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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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2 매일 시읽기 24일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 김선우

좁은 골목길 언덕에서 소녀가 칼등을 잡고 햇빛을 자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반달칼을 손톱에서 꺼내 허공을 긋던 소녀가 소년을 안는다 비닐봉지가 부푼다 흘러내리는 새싹들, 부서지는, 일종의 꿈들

있잖아 난 결국 너랑 자지 않을 거야
어제 배운 그 시 기억 나?
응 그림자를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어
응응 그림자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도 우린 함께 자지 못할 거야

침묵이 엄마인 검은 바람의 말, 담장 밑 깨진 화분에 가득 고인 소음들,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

그림자가 없는 소녀와 소년이 한낮 골목길 언덕에서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애들에게 들릴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

미안해 . . . . . . 나도 . . . . . .사생어른이야 . . . . . .


나희덕의 시를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2012)를 꺼내 들었다.

김선우의 시들은 아주 쉽게 읽히진 않는다. 곱씹어야 조금 알겠고, 곱씹어도 도통 모르겠는 시구들이 꽤 많다. 시집은 산문집보다 분량이 적은데도 한 권을 다 읽어내기가 녹록치 않다. 시를 등에 업고는 달음질을 칠 수가 없다. 등딱지 업은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걷게 된다.

이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표제작인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이지만 오늘 내 눈에 띈 시는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있는 소년과 소녀. 그림자가 없어 어른이 되어도 같이 자지 못할 거라는 소년과 소녀. 둘이 어제 배운 시를 들먹인다.

시인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물음표를 간직한 채 시를 읽다 마지막 시구에서 '철렁'했다 '뭉클''하게 된다. "미안해 . . . 나도 . . . 사생어른이야 . . ."

소년과 소녀는 어른 세상이 딱지붙인 사생아인가 보다. '사생아'의 사전전 의미는 '법률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이 아이는 우리나라의 경우 누군가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다. 그림자가 없다. 이런 아이들이 필히 겪는 수모들이 있다. 그리 태어난 것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이들은 손가락질 당하는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소년소녀를 시인은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이라고 말한다.

어른된 자로서 이들에게 미안해서 시인이 뽑아든 시어가 "사생어른"이다. 사생아 이전에 '사생어른'이 있었으니 잘못은 어른들에게 있다. 시를 빌려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사과를 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이런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고, 그래서 어른의 길에는 제목처럼 '고독'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걸 게다.

김선우는 시인의 말에서 독자들이 이 시집을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으로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처절함과 명랑함까지는 모르겠으나 김선우의 시를 읽고 있으면 미안함을 넘어 유대감을, 연민을 넘어 연대를, 공감을 넘어 공생을 꿈꾸는 시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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