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권의 "안내서에 대한 안내"를 보면, 이 책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라디오 방송용 대본, 책, 오디오 북, 시나리오, 다시 책 등을 낼 때마다 더글라스 애덤스는 기존의 이야기를 축약하거나 비틀거나 완전히 다시 쓰거나 하는 식으로 전혀 새로운 내용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따라서 작가가 시나리오를 직접 쓴 영화가 기왕에 나와 있는 책과는 또 다른, 새로운 버전의 <안내서>가 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도 소설과 비교하지 말고 영화를 영화로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게다가 이건 '우주적 농담'이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어디 그런가. 그냥 하는 소리다. ㅎㅎ)
영화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빈의 생긴 모습이 무진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 우주를 다 이해하는 두뇌와 진짜 사람 성격(Genuine People Personalities)을 가졌지만 두뇌를 쓸 데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는 시니컬하고 불쌍한 마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뚱뚱한 것이다. 둥글둥글, 이건 뭐 귀여운 캐릭터 인형 같잖아. 그런데, 극장에서 마빈이 등장한 순간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었다. 이유는 마빈의 목소리 때문. 러브 액츄얼리에서 바람피던 사장 아저씨, 해리 포터의 스네이프 교수 역을 맡았던 배우 앨런 릭먼의 목소리가 귀엽게 생긴 마빈의 캐릭터와 결합하니 한결 시니컬한 느낌을 준다. 와우, 멋져 마빈!

이 아저씨 말고도 반가운 얼굴들을 또 볼 수 있다. '하얀 손수건'을 메시아로 섬기면서 절대 코를 풀지 않는 종교의 교주로 등장하는 존 말코비치와 행성 건축가 슬라티바트패스트 역의 빌 나이히. 존 말코비치는 짧은 등장 시간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선보이고, 빌 나이히는 러브 액츄얼리에서처럼 느물느물하지는 않으나 그냥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새로운 버전이라 할 만한 영화에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로맨스'다. 영화에서 남녀의 로맨스가 빠지면 안되는 걸까. 이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SF에서조차! 이러고 나면 '이 영화는 농담이야' 라고 앞에서 했던 얘기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 버린다. 역시 생쥐들의 의견이 옳다. 삶과 우주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 질문이 "그녀는 과연 내 짝일까 Is she the one?"라니. 웃기네!
어쨌거나 이 영화가 다른 곳도 아닌 필름 포럼에서 단관 개봉한 건 말도 안되는 처사다. 요즘에 동막골과 박수 외에 별다른 영화도 없는데 개봉관을 전혀 못 잡다니!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SF도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끝내려고 보니 주인공들 얼굴이 없어서, 사진 하나 더. 우주에서 세 번째로 엉터리같은 문학을 자랑하는 보곤족의 캐릭터도 잘 살아 있다. 저 얼굴에도 표정이 드러난다는 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