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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20201016 매일 시읽기 18일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허연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지루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처럼 쉽게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 그날 이후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돌진하는 건 재미없는 게임이야.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가끔 기도는 할께.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 속에 내가 없기를.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하지 말기.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또 생길 거니까.
너무 많은 길을 가리키고 서 있는 표지판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너무 많은 바다로 가는 배들과
너무 많은 돌멩이들
사랑해. 그렇지만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연 시인의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 지성사)는 올해 나온 신간이다. 나는 이 시인을 몰랐고, 알게 된 계기는 알라딘 창에 떠 있어서였다. 역시 눈에 띄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 읽어 볼까, 더 나아가 사 볼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니까. 시를 너무 멀리 두고 살아, 곁에 두고 싶어 올해 처음 구매한 시집이었다.
발문을 쓴 박형준 시인은 허연의 시를 두고 "담백하고 슬픈 기운"이 느껴지고 "맑으면서도 예술가적인 깊은 비애"가 서려 있다고 했다.
몇 편밖에 읽지 않아 전체적인 느낌은 아직 말을 할 수 없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읽으니 시인은 세상일에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 "꿈꾸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많은 걸 내려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놀라 보고, 달아 보고, 불타 보고, 궁금해 보고, 중독돼 보고, 가슴 덜컹거려 보고, 꿈꿔 보았던 자만이, 그것도 치열하게 그리 살아보았던 자만이 이제 그만 하자고 노래할 수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죽을 것처럼 힘들어 본 적이 있던 자만이 그리 살지 않겠노라 읊조릴 수 있다. 아프고, 따갑고, 괴롭고, 죽겠고 하는 경험들. 그것은 산 자들이 겪어야 할 몫이다.
시인이 위로한다.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래, 시인의 말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적어도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 리"자. 그리고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