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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 상 ㅣ 밀리언셀러 클럽 26
세르게이 루키야넨코 지음, 이수연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모스크바를 무대로 마법사와 변신술사 등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다른 존재'들이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 대결을 벌인다.(알라딘 책 소개)" 모스크바를 무대로 한 '오컬트 스릴러'라. 현대 러시아 대중소설만 해도 자주 만나기 어렵다. 게다가 러시아 판타지라니. 제법 구미가 당긴다. 지난 세기의 런던이나 비엔나, 아니면 현대의 뉴욕을 빼놓고 나면 이 겨울 초입에 모스크바만큼 도시괴담에 어울릴만한 도시가 또 있겠는가? 사실 지금까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가 별로 없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물론 내가 모르는 것 뿐일 수도 있다).
『나이트 워치』는 영하 20도의 겨울 저녁 무렵 바람이 스산한 지하철역 입구에서 시작된다. 에스컬레이터와 CD플레이어 같은 소품이 시대배경을 알려주는가 싶더니(한국산 컵라면과 전화기, 그리고 처용탈 같은 소품도 나온다), 몇 장 넘기지 않아 흡혈귀가 등장한다. 골목 하나 잘못 접어드는 순간 현실의 이면이 눈 앞에 드러난다. 일상의 바로 한 발짝 곁에, 아니 자기 자신의 그림자 저편에 맞닿아있는 이면의 차원인 어스름의 세계. 바로 이 어스름의 세계를 통해 신흥 졸부와 마피아의 도시인 현실의 모스크바는 마법사와 마녀, 흡혈귀와 변신자 등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는 도시인 소설 속의 모스크바로 펼쳐지는 것이다.
어스름의 세계란 무엇인가? 『나이트 워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세계에서 나온 또 다른 세계이다. 기원은 이렇다. 선사시대 어느 때였을 것이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은 두 샤먼이, 어쩌면 환각제의 도움의 받았을지도 모를 트랜스 상태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동굴 천장까지 길어지는 것을 본 순간, 자신의 그림자 저편으로 한 걸음 내밀면서 처음 인간은 어스름의 세계를 발견했다. 어스름의 세계는 인간을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화시켰고, 이들은 각각 빛의 존재와 어둠의 존재로 갈라져서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세력은 오래 전 인간 세계와 '다른 존재'의 세계가 공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각기 상대를 감시하기 위해 야간경비대(나이트 워치)와 주간경비대(데이 워치)를 만들었다. 여기서 빛과 어둠은 단순한 선과 악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력이다. 신과 악마 혹은 구원과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세계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이면세계인 어스름에서 살아가야 하는 두 종족이 각자의 본성과 가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인간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존재'는 빛이 될 수도 어둠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어느 정도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꽤 흥미로운 설정이다. 우선 이 소설은 판타지 장르 문학에 속하지만, 잘 쓴 대중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현대 모스크바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요한 단서는 "불특정 세대". "60년대를 겪은 부모세대가 길러낸" 이 아이들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으나, 성년이 되고 보니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살게 된 세대이다. 부모들과 같은 신념의 기억도, 다음 세대와 같은 자유의 가벼움도 아닌 일종의 끼인 세대의 혼란이랄까. 어스름의 세계는 그런 혼란에 대한 판타지적인 알레고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빛과 어둠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유토피아주의와 반유토피아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건 어스름의 세계라는 설정 자체다. 그 옛날 인간이 추위와 배고픔과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숨긴 동굴에서 모닥불에 비친 그림자에서 생겨난 세계.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고양시키지만, 그 결과는 빛일 수도 어둠일 수도 있는 세계. 인간 세계에서 비롯되었고, 인간 세계에 기생하는 세계. 낮 꿈인 동시에 밤의 악몽인 어스름은 인간의 바람이자 원망이며, 최초에 소망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무의식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바로 이면에 맞닿아있어서, 불 꺼진 방 침대 밑 어두침침한 구석이나, 그믐달밤 골목길 가로등 뒤편의 어둠이 바로 그 곳일 수도 있는 세계 말이다.
『나이트 워치』는 기본적으로 잘 쓴 장르소설이다. 700 여쪽 가량의 두툼한 분량이 단숨에 읽힌다. 인물과 설정도 흥미롭고 탄탄한 편이다. 아직은 늦가을이지만, 올 겨울 밤이 다 지나가기 전에 『데이 워치』, 『더스크 워치』로 이어지는 '워치 3부작'의 나머지 번역을 만나 볼 수 있다면 꽤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