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1 매일 시읽기 23일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나희덕의 <<그곳이 멀지 않다>>를 계속 읽는다. 시들이 좋아서 당분간 이 시집만 뒤적거릴 듯하다. 

노랗게 익은 동글동글한 탱자, 시큼 떱떠름한 맛이 나는 탱자. 내가 아는 탱자나무는 이게 전부였는데, 이 시를 읽고 탱자나무는 하얀 꽃을 피운다는 것, 하얀 꽃잎들은 여리다는 것, 가지에는 가시가 뾰족뾰족 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탱자나무 가시는 꽃잎의 수호자인 듯, 위협꾼인 듯 날을 세우고 있다. 때론 꽃들을 지키고 때론 꽃들을 벤다. 

내 속에도 탱자나무 가시 같은 칼날이 있다. 바람이 툭하면 내 살을 저미고 지나가지만 그에 대항하듯 화자의 속에서는 ˝칼날˝이 자란다. 허나 그 칼날은 아직 누구도 벨 수 없다.

이 시에서 바람은 삶의 고난으로 읽힌다. 바람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바람에 베는 상처의 깊이도 때마다 다를 것이다. 바깥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살지 않으려면 무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내 속의 칼날˝을 키우는 것이다.

˝내 속의 칼날˝은 탱자나무 가시처럼 수호자이자 위협꾼이다. 나를 무장하고자 키운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가 묻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반 통의 물>>에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라는 제목의 산문이 실려 있다고 한다. 오호라. 일단은 대출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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