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9 매일 시읽기 82일 

겨울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 
- 김행숙 

무덤을 안은 듯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죽은 사람 비슷하다 

목소리는 나를 떠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도처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 헤매다가
내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를 직접 들은 적도 있다. 나는 나를 쫓아갔지만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또 무서운 꿈을 꾸었구나, 어린 시절에 엄마는 나의 혼란을 그렇게 정리해주었다. 

꿈이면 무서워도 괜찮고, 아파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고, 죽여도 괜찮은 것일까. 그래서 인생을 꿈같다고 말할 때 두 눈을 껌벅이는 것일까. 인생이 꿈같으면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 . . . . . 진짜처럼 죽었다가 또 거짓말처럼 살아나기를 얼마나 되풀이하게 되는
걸까. 이것이 대체 몇 번째 겨울나무란 말이냐. 분명히 꿈에서 비명을 질렀는데 일어나보면 현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몇 번째 봄나무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한 그루 겨울나무를 알몸처럼 껴안고 있다. 펄펄 흰 눈이 내리고 . . . . . . 설령 여기서 내가 잠이 든대도 이것은 꿈같지 않다.


이규리 시집과 김행숙 시집을 번갈아 더디더디 읽는다. 오늘은 눈이 채 녹지 않은 뒷산을 아들과 올랐다. 나무 계단을 헥헥거리며 오르던 아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햇볕 쨍쨍한 파란 하늘 아래 벌거벗은 몸뚱이로 우뚝우뚝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 이상하다. 엄마! 겨울이 아니고 봄 같아요.˝ 뭐시라. ˝아들아, 지금은 12월이고 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란다.˝

아들은 무엇에서 봄을 느꼈을까. 아마도 봄햇살처럼 따사로이 떨어지는 햇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람이 제법 매운 영하의 날씨였지만 햇볕만큼은 달고 포근했다. 그래서 김행숙 시집에서 <겨울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를 읽었다. 이 시의 제목은 황지우 시인이 1985년에 발표한 <겨울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를 그대로 따왔다. 제목만 같을 뿐 전개 방식은 전혀 다르다. 내게는 김행숙 시인의 시가 훨씬 어렵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느낌이다. 아니구나. 산이야 헉헉거리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나 그 언저리에 도달하는데, 이 시는 꼭대기도 그 주변도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슴푸레 보이는 한 가지. 겨울나무들을 볼 때면 새로 태어나기 위해 ˝알몸˝으로 추위를 껴안고 산다는 느낌이 든다. ˝죽은 사람˝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숨 죽인 채 사는 것 같다. ˝진짜처럼 죽었다가 또 거짓말처럼 살아나˝는 존재들 같다. 그러니까, 모든 겨울나무는 제 속에 봄나무를 품고 산다. 이 겨울 또한 꿈결같이 지나가리. 그러는 동안 ˝나를 떠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던 목소리도 시린 겨울 버텨내고 다시 꽃을 피우는 확장된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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