 

 

 

 

 

 

 

A young Korean woman puts the Major’s dancing skill to test. Pyongyang, December 1960

 

우연히 이 사진 한 장을 만났다.

내가 아직 이세상에 오기 전, 그 사내, 체 게바라가 평양을 방문한 한 때의 모습.....

그는 어리고 여린 조선 처자의 전통 춤사위 한 자락을 따라하며 활짝 웃고 있다.

 

몇 달 전 서점을 하는 절친한 벗이 서점 광고 카피(라디오 광고)를 부탁한 일이 있다

몇 가지 안 중에서 낙착된 것은 이런 문구.......

'체 게바라'를 기억하시나요?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보르헤스'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은 꿈꾸는 것을 가르쳐 주는 진짜 스승" 이라구요
내 인생의 꿈을 가꾸기 위해 오늘 나는 책방으로 갑니다

내 인생의 책방-- * * 문고

 

그러나, 이 광고 카피는 광고 사전 심의에 걸리고 말았다. '부적절한 용어 사용'이라는 것이 그 사유였다.

'리얼리스트'란 단어가 문제의 단어였다. 부적절하다니, 무엇에...? 

1960년 평양을 방문했던 체 게바라, "직관으로는 절망해도 이성으로 낙관하라!"던 체 게바라....

그 후 반 세기가 흘렀어도 우리 사회의 걱정 근심 많은 숱한 규율과 심의는  '체 게바라'를, '리얼리스트의 희망'을 부적절하다고 판단한다.  

 

 

솔레다드 브라보의 "그림자들(Sombr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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