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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렵다.
"그녀의 자아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 그녀의 운명으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이다! 그녀에게 다른 이름을 준 다음 그들은 결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길이 없는 그녀를 익명의 사람들 속에 내던질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곳을 빠져나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문에는 못질이 되어 있었다. 겸허한 자세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처음,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우선 필요불가결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녀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랐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생각이 되살아났다. 그가 여기 있다면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그의 얼굴을 기억해 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녀 이름을 발음하는 입모양을 상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어이쿠, 읽기는 빨리 읽었는데 얼크러져 정리가 안 된다. 그러니까 위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정체성이란 결국 나 혼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통해 찾아간다" 는 의미? 김수영의 시 '꽃'처럼! 그렇구나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나'가 등장한다.
계속해서 그녀와 그를 지켜보았다는 듯이 등장한 '나'가 쏟아놓는 말
'그리고 나는 자문해본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의 삶이 이런 뻔뻔스런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 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더 먼저일까? 필적 감정사 사무실에서 그녀가 노르망디 카페의 남자 종업원을 만난 그날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일까?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첫번째 편지를 보냈던 때였을까?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와우! 어지러워진다! '나'는 또 도대체 누구이고, 이 질문의 답은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 것일까? 내 삶인가? 아니면 그녀의 삶인가? 아니면 그? 이 책 정말 불친절하다. 내가 어디서부터 놓치고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든다. 한데....마지막 장의 그녀의 말이 힌트를 주고 있는 듯하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요.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여들까 하는 두려움"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 거예요. 매일 밤마다" ㅡ그녀는 결국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지난 번에 얘기했던 바처럼 현재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며 현재를 무시하는 꿈을 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녀 이야기다. 숨고르기를 해야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