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1 매일 시읽기 84일 

감자는 감자 아닌 걸 생각나게 하고 
- 이규리 

슬픔을 감자 바구니에 담아놓고  
파먹기 시작한다 
토실토실하구나 
얼마든 배불러도 되겠어 

하지 햇볕은 끊어 쓰고도 남아 
또 남아 
다시 끊어 쓰다가 눈이 베어 

ㅡ왜 여기 앉아서 뜨거운 감자만 먹고 있는 거야 
ㅡ이 소금 바가지는 다 뭐야 

그렇더라도 
아픔을 사용하진 마 
병을 이용하지 마 

오늘은 다르다 하며 오늘을 가고 
길어진 해는 등에 모아서 

슬픔은 등뼈가 곧아 머리를 숙이지도 않네 

유리창에 바싹 다가가면 내일이 일찍 올지도 몰라 
내일이 오면 다른 마음이 들지도 몰라 

감자는 왜 감자 아닌 걸 생각나게 하지 
배가 부른데 왜 허무한 거지 
감자가 아니야 슬픔이 아니야 

길었을 뿐이야 

모아둔 볕은 어디에 풀어야 할까 

어떤 믿음은 이제 이곳으로 오지 않을 텐데 
망초꽃은 하염없는데 


다시 이규리. <감자는 감자 아닌 걸 생각나게 하고>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이규리 시인이 2019년 두 권어 시론집을 펴낸 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쓴 글이 떠올랐다.

˝그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심어준 문장은 바로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이루어졌다’(틱낫한)이다. 종이는 종이 그 자체가 아닌 물, 나무, 바람, 햇빛 등 수많은 요소로 이뤄졌다는 것. ‘종이’와 ‘종이 아닌 것’이 같다는 걸 알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렇듯 시로써 다 말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모아 그는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담았다.˝ (2019년 7월 11일자 이지혜 기자)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라는 틱낫한의 잠언을 살짝 틀어 ‘감자는 감자 아닌 걸 생각나게 하고‘라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감자 바구니에 든 것은 감자지만, 감자를 파먹는 행위는 슬픔을 먹는 것이다. 감자가 토실토실하다며 ˝얼마든 배불러도 되겠어˝라고 하다니. 슬픔으로 배를 불리면 어떻게 될까. 허무˝해진다고, 시인은 말한다. 슬픔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를 채워주지 않는다. 날이 서 있는 슬픔, 남아 돌아 눈을 베는 슬픔, 망초꽃처럼 하염이 없는 슬픔.

˝슬픔은 등뼈가 곧아 머리를 숙이지도 않네.˝ (기억해 두고 싶은 시구다) 

현재 시점에서 내 슬픔은 등뼈가 조금 굽었다. 슬픔이 자아낸 눈물 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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