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아이들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뿔(웅진)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 모두는 "하찮지만 중요한 존재"

안타깝다. 이런 책이 절판이라니. 어른들, 특히 부모와 교사가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2020년 11월에 읽기 시작해 해를 넘겨 2021년 1월 10일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페티 회의 <<경계에 선 아이들>>은 전작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는 못 미치지만 <스밀라>에 들어 있던 작가의 문제 의식과 철학의 궤를 같이 한다. "어른이 어린애들을 세게 쳤을 때 일어나는 감정"(13), 어른이 어린애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포, 한 아이를 구하는 문제, 더 나아가 나를 구하는 길, 시간의 일회성과 영원성, 공존과 연대와 따뜻함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것도 아주 모호하게, 그것도 아주 철학적으로.

이 소설은 시종일관 긴장이 팽팽히 흐른다. 첫 조회 장면부터. 빌 학교의 교장은 학생들에게 "유창한 침묵"을 강조하며 몸을 바짝 긴장시키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에게 재갈을 물려 반벙어리 행세를 강요하는 억압적이고 폭압적인 학교. 빌 사립학교는 그런 학교다. 이 학교는 왜 학생들의 모가지를 가차 없이, 사정없이 조일까.

"그들은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모든 아이들을 덴마크 공립교육 체계에 한데 모으려는 계획. 정신적 결함이 있거나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은 물론 학습 진도가 늦은 아이들까지도, 심한 지적 장애와 정상의 경계에 선 아이들을 모두 끌어안아 학교에 보내려는 계획이었다. 빌 학교는 이 통합을 위한 전범이 될 예정이었다. 이 학교는 어떻게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연구하기 위한 실험실이고 작업장이었다.(284) / 1964년부터 1974년 사이에 불우 아동들을 덴마크 공립학교에 통합하려는 실험이 총 54건이었다. 자그마치 54건." (285) ​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이 실험은 덴마크에서 실제로 진행되었던 교육 실험이었다. 가족과 세상에서 내쳐진 아이들, 일반 학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아이들, 그런 수준 이하의 아이들을 그러모아 '통합'이라는 그럴싸한 미명 아래 재능 있는 학생들로 변모시키겠다는 야심 찬 실험이었다. 작가가 말하듯 이 계획은 "미친 짓"이었다. 예상 가능하게도 이 실험은 무수한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거나 씻기 힘든 상처만을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어째, 기시감이 들지 않나. 이것이 1960년대의 덴마크에서만 있었던 일이기만 하면 좋겠는데, 나는 자꾸 내가 사는 대한민국 학교 현장과 고아원과 소년원에서도 일어났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해 등골이 오싹오싹해지곤 했다.

이 문제 많은 학교에, 문제 많다고 느끼지 못하는 무수한 학생들 중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세 아이가 있다. 나, 카타리나, 아우구스트이다. 아우구스트는 사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계성 인격 장애의 증상을 보이는 친구이다. 나와 카타리나는 이런 아우구스트를 돕기 위해, 또한 그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감시의 경계망을 피해 탈출을 꿈꾼다.

"아우구스트처럼 약하고 무력한 존재가 있다면 대가를 받지 않고도 그를 위해 뭔가를 해줘야만 한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해준다. / 하지만 나는 대가를 받았다. 그 애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제는 마치 그 애가 나를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176) ​

빌 학교의 교사들과 교육부 관계자들도 자신들이 아이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둠에 갇혀 있는 아이들을 빛 속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참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이들은 그 어떤 폭력적 행위도, 폭력인 줄 모른 채 행할 수 있었다. 무섭고 섬뜩한 사실이다. 이 소설은 페터 회의 사립학교 시절의 경험담이 어느 정도 반영된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주인공 나의 이름이 작가와 똑같은 '페터'라는 사실에서 그런 자전적 성격이 발견되며, 어른이 된 '나'가 이 시절을 회상하며 하는 말에서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가 밝혀진다.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모든 일을 잊는다는 것을 뜻하며, 그 후에는 어린아이였을 때 중요했던 것을 버린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이것에 저항해 왔다." (286) ​

