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에서 발명품이 수용되는데 미치는 요인들 中
타이핑된 문서라면 거의 다 그렇듯이 이 책도 역시 ‘QWERTY 자판’─윗줄 왼쪽의 여섯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타이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같은 자판 배열은 1873년에 역공학(逆工學)의 산물로 태어났다. 즉 온갖 수단을 다 발휘하여 타이핑 속도를 최대한 늦추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들을 자판의 각 줄에 두루 흩어 놓았고 주로 왼쪽으로 몰아 놓았다(이렇게 되면 오른손잡이들이 서투른 왼손을 쓸 수밖에 없음). 이렇게 일견 비생산적인 듯한 자판을 설계한 이유는, 1873년 당시의 타자기는 인접한 글자들을 연달아 빠르게 치면 글쇠들이 엉켜버렸으므로 제조업자들이 타자수들의 타이핑 속도를 늦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타자기가 개선되어 이 엉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1932년에 능률적으로 다시 배열된 자판을 시험해 본 결과 타이핑 속도는 두 배나 빨라지고 타이핑에 드는 힘은 95%나 감소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QWERTY 자판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뒤였다. 그 동안 QWERTY 자판을 사용하던 수억의 타자수, 타자 교사, 타자기와 컴퓨터 제조업자 및 판매원 등의 기득권 때문에 그로부터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판의 능률을 추구하는 움직임들은 계속 좌절당하고 있는 것이다.
QWERTY 자판에 대한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경우이면서도 경제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결과가 빚어지는 일도 많았다. 가령 트랜지스터는 원래 미국에서 발명되고 특허까지 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일본과의 국제 수지가 피해를 입을 정도로 트랜지스터화된 전자 소비자 제품의 세계 시장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 당시 미국의 전자 소비자 제품 업계는 한창 진공관 모델을 양산하고 있었으므로 자기들이 만든 제품과 경쟁하게 되는 것을 꺼렸고 그때 소니사가 웨스턴 일렉트릭사로부터 트랜지스터의 제조 허가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독일의 도시들이 도로의 조명을 전기로 바꾼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왜 영국의 도시들은 1920년대까지 가스를 사용하고 있었을까? 왜냐하면 영국의 각 시 당국이 가스 조명에 이미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그것과 경쟁하는 전기 조명 회사들을 규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