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인간,이라는 말은 그렇게라도 말해야겠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음에도 더위먹었냐,는 반응까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어울리지 않는겐가. 흠. 그럼 나는 어떤 인간인가 생각하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내가 원한 진로가 뭐였냐하는데까지 기억이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3학년 봄, 느닷없이 과기고(지금은 과학고라든가)엘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수학을 제일 좋아했고, 과학도 그럭저럭 좋아했으니 난 충분히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만, 역시 세상은 만만한게 아니라 시험에 떨어졌다. 그렇지, 고작 몇 개월 공부 더 한다고 쉽게 갈 수 있는데면 그게 과기고였겠어.
하여간, 그러고나서 고 1 때는 수학과 진학이 목표였다. 다른 데는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난 수학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과기고에 떨어진 것도 아쉬웠고, 여전히 수학은 가장 자신있고 좋아하는 과목이었으니까.
1학년 겨울 문과/이과를 나눌 때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방과엘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유랄 것도 없다. 그냥 머리 속에 '신방과'가 각인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니 이과가 아닌 문과 선택. 그러고서 고 3 때까지 내내 신방과 목표. 논리적이고 싶었고 비판적이고 싶었으나, 그저 약간 시니컬 정도.
고 3 가을, 원서 쓰기 한달 전, 이번에는 또 뜬금없이 '문학'을 해야한다는 의식이 '신방과'를 대체했다. OO대 국문과,가 아니면 안된다,는 알 수 없는 고집. 그렇지만 성적은 모자랐고, 시간은 한 달밖에 없었고, 내가 무슨 천재라고 한 달 안에 그만큼 점수를 올릴 수도 없었으니, 당연히 다른 데로 원서를 넣어야지 어쩌겠어.
담임은 같은 대학의 국교과를 권했다. 싫어요. 그럼 XX대 국문과. 싫어요. 국문과는, OO대가 아니면 무조건 싫었다. 대학을 결정하고 과를 고르기 시작했는데, 영어는 원래 싫어하고, 독어는 3년내 담임이었던 독어 선생 때문에 싫고, 불어는 너무 흔하고, 일어는 마음에 안들고, 중국어와 스페인어는 지나치게 낯설고, 그리하여 남은게 러시아어,라기보다는 노어노문학이었다. 그나마 도스또예프스끼, 똘스또이, 뚜르게네프, 뿌쉬낀, 고리끼, 체르니셰프스끼, 오스뜨로프스끼 등 읽은 작가가 좀 있으니까.
대학 공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원체 게을러서 어학은 별로 늘지 않았지만 책 읽고 작가에 대해 알아가는건 재미있었으니까. 대학원에 진학해서 좀 더 공부하겠다,고 내내 생각했는데, 4학년이나 되어서야 알았다. 내가 공부랑 전혀 친하지 않다는걸.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제법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기에 난 내가 학구적인 인간인 줄 알았던 거다. 그런데 그건 그저 암기하고 시험보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뿐이었다. 대학 혹은 대학원에서의 공부란 건, 그래, 나랑은 완전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깨끗이 포기하고 직장 생활 시작. 한때는 꽤나 열심히 일하면서 MBA도 하리라, 일로 성공하리라 마음먹었지만, 몇 년 지나다보니 이렇게 아등바등해서 성공하면 뭐하겠나 싶은게, 차라리 한살이라도 젊을 때 실컷 놀자,가 모토가 되어버렸다.
이러고보니 역시 문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꽤나 즉흥적인 인간이로군. 포기도 빠르고, 포기한건 돌아보지도 않고. 흠. 이건, 생각없는 인간이라고 해야하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