그러니까, 이 소설은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무엇을? 편견에 사로잡힌 이른바 '정상군'에 속하는 세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고(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산 '비정상군', 또는 경계선의 아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 아이들, 카타리나와 아우구스트와 나는 빅브러더들의 눈을 피해 어떻게든 함께하려 애썼다. 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이들의 관계는 언제나 위태위태했다. 이들은 문제를 인식했고, 원인을 파헤치려 했으며,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 아이들은 어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힘을 썼다. 그 노력들이 너무 가상하고 너무 기특해서 나는 무시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세 사람의 연대는 어른들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파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ㅡ카타리나와 아우구스트, 나ㅡ는 만났고 그 이후로 다시는 완전히 포기할 수가 없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나는 그게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한번 사랑을 만나게 되면, 다시는 가라앉지 않게 된다. 항상 빛을 찾아 표면 위로 떠오르기를 갈망한다."(329) ​

작가가 작품 속에서 말하듯 이 소설은 "세상에 잘 적응해 나가는 사람," "다른 사람하고 시간을 공유하는 데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때 어린이였고 청소년이었으며 학생이었다. 그 시절들은 대체로 아주 많이 모호하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고 내 마음과 생각도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나'가 펜을 잡고 그때는 그랬어,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 어른들이 잘못한 거야, 그것도 아주 많이, 라고 대신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 말을 작가는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마지막 3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더불어. 작가는 소설 초반부터 "쏜살같이 흘러가 영원처럼 되어버리는 순간들"(19), "​시간이란 저절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붙들어야만 하는 것"(27)," 이라는 표현들로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화두처럼 던진다. 카타리나-아우구스트-나 세 친구는 한 시절을 함께 했다. 누구나 거쳐 가는 통과의례의 시간이었고 우주의 시계로 보면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들 세 사람에게는 꼭 붙들어 매야 하는, 사랑이 존재했던 영원의 순간이었다. 선형적인 시간과 순환적인 시간의 교차.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평면 위에는 순환적이고도 선형적인 특질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 채로 존재한다. 동일한 행동이 몇 번이고 반복되지만, 이 사건은 특별하면서도 일회적이다." (297) ​
"실상 우리 자신에게는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안다. 문제가 너무 커지면 점점 쌓이다가 끝내는 손가락에서 모래가 술술 빠져나가듯 삶이 그렇게 술술 빠져나간다는 걸 알게 된다. /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물러서면, 예를 들어 딸아이가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멀찍이 떨어지게 되면, 반복이 보인다. 그 순간 자기 자신이 모든 강력한 회로 사슬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결국 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치 없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니며, 비록 하찮다고 해도 중요한 사람이다. 결국 위대한 반복이 훨씬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이다. / 정신이 오로지 가지 자신만을 감각한다면,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가족과 유전, 아이들과 탄생, 다른 이와의 공존을 보게 되면 반복이 보인다. 시간은 모래가 술술 흘러나가는 모래 시계가 아니다. 널리 뻗어 있는 평원이며, 횡단할 수 있는 대륙이다."(345) ​

우리 모두는 "하찮다고 해도 중요한 사람이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타인을 통해서다. 타인의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서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뭉클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겠다.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가 생각나는 일화이다.

주인공 '나'에게는 홈룸(homeroom)이라는 고아원 절친이 있다. 이름 그대로 고향 같은 친구다. 그들이 머문 고아원 샤워실에는 샤워기가 세 개 있었다. 하나만 따뜻한 물이 나왔다. 하루는 나와 홈룸이 샤워줄 꼴찌에 섰다. 내 앞에 서 있던 홈룸이 온수 샤워기를 지나쳐 냉수 샤워기 아래 섰다. 홈룸은 자신의 친구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랫동안 따뜻한 물로 온몸을 적실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물이 벽처럼 나를 에워쌌다. 전에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수 샤워를 해본 적이 없었다." (228) '나'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육신은 보이지 않지만 영혼이 늘 함께 있는 그 친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네가 꼭 알아주었으면 하는 얘기가 있어." 내가 말했다. "우리가 만난 뒤로, 처음 같이 변기 위에서 라디에이터에 걸터앉았던 이후로, 난 한 번도 완전히 외로웠던 적이 없어. 네가 나를 떠난 후에도 말이야. 그전에는 내 삶에 아무것도 없었어. 하지만 누군가 내가 따뜻한 물에 샤워할 수 있도록 냉수 샤워가 아래서 오래 견뎌준 덕분에, 나는 다시는 진정으로 외롭지 않게 되었어."(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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