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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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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본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고귀한 가치라는 데 딱히 소명을 밝힐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하는 이 시대, 사회적 맥락의 현실을 그저 답답하게 견디고 있다

더 소유하기 위해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의 시대가 지나고 나니 더 나은 세상을 맞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아직은 기대한 만큼의 성숙한 사회란 요원한 듯하다. 어떤 식으로든 자유라는 기본적인 가치조차 보장하기 힘든,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의 성숙은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는 만큼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버젓이 자행되어 온 억압이 도처에 있다는 걸 외면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아직도 이 혼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조지프 앤턴> 자서전을 보면, 우리가 말할 자유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들을 상기하게 된다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 한국 사회의 언론 환경과 말할 자유그리고 국제뉴스에서 접한 세계 사정들의 일들이 겹쳐져 생각나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절묘하게도 현재 우리가 사는 풍경과도 무관하지 않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주지프 앤턴은 신성 모독죄라는 오명을 쓰고 종교적 사형선고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의 당사자이면서, 실제 이름 살만 루슈디라 불리우는 소설가이다. 그는 이 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독특한 형식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앞선 저서 <악마의 시>를 발표와 동시에 본국에서 결코 용인되지 못할 분노를 사게 되었고 생존까지 위협당하는 길고 긴 싸움에 돌입한다. 모독의 죄명에 말할 자유는커녕 목숨까지 잃게 되었으나 영국정부의 도움으로 졸지에 난민의 신세가 된다. 타국에서 오랜 세월 견디는 동안 감옥이 따로 없었고 오명이 풀린 오늘에 이르러서도 진정 자유가 보장되는 삶은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씁쓸했다. 


루슈디는 어째서 아무도 내뱉지 않을 말을 할 수 있었나? 애초 이런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부모의 열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어릴 때 영국에서 성장한 배경이 있었기에 다른 렌즈를 얻을 수 있었다. 작가적 숙명으로 타고난 눈이 유별났기 때문이라기보다 보편적 가치에 기인한 문제의식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소설로써 말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었고, 알다시피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과연 종교란 한 사람의 목숨에 좌지우지할 만큼의 관여가 가능하고 자비와 관용 없이 횡포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설사 모독을 했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국가는 왜 합리적 시스템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못할까. 아무리 특수한 사회문화와 역사적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의 종교적 침해라면, 섬기는 가치가 어떤 숭고함에 위장된 악이거나 폭력은 아닐지 왜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을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또 어떤 식으로 심판받을 수 있을지.



단순히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자유의 정도라면 유보하되 영원히 포기되는 일은 아니지만 루슈디에게 자유란 강제로 포기돼야만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든 꼭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필사적인 것이 되었다. 루슈디의 이 필사적인 생존기가 지금 이 시대에 정말 많은 의미들을 던져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계적 상황들이 여전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나아지는 일들이 있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억압과 횡포를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굴복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회복될 기미가 희미하다. 권력의 힘에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경향들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사는 앞으로도 계속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의 횡포에 취약할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질 수 있는 가치를 굳게 품어야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최소한 자신이 말할 자유에 대해서는 그것을 놓치거나 빼앗기게 되었을 때 항거할 수 있는 담대함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힘에 굴복하면서 스스로 평범함 속의 비겁함이 모이면 더 비대한 힘을 더 길러내는 원인이 되고 부메랑처럼 내가 맞게 되어 있다. 불행히도 현재의 세계적 흐름이 이 엉성한 힘들이 모인 위협인것만 같아 아슬아슬하다.  



조지프 앤턴의 자서전에서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로서 자신을 자유롭게 말하는데 온 힘을 바친다. 자서전이면서도 이 책은 마치 소설과 같은 말하는 화자가 존재한다.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이런 발화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과하지 않나 싶을 만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면모가 길고 상세하게 소개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아주 긴 소설 속을 헤매는 듯 한 기분마저 준다. 작가이기 때문에 글쓰기에 대한 여러 통찰과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낌없이 쏟아내는 삶의 위대한 발견의 지점이 흘러나오지만, 이 책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합리화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진술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쏟아 붓는 지지와 사랑을 낯설어 하면서 어떤 특정한 상징처럼 보이게 되는 것을 꺼렸다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그의 삶 자체였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가 결코 작가만이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듯 항변하는 자세로 일관하는 것이다. 무거운 고뇌를 내뿜는 망령과 같은 영웅이 되는 것 대신에 다만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삶이 곧 투쟁이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야말로 실존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인 이 책의 핵심으로 보인다.



루슈디가 소설을 통해 말하는 자유와, 실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자서전을 통해 말하는 자유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첫 번째로 소설에서 궁극으로 이야기 되는 자유는 우리가 함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자유 즉 모두에게 평등할 수 있는 교양을 갖춘 자유이다. 불평등을 수반한 억압의 기제로 사상과 종교가 사용된다면 그 사회의 자유란 말살 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두번째, 루슈디가 자서전에서 밝히는 실제 평범한 삶의 모습에서의 자유는 아무도 나를 구속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자유를 말한다. 불행히도 루슈디는 손님하나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는 구속된 일생을 보냈지만 이런 우스꽝스런 자신의 모습을 통해 역설로서 자유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를 누려야만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조지프 앤턴>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나 하는 물음을 삶의 언저리에서 던져주는 책이다. 그것은 평범한 우리들의 진일보한 목소리가 모여질 때 더 단단해져가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우리의 내일을 맞자고 말하는 강한 삶이 거기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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