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내가 받은 첫 중간고사의 수학 성적은 35점이었다. 중학교 선생님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수학은 차원이 다르다 라고 누누히 일러주시긴 했지만, 난 그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35점. 그 숫자는 내 머리를 어지럽혔고 무엇보다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다행한 것은 35가 그 때는 치욕스런 숫자였지만 지금은 사랑스럽고 고마운 숫자로 내게 남아 있다. 35 덕분에 난 여름 방학 동안 땀흘리며 수학 문제와 씨름했고, 땀 흘린 것만큼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수학을 좋아했지만 숫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수학은 내게서 멀어졌고 물건을 살 때나 누군가의 나이를 따지거나 오늘이 며칠인가 지금이 몇 시인가 생각할 때를 빼고는 숫자를 거론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숫자는 숫자일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우리가 무심히 보고 넘기는 수(더 크게는 수학)의 아름다움을 말해 준다. 17년 전 교통사고로 뇌의 일부를 손상 당한 박사. 그의 기억은 1975년에서 멈춰 있다. 30년 전 자신이 발견한 수학의 정리는 기억해도 엊저녁에 뭘 먹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뇌 테이프는 정확하게 80분만 돌아간다. 80분이 지나면 이전 기억은 깡그리 삭제되고 새로운 내용이 녹음되는 것이다. 그러나 80분만의 기억 회로를 가진 박사가 전해 주는 수 이야기는 너무나 재미 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들은 그냥 수가 아니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가령 박사에게 루트는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이다. 220과 284는 우애수다. 6과 28은 완전수다. 18은 과도한 짐을 진 과잉수이고, 14는 결여된 공백이 앞에 놓인 부족수다. 박사가 가장 사랑하는 수는 소수이다. 그에게 소수는 한마디로 사랑의 대상이다. 소수 찾기를 광대한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는 격에 비유하는 박사의 표현은 아름답다. 또한 우리네 인생 살이에 대한 명답이기도 하다.  

"숫자가 커지면, 소수가 전혀 없는 사막지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수도 있어. 하염없이 걸어도 소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지. 사방이 온통 모래의 바다야. 태양은 쨍쨍 내리쬐고, 목은 바짝 마르고, 눈은 가물거리고, 정신은 몽롱하고. 앗, 소수다! 하고 뛰어가 보면 그냥 신기루일 뿐.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는 것은 모래 바람뿐.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지평선 너머에 맑은 물이 출렁이는 소수란 이름의 오아시스가 보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말이야."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우리에게 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 관계의 아름다움도 전해 준다. 80분이면 기억이 사라지는 박사가 숫자를 통해 화자인 나와 소통하고 그녀의 아들인 루트에게 보이는 애정, 나와 루트가 야구를 통해 박사에게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가 사랑한 야구 선수의 카드를 찾는 행동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이 책은 수를 사랑하는 것이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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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1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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