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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ㅣ 그랜드 펜윅 시리즈 1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그랜드 펜윅 공국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랜드 펜윅 공국이 우리나라에 알려질 기회는 거의,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랜드 펜윅 공국은 프랑스 남부와 알프스 북부의 경계에 위치한, 길이 8km 폭 5km(‘강서구’ 정도의 크기다)의 작은 독립국이다. 14세기에 건국된 이래 대개 자급자족의 경제를 유지해왔으며, 세계 최고의 와인을 소량 생산해 수출하는 것으로 일부 필요한 물품을 충당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인구가 4,000명에서 무려 6,000명으로 급증하여 자급자족은커녕 와인 수출로도 먹고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에 23세의 젊은 군주 글로리아나 12세와 10명으로 구성된 의회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이럴 때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차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에 누가, 뭘 보고 차관을 제공하겠는가. 이들은 공산당을 만들기로 한다. 공산당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 미국은 두말 않고 돈을 빌려줄 테니까. 그렇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도 공산당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은? 전쟁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그랜드 펜윅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패전국에게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여 패전국이 경제/군사적으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도대체 그런 짓을 왜? 글쎄,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다지만, 어쨌거나 차관만 받으면 그만이다. 자, 이제 그랜드 펜윅 공국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뉴욕으로 쳐들어간다. 물론 전쟁에 져서 원조를 받기 위함이다. 바야흐로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가 시작된다.
이 책,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가 발표된 것은 1953년이다. 1945년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새로운 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전 세계가 경악한 이후, 일부에서는 동일한 힘을 갖기 위해 애쓰고 일부에서는 인류의 파멸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던 때이다. 핵실험 금지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4년부터였고, 불완전하나마 핵확산 금지 조약이 체결된 것은 1969년이다. 언론인 출신의 레너드 위벌리는 전례 없이 강력한 신무기와 관련해 세계 각국이 어떤 행보를 취할지 감을 잡았을 것이다. 소설에는 그의 통찰력과 핵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유머러스하게 녹아 들어 있다.
미국의 알 수 없는 대외정책, 생각없는 혹은 제 앞길 챙기기 바쁜 정치인들, 서로를 불신하며 각자의 입장만 고집하는 강대국들, 그리고 14세기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랜드 펜윅 사람들의 순진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웃음을 자아낸다. 확실히 국제 정치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몰상식의 세계다.
그럼에도 레너드 위벌리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낙관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세계의 작은 20개국이 강대국을 감시하여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그랜드 펜윅의 주장이나, 대의명분과 명예를 중시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강대국 지도자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가 지나친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기보다는, 뭐랄까, 50년대는 그런 시각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도 소련도, 설마 공멸의 길을 택하기야 하겠냐는, 이성을 기대할 수 있었던 시대. 지금에 와서야 그의 희망이 순진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깜찍하고 유쾌한 소설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다면, 작은 20개국에 이스라엘이 포함된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아일랜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기자 생활을 한 저자의 한계랄까. 뭐 반둥회의가 열리기도 전이긴 하다. 더운 여름 한나절 시원하게 보내기에 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