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3 매일 시읽기 56일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온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이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리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안도현 시인의 문학청년 시절 좋아하던 시들 중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를 발견하고는 반가웠다. 내 책꽂이에 이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창작과비평)가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김준태 시인은 1948년생이다. 이 시는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1970년 시인의 나이 스물세 살 때 <시인>지에 발표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세월이 흘러 청년 준태는 중년을 지나 대선배 시인이 되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람은 늙어도 시는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나는˝ 할머니가 참깨 터는 일을 돕는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만 해도 깨들이 우수수 털어지는데, ˝젊은 나는˝ 젊음이 무색하게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주어야 한다. 무릇 일이란 경험치가 쌓일수록 가벼워지나 보다. 참깨 터는 일이 쉽지 않건만 희한하게도 묘한 ˝쾌감˝을 선사하고, ˝기가 막히게 신 나는 일˝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세상일이 참깨 털듯 신명 나면 참 좋겠다 생각하며 ˝정신없이˝ 참깨를 터는 손자에게 할머니가 부드럽게 일침을 놓는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성현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다. 할머니의 저 말씀을 두고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모가지는 열매를 온전하게 담고 있는 그릇인 동시에, 끊어져서는 안 되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은 삶의 근본이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참깨를 터는 사소한 행위를 통해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70)
나는 할머니의 저 말을 ˝가엾어하는 꾸중˝이라 느낀 시인의 정서가 참 좋다. 한낱 참깨를 터는 일에서도 생명에 대한 귀함을 아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손주의 모습이 눈에 선히 그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