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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조선 시대에 여자로 태어난다면 기생이 되고 싶다는 이들을 여럿 봤다. 왜 하필 기생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여자들에게 유독 엄혹한 법도를 강요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별달리 대안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왕족이나 사대부가의 규수야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의 학문을 익히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그 갑갑함이 어떠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양민은 좀 더 자유로울 테지만 평생 입에 풀칠할 걱정으로 애가 닳거나 강도 높은 노동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먹고 살기 고생스러워 자식을 노비로 팔아야 하는, 혹은 이미 노비인 부모의 딸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을 터이다. 그러니 시문서화를 익히고 풍류를 알면서도 양반의 법도에서 살짝 벗어난, ‘해어화(解語花)’ 기생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조선의 여성상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이지 말을 하는 꽃은 아니다. 아무리 양반네들이 추어준들 기생은 눈요기요 노리개다. 팔도 방방곡곡 뭇 기생들은 물론이거니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여 현재에까지 이름을 떨친 황진이 같은 천하 명기라 해도 술 따르고 웃음 파는 여인으로서의 삶이 어찌 신산하지 않았을까. (TV 드라마에서 어떻게 다뤘는지 이제서야 궁금하다.) 조선 시대라면 기생이 되고 싶다던 그 누구도 지금 기생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하고많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현대에 기생이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야말로 과거의 유물일 따름이다.
<신 기생뎐>이라는 제목을 보고, 당연히 지난 세기의 어느 때, 늦어도 70년대쯤이 배경이 아닐까 짐작했다. 21세기의 기생은 지나치게 뜬금없는 소재니까.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작가가 준비한 꾸러미 속에 담겨있는 건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기생과 기방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2000년대의 기생이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하는 볼멘소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판타지가 아닌 다음에야 현실성을 놓친 소설이 좋은 작품일 리 만무하다. 불퉁불퉁 비죽대던 입술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쑥 들어가고, 대신 눈과 손이 게걸스레 움직인다.
줄과부집에서 태어나 딸의 팔자를 염려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권번에 들게 된 소리기생 오마담도, 암팡지고 억척스러운 박색 부엌어멈 타박네도, 언니들의 꿈을 이루는 대신 아마 마지막이 될 기생의 길을 걷게 된 춤기생 미스 민도, 과묵한 더부살이 박기사와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한 제비 김사장도, 무엇보다 제 각각의 사연을 가슴 속에 꾹꾹 누른 이들이 모여 벅적벅적 투덕투덕 살아가는 부용각 자체가 어찌나 생생하고 사실적인지, 군산에 내려가면 어느 모퉁이에선가 대숲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한옥과 능소화 흐드러진 담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담장 넘어 왁자지껄 술 취한 객들의 허세와 교태로운 기생들의 웃음이 와르르 흘러나오면 지나던 사람은 흠칫 놀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쯧쯧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낮에 그곳을 다시 들러 처마 밑 마루에 죽 해바라기 하고 앉았는 기생들과 그들에게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있는 쭈그렁 부엌어멈을 본다면, 저도 모르게 연민 어린 표정을 짓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네들이 그 자리에 앉게 된 수많은 사연과 원하지 않을 때라도 꽃이 되어야 하는 삶의 고단함을 문득 이해하게 될 테니까.
기생이라는, 시대에 동떨어진 듯 보이는 소재로 현실감 넘치는 작품을 써낸 작가의 솜씨가 사뭇 감탄스럽다. 필시 엄청나게 발품을 팔았을 터이다. 눈에도 입에도 착착 들붙는 맛깔나는 사투리와 순우리말은 제자리를 찾아 거침이 없고, 덕분에 책 읽는 즐거움이 한껏 늘어난다. 새해 초부터 이리 훌륭한 작품을 만났으니 올해의 책 운세는 탁 트이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