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온 내가, 지난 달 간만에 계획이란 걸 세웠으니, 이름하여 <고전 읽기 프로젝트>다. 우리나라와 동양의 고전 중 읽은 것이라고는 <도덕경> 하나 뿐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 쪽에 관심을 좀 가져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한 달에 한 권씩 반드시 읽는다!, 라는 당찬 계획은 물론 아니고, 대강 한 두 달에 한 권씩 보면 되지 않겠나 라는 할랑한 생각이다.

 

그러나 나의 고전 읽기 프로젝트는 초반부터 난항이다. 첫번째가 <삼국유사>인데, 시작한 지 열흘이 넘었건만, 책갈피는 2권의 2/5 지점에 멈춰 있다. 이 속도라면 이번 주말도 모자라 다음 주로 넘겨야 할 판이다.

 

우리 나라 역사는 참 재미가 없다. 역사 뿐만이 아니다. 문학도 재미가 없다.

 

어릴 적 집에 위인전기가 2질 있었다. 하나는 한국 위인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 위인전이었는데, 각각 출판사가 달랐다. 세계 위인 전집은 화려한 디자인의 표지에 하얗고 깨끗한 속지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30여 권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생동감이 있었다. 워싱턴, 링컨, 에디슨 등은, 내가 조금쯤 엉뚱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해도, 그것이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 다들 저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는 거야, 그러니까 나도 크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반면 한국 위인 전집은 칙칙한 표지에 누런 종이, 작은 글씨로 보기가 불편했다. 그런데다 그 위인이란 사람들은 대개 어려서부터 신동이고, 의젓하기까지 하다. 하나같이 뛰어나고 단정하고 위엄있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 그걸 보면서 나는 질려 버렸다. 이런 사람들을 위인이라고 부른다면, 애초에 나 같은 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따위는 없는 거다. 한국 위인 전집은 절반도 채 읽지 못했다.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양상은 비슷했다. 세계사는 흥미로운 반면 국사는 지겨웠다. 왜 우리 나라의 역사는 도표와 연표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냐. BC4세기에 뭐가 어쩌고, 3세기가 되면 또 뭐가 어쩌고. 조선이 건국된 건 몇 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건 몇 년, 을사조약은 몇 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읽었지만 <삼국유사>는 읽지 않았다. 소포클레스와 세익스피어를 좋아했지만, 우리 나라 고전 문학에 무엇이 있는지는 시험에 나오는 것 외엔 전혀 몰랐고 대개 읽지 않았다.

 

그렇다, 내가 우리 나라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없는 건, 모두 위인전과 학교 탓이다.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거의 잊어버렸다. 문학 시간에 배운 고전 작품들, 제목도 생각 안 난다. 그런데 난 왜 그렇게 열심히 그것들을 암기했을까? 요즘 애들이 서양 문화에 물들어 있고 어쩌고 욕할 필요 없다.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우리 사회고 교육이니까. 연표를 외우게 하는 것보다 <삼국유사>를 읽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 건 아닐까. 

 

어쨌거나 나의 고전 읽기 프로젝트는 당분간은 이어갈 생각이다. 조금 참고 읽다 보면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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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09-0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도덕경 >을 읽으셨다고요? 대단하신데요.. 뭐.. 저도 사실은 < 삼국유사 > 읽다가 포기하고 책장에 꽂아놓고 말았답니다.. 전 고전소설은 재미있게 읽겠는데 다른건 영~ 못 읽겠어요..블루님 힘내시고 꼭 다 읽으세요..

로드무비 2004-09-0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리나라 역사는 별로지만 문학은 좋아해요.
그런데 뭐시라? 유아블루님이 그렇게 된건 위인전과 학교 때문이라고라?
딴지를 걸고 싶었으나...맞는 말이네요.^^

바람구두 2004-09-0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 프로젝트의 성사 유무에 기대가 큽니다.

어디에도 2004-09-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상상도 계획도 실행도 못할 멋진 프로젝트입니다. 슬슬, 성공하세요.
(저는 세계사도 재미있었지만 국사가 더 좋았어요. 중학교 때 국사선생님이 소위 말해서 짱 멋지고 재미있으셨거든요. 늘 그 선생님 시간만 기다릴 정도로^^)

urblue 2004-09-09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다들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제에, 보관함에 택리지니 성호사설이니 목민심서니 잔뜩 담아놨네요. 으아, 다 읽고야 말리라!! (짐작하시죠, 제가 이런 투지에 불타는 인간이 아니라는거. 걍 써 본 겁니다. ^^;)
저도 짱 멋지고 재미있는 국사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그런데 그것도 문제라니까요. 학생들이 국사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개인에게 달려있다니. 하여간, 학교는 싫어욧! 위인전도 싫어욧! 나중에 애 낳으면 한국 위인 전집 같은 거 절대로 안 사줄테여요. -_-

로드무비 2004-09-0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를 낳기는 낳을 모양이네. 호호호^^
흐뭇해서...

urblue 2004-09-0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이 참 부끄럽게...
진지 모드로 돌아가자면 애를 키우고 싶기는 한데, 낳고 싶지는 않다, 가 맞습니다.

에레혼 2004-09-1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저도 학교는 별로고,위인전은 싫어요!
우리나라 역사가 재미 없는 건, '역사적 사실'의 흐름이 늘 정쟁과 전쟁으로 점철된 탓도 있겠지만, '작은 것들의 역사' '사적인 것의 역사'를 기록하는 눈과 손이 없었던 것에도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저나 유어블루님의 장대한 프로젝트가 성공하길 빌어요!
힘내세요! 아자 아자!(풀하우스 버전^^)

2004-09-09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