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사랑을 하기를 꿈꾸고 실제로 사랑을 한다. 누구나 단 한 번의 절대불변의 사랑을 꿈꾸어 보지만, 실제로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이들이 첫 사랑에는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그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내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혹은 못하리라.' 같은 어줍잖은 다짐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길든 짧든), 누구나 언제 그(그녀)를 사랑했던가 싶게 또 한 번 또는 세 번 네 번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왜 인간은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는가. 첫 사랑의 시련을 통해 사랑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뼛 속 깊이 깨달았을 터인데도, 왜 다른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가. 사람에 따라 사랑의 양상이야 천태만상이겠지만, 만남과 이별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에는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는 듯하다.  

 

3월의 따스한 봄볕에 봉오리를 막 열어젖히는 나무들처럼 사랑의 꽃이 이제 막 피려는 자, 사랑의 열매가 무르익어 행복감에 젖어 있는자, 부풀어 오른 열매가 터지면서 지리멸렬해 가는 감정에 어리둥절한 자, 꽃도 열매도 잎도 다 떨어져 사랑의 겨울을 맞이한 자, 실연의 아픔에 긴긴 날을 방구석에 틀어박혀 울면서 혹은 멍하니 있는 자,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을 회의하며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겠노라 여기는 자. 그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아니면 인터넷 서점으로 들어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사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에 관한, 정확하게는 연애에 관한 책이다. 제목과 촌스러운 표지만 보면 <하이틴 로맨스> 류의 유치한 이야기가 연상되지만, 책장을 열면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1인칭 화자인 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어쩌면 운명적으로) 클로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느끼고, 우여곡절 끝에 본격적인 연애를 하고, 달콤쌉싸름한 연애의 절정을 맛본 뒤 결국에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고 받는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이런 평범하고 진부한 연애담이 드 보통의 손에서 독창적인 사랑 이야기로 돌변한다. 이 책은 사랑의 기승전결을 모두 담고 있다.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구애 과정, 연인의 이상화, 친밀성, 서로를 알아가는 기쁨, 행복 이면의 두려움, 거부 당하는 사랑, 돌연히 닥친 이별, 이별의 고통과 시련, 비참한 상황에 대처하기까지. 

 

이 책을 읽는 재미는, 흔하디 흔한 사랑의 우여곡절을 꼼꼼하게 따지고 드는 드 보통의 해석이다. 연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과 그에 수반되는 감정과 생각을 저자는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의 견해를 끌어들여 이야기한다. 몽테뉴, 스탕달, 롤랑 바르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비트게슈타인, 마르크스, 파스칼 등등. 그래서 이 책을 읽노라면 한 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무슨 철학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저자가 풀어내는 생각들이 너무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것은 저자가 스물 다섯이라는 패기만만한 나이에 이 책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로서는 그 젊은(어쩌면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많은 책을 독파하고 사랑이라는 소재를 이 정도로 깊이 있게 다룬 것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학적인 냄새가 풍긴다고는 하나, 드 보통의 현학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싫지만은 않다. 그의 사변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그래, 맞아 맞아'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뛰어난 통찰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맥 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고, 누군가와의 만남에 <운명>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은 우연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고 싶어서이며, 사랑을 얻고자 할 때는 자아마저 내동댕이친 채 오로지 상대에게만 집중하지만, 상대로부터 사랑의 보답을 얻게 되는 순간 그/그녀에게 매력을 못 느끼며 달아나려 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면서 느끼게 되는 심경을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다 . . .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만큼이나 위협적인 차이와 만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이런 차이와 마주치면 칠수록 더욱 잘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혼자 있을 때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있을 때는 잘 파악되지 않았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이 연인 앞에서만큼은 곧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 보통은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스탕달의 말을 끌어들여 연인을 나를 비추는 거울에 비유한다.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런 식의 철학적인 사유로 가득하지만, 이 책이 무겁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에피소드 중간중간 등장하는 드 보통의 재치스런 입담은 때때로 옅은 미소를, 때로는 박장대소를 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재미난 대목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을 받고 난 후 화자인 내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었다. 나의 죽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볼 수 없다는 깨달음에 화들짝 놀라 먹은 약을 다 토해 버리는 나, 심각한 자살을 이런 식으로 황당하게 처리하는 작가의 능청스러움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자살 시도도 해보고, 자신의 슬픔에 취했다가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승화시키고, 사랑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급기야 금욕주의자에 이른 화자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을까. 드 보통의 번뜩이는 기지와 비상한 통찰력을 잘 읽어내려 간 사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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