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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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빚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북플에 올라온 글을 보고 제목이 마음에 들어 봉담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날마다 하루 한 편의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심삼일의 3일마다 하면 할 수 있을까.

시를 산문보다 읽지 않게 되는 이유는 뭘까.
시는 난해하다. 이게 첫 번째고.
시는 모르겠다. 이게 두 번째고.
시는 답답하다. 이게 세 번째고.

그럼에도 시를 읽고 싶고, 읽어야겠다 싶은 이유는 뭘까.
시는 느리다. 이게 첫 번째고.
시는 여유다. 이게 두 번째고.
시는 사유다. 이게 세 번째고.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도 난해하고, 모르겠고, 답답한데, 아, 이 대목에서 나도 가만히 멈춰 있게 되었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나 역시 이래본 적이 셀 수 없이 많았기에.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적나라해서 아픈 문장이다. '늙어간다'는 나와는 거리가 먼 말이었는데, 어느 사이 가까워졌다. 그 사실이 섬뜩한데, 시인이 대신 말해준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시간은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일까? 아니, 아직 넘 이른가. 아직은 이르다고 해두자. 그래. 아직은.

짧은 글로 깊은 사유를 길어올린다는 점에서 시집은 가성비 갑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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