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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20201018 매일 시읽기 20일
이장
- 허연
뼈의 입장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는 걸 알았다
모든 예상된 일은
예상치 않게 나를 흔든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뼈가 됐다는 걸
나는 이장을 후회할 수 없다
다 예상했었고
모든 충격은 파도처럼 왔다 가니까
결심은 파도가 오기 전에 하는 거니까
파도가 가면 후회만 하면 되니까
무덤만 보고 사는 게 의미 없어서
뜨겁게 달려오곤 했던
그리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밋밋해지고 식는 게
스스로 창피해서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결심을 하고
어머니를 꺼냈고
다시 만났는데
그녀를 생각만 하다가
이제는 그녀의 뼈를 보는 일
뼈와 처지가 같아져버린
어머니를 보는 일
잠깐 무섭다가
부질없는 바람 탓을 하다가
이 커다란 동산에 뼈로 남은
무수한 존재들을 생각하다가
그나마 뼈로 지탱해준 기억들에게 감사하다가
산을 내려간다
허연 시인의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다시 한 장 한 장 넘기다 이 시에서 시선은 멈추고 생각이 흘렀다.
올 6월 시아버지 무덤을 파묘했다. 이장이 아니라. 나는 생전의 아버님을 뵌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시아버지는 사진 속, 이십 대의 얼굴을 가진 젊은 모습이다. 그래서 명절 때나 제사 때면 아이들이 묻곤 했다. "엄마, 할아버지는 할아버진데 왜 아빠보다 젊어?" ㅋㅋ 아버님이 실제 돌아가신 나이는 40대였다.
허연 시인이 <이장>에서 말하듯 나 또한 시아버님이 "뼈가 됐다는 걸" 어머님으로부터 듣고 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아버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 "뼈"라는 사실은 대단히 낯설었다. 나는 시인처럼 충격적이기보다는 신비로웠다. 팔과 몸통과 다리 뼈들은 툭툭 잘려(이장을 한 적이 있던 탓에) 조각들로 존재했지만 해골만은 거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푹 패인 눈두덩, 솟은 코, 벌어진 입과 치아.
해골은 '바니타스(덧없음, 무상함)'를 주제로 한 그림들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물 중 하나이다.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접했던 두개골을 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도 보았다. 인간의 끝은 결국 부서지는 뼈인가 했다가, 화장 후 남은 뼈가루를 보고는, 아니 인간의 끝은 결국 한 줌 모래, 바람에 실려 훨훨 날아다닐 먼지구나 라는 걸 체감했다.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정신과 수족이 아직 멀쩡할 때 묘자리를 정리하고 싶어 하셨다. 육남매 중 다른 의견을 가진 이도 있었지만, 자식들은 모친의 의사를 존중해 따랐다. 파묘를 하기 전 아내와 육남매와 손주들은 아버님의 묘 앞에 돗자리를 깔고 땅 속에 묻혀 있는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 갇혀 있지 말고 훨훨 돌아다니슈." 어머님이 한 줌 재로 남은 남편을 날려 보내며 하신 말씀이었다.
묘가 없어지면 그리움도 없어질까. 그렇진 않으리라. 다만 시인의 말처럼 묘의 유무와 상관없이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식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이 창피해하고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면 되니까. 죽은 이가 남기고 간, 기억나거나 혹은 기억나지 않는 유산을 몸에 간직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