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8 매일 시읽기 91일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얼마 전 라로님 페이퍼에서 읽게 된 시. 라로님의 감동적인 간호 일지와 함께 올라와 있던 필사 시였다. 바로 검색 후 알게 된 사실, 어머, 이분, 작년에 읽으려고 찜해 둔 <<은하철도의 밤>> 저자시네. 시도 쓰는 분이었어? 놀라워하며 도서관에서 <<비에도 지지 않고>> 두 판본을 대출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비에도 지지 않고>는 겐지가 출판을 의도한 작품이 아니라 수첩 속에 써놓은 메모들 중 하나였다는 것.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11월 3일에 썼다는 것. 처음 활자화된 제목은 <11월 3일>이었다는 것. ‘가서‘라는 반복 어구로 지식보다 행동을 강조했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은 여유당 출판본에 겐지 동생의 손자가 쓴 해설에 담겨 있다. 손주 조카가 자신의 할아버지에게서 듣고 독자에게 들려주는 겐지의
이야기는 뭉클하다.

그림책공작소에서 펴낸 판본에는 아동문학가이자 번역가인 엄혜숙님의 해설이 있다. 엄혜숙님은 이 책을 처음 읽고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시인이 모든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불리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다고. 엄혜숙님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평이하게 미야자와 겐지의 삶과 철학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시를 읽고 약간의 감동과 충격 대신 멀미를 맛보았다. 나는 미야자와 겐지처럼 살 수도 없거니와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에든 잘 넘어지고, 별거 아닌 일에도 화내고, 채소와 고기를 골고루 먹길 좋아하고, 내 잇속을 잘 따지길 원하고, 싸움 있으면 외면하고, 곧 죽어도 지성인이라는 소릴 듣고 싶어 하며, 칭찬에 늘 목말라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이번 생은 글렀어, 다음 생도 불가능해 라는 소리가 내 속에서 터져 나왔다. 어쩌랴. 나는 이런 인간인 것을.

그나마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라는 구절에서 위안했다. 왜냐, 나의 한 별명이 리액션 여왕이거든. 리액션은 ˝잘 보고 듣고 알˝아야 진짜로 발휘되는 법이거든.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는 시 자체만 읽어도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과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의 경우에는 바보 노무현과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 대통령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따박따박˝ 험한 길 걷고 있는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자신이 없지만, 세상 그 어디에나 ˝비에도, 바람에도,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주저앉지 않고 세상 많은 눈물, 세상 아픈 몸들 닦아주고
돌봐주려 애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한다.

미야자와 겐지는 1896년 태어나 1933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에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화상과도 같은 아름다운 기도시와 따사로운 작품들을 후세대에 남겼다. 다행한 일이다.

언제나북스에서 국내 작가가 그림을 그린 새로운 판본이 내년 1월 출간될 모양이다. 나는 내년에 겐지의 작품을 더 읽겠다. 읽을 것이 너무너무 많다. 이건 행복한 고민인가? 불행한 고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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